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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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얼마 읽지는 않았지만, 읽은 책들이 모두 괜찮아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하나 둘 사두었는데, 얼마 전 신간 코너에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새로운 책을 알게 되었단다. 책 표지는 또 어찌나 매혹적인지매혹적인 사진과 잘 어울리는 책 표지는 지은이가 슈테판 츠바이크임을 몰라도 구매욕구를 잔뜩 당기는 디자인이란다. 그래서 저절로 지갑이 열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책이 집에 도착해 있었단다. 그리고 바로 읽었는데, 먼저 읽은 이들의 평점이 almost ten인 이유를 알겠더구나. 이야기의 전개가 깔끔하면서도, 베껴 쓰고 싶은 글들이 여기저기 포진하고 있으면서도 아빠가 읽은 츠바이크의 책들 중에 가독성이 가장 좋았단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마무리 부분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해도 좋겠지만, 츠바이크 님이 이 소설의 마무리를 짓지 못하신 것 같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슈테판 츠바이크는 스스로 삶을 마감했단다. 그가 세상을 등지고 나서 이 원고가 발견이 되었고, 한참 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그가 떠난 지 40년이 지난 1982년 독일에서 먼저 출간되어 큰 히트를 치고, 그 이후 전세계로 퍼져나갔단다. 그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이 소설의 이야기는 어떻게 마감이 되었을까, 궁금하구나. 소설 밖의 이야기는 아쉽지만 읽는 이들의 몫으로아무튼 이 소설을 읽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찐팬이 되기로 했단다.


1.

1926년 오스트리아. 1914년부터 1918년 세계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같은 편이었단다. 그들은 전쟁에서 지고 말았어. 전쟁의 패배는 오스트리아를 폐허로 만들었고, 경제 등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이 무너졌단다. 오스트리아 전체에 걸쳐 푹 내려앉은 분위기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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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관료주의 특권계급이 신성시하는 이 사무 공간에서는 눈에 띄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장쇠퇴라는 영원한 법칙이 이곳에서는 관료주의의 높은 장벽에 가로막혀 적용되지 않는다. 우체국 건물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자. 나무들은 봄에 꽃을 피우고 가을이 되면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아이들은 자라고 나이가 들면 백발이 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건물이 낡으면 허물어져 새 건물이 들어선다. 그런데 이 나라 관료주의는 항상 똑 같은 것만 고집하고 세속의 권력을 과시하고 있다. 우체국 비품이 소진되었거나 분실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훼손되었으면 상급 관청에 요청한다. 그러면 역시 빠르게 변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막강한 권력의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용이 되는 알맹이는 없고, 형식이라는 껍데기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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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은 모두 가난과 싸우며 하루 먹거리를 걱정하며 살아갔단다. 주인공 크리스티네도 마찬가지였어. 전쟁 전에는 유복한 집안에서 지냈지만, 전쟁이 집안을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았단다. 오빠는 참전했다가 전사하였고, 그 충격인지 아버지도 1917년 갑자기 돌아가셨어. 언니는 결혼하여 빈에서 살고 있었고, 크리스티네는 병든 엄마와 단둘이 시골에 좁은 집에서 살고 있었단다. 아는 사람을 통해서 우체국에 다니고 있었지만, 크리스티네의 낙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저 집과 우체국을 왔다 갔다 할 뿐이야. 28, 한창 꾸미고 다닐 나이였지만, 우중충한 옷으로 시체처럼 지내고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날 미국에 사는 이모가 스위스에 여행 왔다면서 엄마에게 놀러 오라고 했으나, 편찮으신 엄마는 갈 수가 없었어. 그 대신 크리스티네에게 다녀오라고 했어. 엄마도 딸이 자신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는 것에 보기 안쓰러웠겠지. 클레르 이모는 미국에서 사업을 남편과 살고 있었고 무척 부자였다는 것만 알고 크리스티네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단다. 그렇게 크리스티네는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처음으로 휴가를 쓰고 처음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단다. 그 동안 쓰지 않은 휴가가 쌓여 2주 동안 스위스에 지내기로 했어.

크리스티네는 기차를 다고 스위스에 있는 호텔에 도착을 했는데, 그곳은 딴 세상이었단다. 자신이 입고 온 옷은 너무 누추해서 눈에 띠었어. 난생 처음 조카를 만난 이모와 이모부는 반갑게 맞아주었고, 크리스티네는 휴가 동안 묵을 자신의 방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추레한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큰 방이었어. 이모는 크리스티네를 데리고 가고 옷도 새로 입히고, 화장품도 새로 사주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다듬게 했단다. 이런 봉사를 받는 것이 얼마만인지 그리고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크리스트네는 그렇게 꾸미고 나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어. 그리고 원래 얼굴도 좀 예뻤거든.

그날 저녁 식사 연회의 주인공은 크리스티네였단다. 연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젊고 예쁜 뉴페이스 크리스티네에게 관심을 가졌어. 춤을 청하고 잘 보이려고 했어. 크리스티네는 하루 만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자신에 놀라면서도 행복했단다. 이모부와 이모의 성이 반 볼렌이었는데, 사람들은 크리스티네가 그들 일가인 것으로 알고 크리스티네 반 볼렌으로 알았다가 크리스티아네 판 볼렌으로 부르기 시작했단다. 노신사 앨킨스 경과 독일 엔지니어 등 크리스티네에게 구애하는 이들도 있었단다.

이런 급변한 상황에 대해 크리스티네는 약간은 당황하면서도,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았어 며칠 전만 해도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던 우체국 여직원이었는데 말이야. 이곳에서 생활은 크리스티네를 새로 태어나게 했단다. 사교계에 잘 적응하여 누구와도 잘 지내고 이 순간을 잘 즐겼어. 그리고 지금의 이 모습이 자신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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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49)

도대체 나는 누구지? 수년 동안 사람들이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쳐 갔지. 오래도록 시골 마을 우체국에 앉아 있었는데도, 아무도 뭐 하나 챙겨주거나 걱정해 주지 않았잖아. 고향 사람들 모두 너무 가난하다 보니 빈곤함에 지쳐 의심만 늘게 된 걸까? 아니면, 내가 갑자기 매력적인 여자로 변했나? 지금까지 밖으로 표출되지 못했던 매력이 이제야 나타났나? 내가 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예쁘고 똑똑하고 매력적인데 다만 그렇게 믿을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 아닐까? , 나는 누구인가? 진정한 나는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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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엄마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까지 잊고 있었단다. 그로 인해 이모로부터 질책을 받기도 했어. 엄마한테 온 편지들도 읽지 않았다가 그제서야 편지를 꺼내 보았어. 엄마가 아프셔서 편지도 이웃에 사시는 분이 대신 보내주었단다. 크리스티네는 엄마에게 편지를 써야지, 다짐하였는데 또 다시 유혹에 빠져 야밤에 외출하고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왔단다.


2.

사교계에 갑자기 떠오른 별과 같은 크리스티네,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왜 없었겠니.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크리스티네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내기 시작했어. 그녀의 성()은 알려진 것처럼 판 볼렌이 아니고, 상류층이 아닌 하류층의 사람이라는 소문들 퍼뜨렸어. 이런 소문이 퍼지는 것은 삽시간, 다들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어. 이모도 이런 소문을 모르고 있다가 앨킨스 경이 찾아와 소문에 대해 알려주었단다. 이모는 솔직히 이야기를 했어. 전쟁 전까지는 잘 살았는데, 전쟁 이후 어렵게 살고 있다고그리고 자신의 친조카는 맞다고 했단다.

앨킨스 경은 그녀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잘 대해주었지만, 소문은 가라앉지 않고 안 좋게만 커져갔단다. 이미지를 중요시 생각하고, 이모의 숨기고 싶은 과거까지 밝혀질까 봐 이모는 결국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면서 이모부와 함께 인터라켄으로 갈 테니, 크리스티네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단다. 원래 2주간의 휴가였으니 집으로 조금 일찍 가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닌데, 그동안 크리스티네는 많이 변해서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진거야.

집으로 가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생각이 든 크리스티네는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던 독일 엔지니어를 찾아가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지만, 거절 당했단다. 그도 소문을 들은 거지결국 다음날 올 때 입고 왔던 추레한 옷을 입고 집에 들어왔단다. 여행을 가기 전에 겉모습과 같은데,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단다. 하지만 암울한 현실은 여전히 같았어. 간발의 차이로 임종을 보지 못한 엄마는 돌아가셨어. 그녀가 오자마자 장례식을 치렀어. 언니, 형부, 올케 등이 왔는데 장례식 끝나자마자 엄마의 유품을 나누자는 이야기에, 가난에 대한 증오로 치솟았단다. 폭발 직전. 하지만 크리스트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어.

예전의 우체국 아가씨 생활을 시작했지만, 참을 수 없었어. 이것이 자신의 본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야. 자신의 본모습은 스위스 호텔에 있는 그 모습이라는 거지. 주변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고, 사소한 일에 짜증을 내고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 이 숨막힘을 참지 못한 크리스티네는 무작정 빈으로 갔단다. 이 시골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으로스위스에서 이모부가 준 현금이 조금 있었는데, 그 현금을 들고 무조건 빈으로 갔단다. 빈에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지만, 크리스티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없었어. 집에 오는 길에 언니 집에 들렀는데, 형부 프란츠의 옛 전우 페르디난트가 우연히 찾아와 크리스티네도 함께 자리를 했단다. 형부와 페르디난트는 여자들이 싫어하는 이야기 1위인 군대 이야기, 전쟁 이야기로 이야기 꽃을 피웠단다.

언니에 집에서 나와서 집에 돌아가야 했지만, 크리스티네는 페르디난트와 좀더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어. 이후 일요일마다 그들은 데이트를 시작했단다. 가난한 연인들이라고 할 수 있었지.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어. 카페에서 만나거나 같이 길을 걷거나


3.

그러던 어느날 우체국으로 찾아온 페르디난트. 헤어지자고 폭탄 선언을 했어. 사실 자신의 미래는 암울하고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기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대.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크리스티네도 자신의 미래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같이 자살하자고 했단다. 그 대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최고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자살하자고 했단다.

그날 저녁 퇴근 시간에 맞춰 다시 우체국으로 온 페르디난트. 크리스티네가 큰 돈을 다룬다는 것을 알고는 새로운 제안을 했단다. 죽지 말고 그 돈을 갖고 가서 새로운 세상에서 살자고 말이야. 크리스티네는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고, 그것은 나쁜 짓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이 이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국가이니, 그 책임도 국가에 있다고 이야기했어. 그리고 자신들이 훔치려는 이 돈도 국가의 돈이니, 그 보상을 스스로 받아내는 것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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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289)

그래, 우리는 참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어. 어떤 의사도 6년간의 젊음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을 치료할 수는 없어. 누가 내 젊음을 보상해 주지? 국가가? 그 고위층 사기꾼들이? 그 고위층 도둑놈들이? 40명이나 되는 장관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대봐. 법무부 장관? 복지부 장관? 산자부 장관? 공정하게, 사리사욕 없이 정말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고급 공무원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이름을 대봐. 그들은 우리를 전쟁으로 몰아넣고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고, ‘황제 만세!’를 외쳤어. 물론, 지금은 다른 걸 들려주고 있지. 진흙탕에서 보니, 세상이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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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어. 하지만 크리스티네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며칠을 고민 끝에 페르디난트의 계속에 동의했어. 페르디난트는 완전범죄를 꿈꾸기 위해서, 사전에 알리바이도 충분히 만들고 어떻게 훔칠 것인가, 훔치고 나서 어떻게 움직이고 행동하는지 아주 세세하게 계획표를 만들었단다. 일명 우체국 현금 절도 계획서라고 해서 분량이 꽤 되는 계획서를 만들었단다. 알고 봤더니 페리디난트, 이 사람 엄청 꼼꼼한 사람이구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잘 할 것 같은데, 그의 말대로 국가가 잘못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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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나도 그걸 알면 좋을 텐데. 계획서는 빠진 것이 있을 거야. 모든 범죄에는 구멍이 있지. 하지만 어디에 허점이 있는지 미리 알 수는 없어. 아무리 꼼꼼한 범죄자라도 예외 없이 사소한 실수를 하게 마련이야. 문서란 문서는 전부 없애버리고는 어리석게도 여권을 남겨놓는다든가 하는 실수 말이야. 온갖 장애물을 다 고려하지만 가장 분명하고 틀림없는 장애물은 간과하게 되지. 뭔가 한 가지를 꼭 잊어버려. 아나 나도 가장 중요한 사항을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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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테도 그 계획서가 마음에 들었고, 다시 한번 함께 이 일을 하자고 하면서 소설을 끝이 났단다.

아빠가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지 못해서 아빠의 편지만 읽고는 이 소설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안 들지 모르지만, 아빠는 읽는 내내 재미있었단다. 아빠가 책 추천을 잘 안 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까지 했단다. 아빠는 사실 이 작품이 미완성으로 추정되는 유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읽었어그래서 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야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 싶었단다. 뒤늦게 역자 후기를 읽어보고 이 작품이 유작이고 미완성으로 추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만약 지은이 슈페탄 츠바이크가 그 뒷이야기를 이어갔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갔을까? 궁금하구나. 그리고 이 작품이 나온 지 꽤 되었는데, 다른 작가가 이 이야기의 속편을 써 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크리스티네는 충분히 매력적인 주인공인데, 이 뒷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어떤 뛰어난 작가가 이 소설의 속편을 함 출간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아빠는 뒷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한번 생각해 봐야겠구나. 나중에 너희들도 이 책을 읽게 되면,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뒷 이야기를 한번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구나.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오스트리아의 마을 우체국은 어디를 가나 비슷하다.

책의 끝 문장: “좋아, 한번 해보자!”


웅장한 대자연을 바라보며 여자는 마치 땅을 갈아엎는 쟁기처럼 인간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 여행의 힘을 실감했다. 여행은 일상의 삶에 익숙해져 단단하게 굳어버린 영혼의 껍질을 단번에 벗겨버리고,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변신을 향한 욕망에 언젠가 열매가 열릴 씨앗을 심어놓는다. - P60

곧 자명종이 울릴 거야…… 다시 잠들면 안 돼…… 책임감! 책임감을 잊어선 안 돼! 당장 일어나자. 여덟 시에 업무가 시작되잖아. 그전에 일어나서 불 피우고 커피 끓이고, 우유와 빵 사 오고, 방을 정돈하고, 어머니 붕대를 갈아주고, 점심 식사 준비도 해놓아야 하잖아?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더 있었는데…… 아! 맞아. 식료품 가게 여주인이 어제 외상 갚으라고 했었지…… 안 돼, 자면 안 돼. 정신 차리고 자명종이 울리면 일어나야 해…… 그런데 오늘은 무슨 문제가 있나? 자명종이 울리질 않아…… 고장 났나? 태엽 감아 놓는 걸 깜빡했나? 자명종 어디 있지? 방 안에 빛이 벌써 환한데…… - P112

심장은 격렬하게 고동쳤고, 언제라도 날아오를 듯이 상쾌했다. 끊임없이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가슴은 마치 감전된 듯한 전율을 손가락 끝까지 전해주었다. 이상하고, 강렬하고,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이제는 오히려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고, 갑자기 몰아닥친 강풍에 날리듯 여기저기로, 안으로 밖으로, 위층과 아래층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계단을 오를 때도 한 번도 한 계단씩 오르지 않았다. 뭔가를 잊은 사람처럼 마음이 들떠 늘 세 칸씩 뛰어올랐다. 놀고 싶은 충동과 애정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해, 손은 늘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언가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양팔을 활짝 펼치고 먼 곳을 향해 터져 나오는 웃음과 환호를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 P141

정상에 선 사람은 세상을 제대로 내려도보지 못하고, 행복에 겨운 사람은 남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법이다. 실제로 고생해본 사람만이 어떤 일에나 방심하지 않고,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렇게, 직감적으로 위협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기고 남보다 더 영리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 P176

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 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 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 똑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 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P234

여자는 매일 아침 증오심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자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는 것은 연기에 그을린 다락방 천장의 대들보였다. 낡은 침대, 싸구려 누비이불, 등나무 의자, 깨진 물주전자가 놓여 있는 세면대, 벗겨진 벽지, 판자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모든 것이 지지리도 궁상맞고 흉측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캄캄한 어둠 속에 파묻혀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자명종 소리는 여자의 귓전을 때리며 그런 작은 바람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옷을 입었다. 해진 속옷, 역겨운 검은색 원피스…… 원피스의 소매는 이미 오래 전에 찢어졌지만,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 P253

"나는 누구한테도 불평하지 않았어.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쉬지 않고 불평했던 사람은 언니였어. 그리고 스위스는……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내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내게도 할 이야기가 있는 거야. 나는 우리가 무엇을 빼앗겼는지를 이제야 알았어. 내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전쟁이 내게서 무엇을 빼앗아 갔는지, 우리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조차 모르고……"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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