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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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라는 영화가 얼마 안 있으면 개봉한단다. 오펜하이머라고 하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람인데, 2차 세계대전 때 핵폭탄을 만든 맨하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고도 있단다. 아빠는 오래 전에 제레미 번스타인의 <베일 속의 사나이 오펜하이머>라는 책을 읽고 나서 오펜하이머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단다. 그런데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 예고편이 추천동영상으로 떠서 보게 되었단다. 눈이 돌아갈만한 화려한 출현진도 출현진이지만, CG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핵폭탄 장면을 어떻게 찍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예고편만 봐도 영화의 웅장함이 느껴졌단다. 우리나라의 개봉일은 8 15일에 한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날짜를 잘 잡았구나. 아무래도 우리나라 광복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이니까….

유튜브에서 <오펜하이머> 예고편을 보고 난 얼마 후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초기 화면에 낯익은 얼굴이 책 앞표지를 가득 채운 책 한 권이 올라왔단다. 유튜브에서 본 예고편 속의 그 얼굴. 오펜하이머. 그 책을 바로 클릭해봤는데 오펜하이머의 평전이더구나. 책의 제목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으로부터 불을 빼앗아 간제우스 신으로부터 다시 불을 빼앗아 온 그리스 신이잖니..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식상한 말보다 훨씬 있어 보이는구나. 책 제목 잘 지은 것 같구나. 이 책은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을 앞두고 출간한 모양인데, 이미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인데 이번에 특별판으로 다시 출간한 것이라고 했단다.

아빠가 오펜하이머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도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영화 <오펜하이머>의 예고편이 떠올랐다고 했잖아. 그래서 처음에는 책 표지 사진이 영화 속 배우 사진인줄 알았단다. 다시 자세히 훑어 보니 오펜하이머의 실제 사진이었단다. 당연히 오펜하이머의 사진이어야겠지. 순간 든 생각은 영화 속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을 진짜 잘 뽑았다는 생각과, 엄청 잘생겼다는 생각이었단다. 책 소개를 읽다 보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책을 읽고 영화화 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아빠는 이미 오래 전에 오펜하이머에 대한 책을 읽었지만, 기억도 다 흐려졌고, 영화를 보기 전에 준비 운동으로 읽어보려고 바로 결재했단다.

결재할 때는 책 소개를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집에 도착한 책을 보니 어마어마한 벽돌책이더구나. 천 페이지가 넘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주석과 참고 문헌이 백 페이지 정도 되었고, 실제 읽어야 할 부분은 900페이지 남짓이었단다. 그래도 900 페이지라도…. 이렇게 두꺼우면 출판사 욕심이 분책을 했을 텐데, 분책하지 않고 한 권으로 내준 것이 고맙구나. 이 책은 카이 버드라는 사람과 마션 셔윈이라는 사람의 공저인데, 참고 문헌도 엄청난 것으로 보아 지은이들도 참 대단한 사람들인 것 같구나. , 그럼 이 책의 내용을 시작해 보자꾸나.


1.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그의 부모님은 독일계 이민 1, 2세대로 아버지는 사업가이시고, 어머니는 화가였단다. 모두 유태인이었고, 뉴욕에서 살고 있어서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04 4 22일 뉴욕에서 태어났단다. 오펜하이머가 성()이긴 한데 그 이름이 유명하니, 호칭은 오펜하이머로 이야기를 할게. 오펜하이머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업 성공으로 생활이 넉넉했단다. 네 살 어린 둘째가 태어나자마자 죽어서, 오펜하이머의 부모님들은 오펜하이머를 과잉보호 하면서 키웠다고 하는구나. 다시 동생이 태어났는데 오펜하이머보다 여덟 살 어린 프랭크였단다.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둘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무척 친하게 지냈단다.

오펜하이머는 하버드에 입학을 해서 화학을 전공했는데, 3년만에 졸업을 하고 물리를 공부하고 싶어서 영국 켐브리지 대학의 러더퍼드 교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지원을 했단다. 화학과 물리, 그 어려운 학문을 둘다 하고 싶었다니아빠 같은 범인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그런데 러더퍼드는 오펜하이머를 불합격시켰다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오펜하이머의 추천서를 톰슨에게 넘겼는데, 톰슨은 그를 받아주었어. 러더퍼드, 톰슨이런 분들은 현대물리학에서 있어 유명한 사람들로 너희들도 교과서에서 많이 보게 될 사람들이란다. 어떤 일은 한 것까지 이야기하기에는 이 편지가 길어질 것 같으니, 오늘은 오펜하이머에만 집중을 하는 것으로 하자.

그렇게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양자역학을 접했다고 하는구나. 지금까지 삶을 보면 공부를 엄청 잘하는 모범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에게도 단점이 있단다. 학교 생활에 불안을 느끼는 경향이 있어 우울증도 겪고 발작 증세도 있었어. 그래서 정신과 진료도 한 동한 받았다고 하는구나. 친한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증세가 좀 좋아졌다고 하는구나. 친한 친구들과 여행은 이렇게 사람의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해주는구나.

오펜하이머는 점점 공부하면 이론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했어. 그런데 당시 켐브리지 대학은 실험 물리학의 중심지였어. 이론 물리학의 중심지는 독일의 괴팅겐이라는 곳이었어.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1926년 괴팅겐으로 자리를 옮겼단다. 괴팅겐에는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많았고, 오펜하이머 역시 그들과 교류하면서 양자역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했단다. 막스 보른,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 양자역학을 연구한 물리학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젊은 과학자들이었어. 이제 막 떠오르는 양자역학은 젊은이들의 과학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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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양자 물리학은 확실히 젊은이들의 과학이었다. 젊은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물리학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을 그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몇 년 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난 오펜하이머는 실망한 채로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만방자하게도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맛이 갔어.”라고 썼다. 하지만 1920년대 말까지만 해도 괴팅겐의(그리고 보어의 코펜하겐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아인슈타인에게 그들의 양자 이론을 설득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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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보른은 오펜하이머의 지도교수였어. 오펜하이머는 괴팅겐에서 공부하면서 양자역학에 대한 논문을 많이 꼈단다. 1927년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에서 강의를 했는데 당시 미국에는 양자역학을 연구한 물리학자들이 드물어서 오펜하이너는 양자역학의 선두주자라 볼 수 있었지. 잠시 미국에 머물던 오펜하이머는 다시 양자역학을 공부하기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의 에렌페스트 교수에게 배우려고 했는데, 에펜페스트 교수가 우울증을 앓고 계셔서 오펜하이머는 스위스 취리히 파울리 교수에게 지도를 받게 되었단다. 파울리 교수 밑에서 1929년까지 많은 논문을 썼는데, 이 즈음에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어.

1929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어. 잠시 쉴 때는 주로 뉴멕시코에서 지냈는데, 동생 프랭크와 자주 같이 지냈다고 하는구나. 형으로서 십대 프랭크의 인생상담도 많이 해준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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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오펜하이머는 동생에게 모든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 그런 욕망이 꼭 허영심만은 아니야. 하지만 그와 같은 매력은 가지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사람들은 멋진 취향이나 행복을 갖고 싶어 하지만 의지만으로 그것들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것들은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이야.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무런 설계도 없이 기계를 만들려는 것과 같을 테니까.”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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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문학도 많이 읽고,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시도 자주 썼는데, 문학잡지에 실리기도 했다는구나.


2.

미국에 와서 그는 칼텍과 버클리 대학교 분교에서 일하게 되었어. 그와 친한 동료 교수로는 로런스 교수가 있는데, 로런스는 실험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사이클로트론을 발명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단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정세가 급박하게 변했어. 1933년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태인을 탄압하게 되어 많은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그 중에 유명한 과학자들도 많이 있었어. 오펜하이머는 이들 과학자들을 후원하기도 했단다. 오펜하이머는 이때 인도출신 동료 교수를 알게 되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영향을 받기도 했대.

1930년대는 히틀러의 나치가 독일에서 세력을 키워나가고 공산주의도 전세계적으로 퍼지던 시기여서,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 오펜하이머와 주변 사람들도 관심을 갖게 되는데 1930년를 살던 사람이 정치성을 띠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단다.

, 이번에는 오펜하이머의 사랑 이야기를 좀 해보자꾸나. 1936년 스탠퍼드 의대생 진 태트록을 알게 되어 둘은 사랑에 빠진단다. 그런데 진 태트록은 공산당을 가입하게 되어 나중에 오펜하이머에도 이 일로 심문을 받게 된단다. 그리고 진 태트록을 통해서 다른 공산당원들과 교류를 하게 돼.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에 정식 가입한 이력은 없다고 하는구나.(공산당에 가입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긴 해.) 그래서 FBI에서 오펜하이머도 조사 대상에 올렸고, 단순동조자로 판단하였다고 하는구나.

1939년 독일과 소련은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었어. 이것이 무엇이냐면, 독일과 소련은 서로 침략하지 않고, 남을 침략해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거야. 당시 독일이 폴란드를 불법 침략을 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했는데, 소련은 간섭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독일 편을 들어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어. 이 소식을 들은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도 의견이 분분하였고, 소련의 이런 행동에 실망한 이들의 공산당 탈당 러시가 이루어졌대. 오펜하이머도 이 때부터 소련을 경멸하기 시작했다는구나.

오펜하이머는 진 태트록과 4년 정도 사귀고 헤어졌어. 그리고 키티 퓨닝이라는 유부녀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임신까지 하게 되어 키티는 이혼을 하고 오펜하이머와 결혼을 하였단다. 1940 11월이었어. 키티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하면, 키티도 공산주의자로 유럽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었어. 첫 번째 남편은 한술 더 떠서 스페인 내전까지 참전했는데, 그만 전쟁에서 죽고 말았단다. 남편이 전사하고 나서 키티는 충격을 받고 미국으로 와서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생물, 화학, 수학을 공부했대. 그 대학에 다니다가 같은 대학 의과 대학 인턴을 사귀고 두번째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실패한 결혼으로 무늬만 유부녀였어. 그 시기에 오펜하이머를 만난 것이란다.


3.

1939 1월 우라늄의 원자핵을 2개 이상으로 쪼갤 수 있다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 이것이 뭐 대단한 것이냐고 보통 사람들은 이야기하겠지만, 물리학자들에게는 한 가지를 떠올리게 했어. 핵폭탄(원자폭탄). 우라늄의 원자핵 분리를 이용하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1942년 미국의 물리학자들(아인슈타인도 포함)과 여러 관계자들은 모여서 원자폭탄 개발의 필요성을 루즈벨트 대통령한테 설명을 했대. 특히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만들면 큰 일 난다고 했고, 이미 독일은 원자폭탄 개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미국은 독일에 비해 원자폭탄 개발이 늦었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들의 제안을 허락했고, S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오펜하이머도 동참했단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맨하튼 프로젝트라고 명명했고, 엔지니어 출신 육군 중령인 그로보스가 총지휘를 하였단다. 이렇게 맨하튼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 1942 9월이었단다. 그로보스는 연구 총책임자로 오펜하이머로 지목했어. 하지만 당시 동료연구원들은 오펜하이머가 총책임자로 적임자는 아닌 것 같다고 했어. 정치권에서도 그가 공산주의 활동을 이유로 반대를 했어.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는 일을 하면 할수록 총책임자의 적임자가 되어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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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한때 괴짜 이론 물리학자이자 장발의 좌파 지식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제 대단히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일류 지도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윌슨은 그에게는 품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지요. 그는 우리가 그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던 것들을 단 몇 달만에 말끔하게 털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행정적인 절차들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구심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했다. 1943년 여름 무렵이면 윌슨은 그와 함께 있으면 내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오펜하이머의 사람이 되었고, 그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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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밀 프로젝트를 위해서 장소를 섭외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협곡 사이에 위치한 로스앨러모스라는 곳이었어. 그곳에 대규모 연구 단지를 지었고, 가족들이 함께 와서 살 수 있는 마을도 새로 지었단다. 오펜하이머는 연구 단지뿐만 아니라 연구 단지 마을의 인프라에도 신경을 써서 부족함 없게 했다는구나. 오펜하이머는 전국 각지의 인재들을 섭외하게 되었는데 그중에 리처드 파인만도 포함되었다고 하는구나. 오펜하이머의 가족들도 로스앨러모스의 공동체 마을에서 생활했는데, 카티는 이곳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대. 이곳에 와서 둘째 아이인 딸 토니를 낳았는데, 갓난 아기 토니를 이웃집에 맡기고 첫째 피터만 데리고 여행을 하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그곳 생활을 적응하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이제 오펜하이머의 목적은 단 하나. 나치스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일. 독일에서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하는 인물이 하이젠베르크라는 소문이 있어. 하이젠베르크를 납치하려는 계획도 있었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고 하는구나. 하이젠베르크가 독일로부터 원자폭탄 개발을 제안 받았으나 그가 일부러 개발을 늦추거나 못하겠다고 하는 소문도 있었다는 기억이 나는구나.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쓴 소설 <클링조르를 찾아서>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그 책을 일고 쓴 독서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

이런 와중에도 FBI는 여전히 오펜하이머를 검열하고 도청하면서 감시했다고 하는구나. 오펜하이머가 전 여친 진 태트록을 만났는데, 소련을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고 의심을 하기도 했어. 하지만 진 태트록은 조울증과 우울증과 싸우고 있었으며, 결국 그 싸움에서 지고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고 하는구나.


4.

양자역학의 거물급 학자인 닐스 보어도 미국으로 망명을 왔단다. 2년 전에 하이젠베르크를 만났다고 했는데 그 때 어떤 대화가 이루어졌는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고 했어. 이 내용도 앞서 이야기한 소설 <클링조르를 찾아서>에서도 그들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구나. 보어는 원자폭탄 개발에 있어 정치적 윤리적 문제를 가지고 국제적으로 협의를 해야 한다고 했어.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은 개발이 진행될수록 고민이 되었을 거야.

1943 12, 독일이 원자폭탄 개발을 중단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어. 그러면 미국도 원자폭탄 개발을 중단해야 하는가. 독일이 아니면 일본도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했어. 원자폭탄 개발은 일정대로 진행되었어. 1945 5월 히틀러가 자살을 하면서 사실상 유럽에서2차 세계대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단다. 원자폭탄을 개발해도 쓸 데가 없는 건가? 이제 남은 것은 일본인데, 사실 일본도 시간만 지나면 패망할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었어. 정치인들과 군인들 사이 폭탄 사용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어.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 장군은 원자폭탄에 반대했다는구나.

하지만 변수가 하나 있었어. 소련이 미국과 일본 전쟁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어. 시간이 지나면 일본이 패망하는 것은 맞는데, 소련이 일본본토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면 전쟁 후 상황이 복잡해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소련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원자폭탄이 해결책이라고 했지. 드디어 원자폭탄 개발이 완료되어 사막에서 폭발 시험을 했는데, 시험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성능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면서도 향후 이 무기가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었을지도 몰라.

그리고 1945 8 6일 오전 8 14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어. 3일 후에는 나가사키에 떨어졌고그 두 방으로 일본은 곧바로 항복을 하고 전쟁은 끝이 났단다. 피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단다.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끌려온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았는데 우리나라 사람도 많이 돌아가셨어. 그 이야기는 한수산 님의 소설 <군함도>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구나.

...

이 일이 있고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는 화학무기처럼 국제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고, 그것이 국제 회담에서 논의되길 바랬어. 하지만 미국, 영국, 러시아(소련)이 모여 진행한 포츠담 회담에서 핵무기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어. 오펜하이머는 이에 실망하면서도 계속 원자폭탄을 포함한 슈퍼폭탄은 더 이상 안 되고 국제적으로 규제해야 하고 미국도 핵폐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단다. 하지만, 일부 정치인들과 군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일본에 떨어진 순간부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는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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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만약에 오펜하이머가 히로시마 폭탄 투하 전에 대통령이 일본인들은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인지했다면, 그리고 대도시를 대상으로 한 원자 폭탄의 군사적 이용이 8월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면, 그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속았다고 믿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가 정부 관료들이 하는 말이면 뭐든지 의심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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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트루먼 대통령을 앞에서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대통령에게 밉보이는 행동이 되기도 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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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

나중에 누군가 대통령이 손에 피라니, 제길. 그는 내 손에 묻은 피의 절반도 묻히지 않았어. 그걸 아프다고 떠들고 다니다니.”라고 중얼대는 것을 들었다. 그는 나중에 애치슨에게 나는 두 번 다시 저 개자식을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1946 1월까지도 이 일은 그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고, 그는 애치슨에게 오펜하이머를 “5~6개월 전에 내 사무실로 찾아와 손을 비비면서 원자력 에너지를 발견하여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혔다고 말한 울보 과학자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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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펜하이머는 1945 10.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총 책임자 자리를 사임하고 다시 칼텍으로 돌아왔어. 당시 FBI 국장인 후버는 오펜하이머가 공산당원일 거라고 생각하고 다시 감시를 시작했는데 1946년부터 무려 8년간 감시를 했다는구나. 오펜하이머의 사생활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겠구나. 그런 감시와는 별개로 그의 과학적 성과를 인정받아 1947 3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고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이사로도 임명되었어.

그는 연구소장에 있으면서 TS 엘리엇 등 인문학자들과 작가들을 초빙해서 강의를 개설했지만, 다른 연구원들에게는 좋은 반응으로 보이지는 않았대. 당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는 엄청난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었어. 아인슈타인, 보이, 디랙, 파울리, 괴델, 폰 노이만 등이 있었어.

당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냉전시대에 돌입했어. 그러다 보니 정치권에서도 냉전시대의 안 좋은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어. 1949년 정치권에서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도 그런 것 중에 하나였단다. 공산주의자 지인들이 많은 오펜하이머도 조사를 받았어. 첫 번째 청문회에서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간 줄 알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내뱉은 이름들이 큰 영향을 받았어. 동료들과 제자들이 대학에서 쫓겨나기도 했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고 담당자를 찾아가 잘못 이야기했다고 했지만, 그들은 오펜하이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동생인 프랭크와 프랭트의 아내 재키도 공산주의자 이력이 있어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 후 프랭크도 대학에서 쫓겨나고 농장 일을 시작했다는구나. 한편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는 여전히 일상 생활을 힘들어했어. 술에 취해 있는 시간이 많았고 우울증을 달고 살았어. 오펜하이머와 키티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래 행복한 생활은 아니었어.

1949 8월 소련이 원자폭탄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오펜하이머가 경고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거야. 미국은 소련의 원자폭탄에 대항하기 위해 그보다 성능이 좋은 슈퍼폭탄을 개발하자고 했어. 자문위원회였던 오펜하이머는 강하게 반대의견을 피력했단다. 하지만 트루먼 정부는 적극적인 슈퍼폭탄 개발 의지를 보였어. 오펜하이머는 반대파로부터 과거 좌익 이력이 있다면서 다시 공격을 받았어. 그 중에 원자력에너지 위원장을 맡고 있던 스트라우스가 선봉에 섰단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의 뒷조사를 철저하게 했고, 그에게 비밀취급인가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1950년대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이라는 것이 있었단다. 공산주의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열풍을 이야기하는데, 미국 상원의원 매카시가 처음 공산주의자가 숨어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서 시작했는데 근거도 없이 리스트에 오르는 등 피해를 입었다고 했단다. 어쩌면 오펜하이머도 그런 매카시즘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었어. 이미 그 전에 청문회나 맨하튼 프로젝트 책임자를 맡을 때 조사를 이상 혐의점 없다고 했는데 다시 조사하고 청문회를 열게 되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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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

1953년 가을에 워싱턴은 마녀사냥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사소한 혐의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매카시 상원 의원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195311 24일에 매카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애처로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다음날 잭슨은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에게 자신은 매카시가 대통령에게 전쟁을 선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스턴은 이 말을 익명의 백악관 관계자의 이야기라며 자신의 칼럼에 인용했다. 한 아이젠하워 보좌관은 기사를 읽고서 잭슨의 발언은 매카시와 그의 동지들이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라며 비난했다. 잭슨은 매카시의 공격에 아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지도력의 부재에 대해 걱정하던 느낌들이 이번 주에 기어코 현실화되고 말았다. 나는 두렵다라고 썼다. 그는 대통령 수석 보좌관 셔먼 애덤스에게 자신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최소한 매카시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 보좌관들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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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서 재판을 받았어. 그의 사적인 것까지 다 까발려져 공개되었단다.  그렇게 되자 여론은 오펜하이머가 갈릴레이처럼 박해 받는 과학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대. 또는 드레퓌스 사건에 비유하기도 했어. 그만큼 그의 청문회는 납득이 가지 않는 청문회였던 거야. 결국 그는 비밀취급인가 자격을 취소당했는데, 그것보다 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싶구나. 1960년대 들어서 케네디 정부가 들어서면서 오펜하이머는 일부 복권이 되었고, 그의 성과들을 다시 인정받아 페르미 상을 수상하기도 했어. 오펜하이머의 영원한 정적 스트라우스는 이에 격분하기도 했대.

오펜하이머는 1965년 후두암에 걸렸는데 40년 동안 이어진 줄담배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치료를 시작하여 후두암은 완치가 되었지만, 다른 곳에 전이가 되어서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단다. 1967 2 18일 오전 10 40분 오펜하이머는 마지막 숨을 쉬었단다. 그리고 1972년에는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가 죽었고, 1977년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딸 토니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대. 아빠가 생각하기에 딸 토니의 자살에는 엄마 키티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렸을 때부터 딸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우울증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술에 취해 있던 시간이 많았으니

이 책에는 앞부분과 뒷부분에 오펜하이머, 그의 가족들, 그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의 일상 사진들이 담겨 있단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젠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겠구나. 그들이 남긴 업적들은 여전이 오늘날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좋든 나쁘든 영향을 받고 있단다. 누군가는 핵무기가 오히려 전쟁 억제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이도 있단다. 하지만 여전히 핵무기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갖고 있단다. 어떤 또라이 같은 지도자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핵무기를 쓸 수도 있으니 말이야.

….

, 아빠가 메모를 하면서 읽었고, 메모를 바탕으로 독서 편지를 썼어. 메모 중간 건너뛰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독서 편지는 엄청 길어졌구나. 이제 곧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을 하는데 우리들이 좋아하는 로버트 다우트 주니어도 출현한다고 하더구나. 어떤 역으로 출현하나 찾아봤더니, 오펜하이머의 정적인 스트라우스 역으로 나오는구나. 아이언맨의 악역 연기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니 기대가 되는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긴 글 읽느라 고생했다.


PS,

책의 첫 문장: 1967 2 25.

책의 끝 문장: 하지만 그 자리에는 주민 회관이 세워졌고, 그 부근은 오펜하이머 해변이라고 불리고 있다.


뉴욕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러더퍼드가 자신을 불합격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러더퍼드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브리지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내 경력 역시 그의 눈길을 끌지 못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러더퍼드는 오펜하이머의 지원서를 J.J. 톰슨(1856~1940년)에게 넘겼다. 톰슨은 러더퍼드 이전에 캐번디시 연구소의 소장을 맡았던 저명한 물리학자였다. 69세의 톰슨은 전자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19년에 그는 행정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놓았고, 1925년 무렵에는 실험실에 띄엄띄엄 나오며 가뭄에 콩 나듯 학생을 받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이 자신을 받아 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서는 크게 안도했다. 그는 물리학을 직업으로 선택했고, 물리학의 미래와 함께 자신의 미래 역시 유럽에 있다고 확신했다. - P77

오펜하이머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잔인함을 논하는 구절을 외워 슈발리에를 놀라게 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주는 고통에 무관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악함이 그토록 드물고, 비정상적이며, 소외된 상태가 아니고 심지어 그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은 무관심을 지칭하는 단어는 여럿 있지만, 결국은 끔찍하고 영구적인 형태의 잔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코르시카에서 오펜하이머는 이 글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으면서 자신이 남에게 끼치는 고통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 P93

나중에 MIT 총장까지 오르게 될 콤프턴은 당시 오펜하이머의 박학다식함에 기가 눌리는 것 같았다. 그는 과학 분야에서는 오펜하이머의 맞수가 될 수 있었지만, 이 젊은이가 문학, 철학, 심지어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전혀 대응할 수가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괴팅겐에 와 있는 미국인들은 대개 "프린스턴 대학교나 캘리포니아에서 온 기혼자 대학 교수들이야. 그들은 물리학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지만, 교양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한 것 같아. 그들은 독일인들의 섬세하고 잘 조직된 지적 활동을 부러워하고 있고, 그와 같은 물리학을 미국으로 이식하고 싶어 하지."라고 썼다. 이는 확실히 콤프턴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 P105

괴팅겐은 성인이 되어 가던 젊은이로서 오펜하이머가 처음으로 진정한 승리를 거둔 곳이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가 된다는 것이 "터널을 통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터널 반대편이 계속 위쪽으로 이어져 있는지, 아니면 출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양자 혁명의 끝자락에 걸쳐져 있던 젊은 과학자에게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의 대변동에서 참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증인에 가까웠지만, 자신이 물리학을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지적인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짧은 9개월 동안 그는 학문적 성과와 성격의 변화를 이루었고, 그 결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단지 1년 전만 해도 그의 생존까지 위협했던 불안한 감정 상태는 이제 상당한 학문적 업적과 그에 따르는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세상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 P118

요점을 말하자면 오펜하이머는 항상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스스로의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대의에의 헌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매카시 시기의 가장 해로운 특징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편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1930년대에 미국의 사회, 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 P244

오펜하이머는 양자 역학을 책만 읽어서는 배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어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 자체가 이해에 이를 수 있는 첩경이었다. 그는 같은 강의를 두 번 하지 않았다. 와인버그는 "그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청중의 얼굴을 보고 어떤 부분에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파악하고는 즉석에서 설명 방법을 완전히 바꾸기도 했다. 한번은 단 한 명의 학생의 관심을 자극하기 위해 강의 시간 전체를 특정한 문제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그 학생은 오펜하이머에게 달려가 그 문제를 자신이 풀어 봐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오펜하이머는 "좋아, 그것이 내가 오늘 세미나를 한 이유라네."라고 대답했다. - P273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의 무시무시한 비밀을 세계가 알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했다. 이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보어의 논리는 오펜하이머의 동료 과학자들에게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윌슨이 그 순간을 회고했듯이, "내가 당시 오펜하이머에게 느꼈던 것은, 이 사람은 천사처럼 진실하고 솔직해서 잘못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믿었습니다. - P443

몇 분 후, 뜨거운 뉴멕시코의 태양을 받으며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 장군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 위해 일어섰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앞으로 연구소의 작업에 참여했던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는 말했다. "오늘 그 자부심은 깊은 우려와 함께해야 합니다. 원자 폭탄이 무기고의 신무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인류가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의 이름을 저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 - P501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연구소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도 아루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연구소에 대한 그의 강연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과학 자체의 특성과 결과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불과 몇 명만이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노이만은 자신의 분야만큼이나 고대 로마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처럼 시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 연구소를 인간의 삶이 처해 있는 상황들을 총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진 과학자, 사회 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들의 안식처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이는 그가 청년 시절부터 동등하게 관심을 기울여 왔던 과학과 인문학을 화합시킬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 연구소는 로스앨러모스의 정반대이자 심리적 해독제였다. - P571

1953년 무렵이면 냉전은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선택지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핵의 지니 요정을 호리병 속에 가두려 했던 오펜하이머의 노력은 미국 내부에서의 정치적 기류로 인해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제 공화당 출신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 정치 기류는 오펜하이머를 병에 가둬 바닷속으로 던져버리려 했다. - P684

그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두 강대국들이 상대방은 물론이고 인류 문명 전체를 끝장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자국의 파멸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오펜하이머는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과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라고 덧붙여 청중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 P701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폴드 홀 사무실로 걸어가면서 오펜하이머가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조교에게 "저기 나르(nar, 바보)가 간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물론 미국이 나치스 독일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펜하이머가 도망쳐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매카시즘에 크게 놀랐다. 1951년 초에 그는 자신의 친구인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곳 미국에서 "수년 전 독일에서의 재앙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의 세력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묵종하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정부의 보안 위원회에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굴욕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유해한 과정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 P746

개리슨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본 청문회에서는 오펜하이머 박사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합중국 정부 역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개리슨은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걱정"에 대해 말하며 은근히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에 창궐했던 반공 히스테리로 인해 미국의 국가 안보 기구들은 이제 "공산주의라는 단일한 세력이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민들을 먹어 치워서는 안 됩니다." 개리슨은 그레이 위원회가 "사람 전체를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최종 변론을 마쳤다. - P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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