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1권 - 개화기편,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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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역사 관련 책을 좋아하잖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그 옛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참 재미있더구나. 그리고 몰랐던 역사 상식 하나씩 알게 되는 것도 좋고 말이야. 비록 얼마 못 가 까먹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말이야. 이런 역사책을 학창시절에는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모르겠구나. 국사, 세계사라는 과목들이 아빠가 싫어했던 과목들이거든. 그런데 요즘에는 무척 좋아하게 되었단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여러 권으로 된 시리즈도 즐겨 있는데, 이번에 읽은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시리즈>도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던 시리즈란다. 강준만 님의 <한국 현대사 시리즈>도 있는데, 그건 분량이 너무 많아서 엄두가 안 나고, <한국 근대사 시리즈> 10권으로 한번 도전할 만하다 생각했어. 너희들에게 해줄 역사 이야기꺼리도 생기고 말이야. 강준만 님은 교수이자 비평가로도 많이 활동을 하는 분이란다. 예전에는 아빠랑 정치적 노선이 맞아서 그의 책들도 여럿 가서 보긴 했는데, 언젠가부터 다른 길을 가시는 것 같더구나.

그래도 <한국 근대사 시리즈>는 역사물이니 괜찮겠다 싶었어. 아빠도 근대사를 한번 쭉 정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되고 말이야. 그런데 이 책은 구성이 좀 독특하구나.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여러 역사가들이나 비평가들이 쓴 내용들을 발췌를 해서 정리를 해주는 식이란다. 지은이의 생각도 들어있지만, 다른 역사가들과 비평가들의 글들이 더 많이 실려 있는 것 같았어, 그런데 아빠가 모르는 비평가들이 많은데, 그 비평가들이 옳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더구나. 심지어 아빠가 싫어하는 신문의 내용도 실었는데, 아빠가 보기에는 편중된 시각으로 적힌 것 같은데, 지은이께서는 아무런 평을 하지 않더구나.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방법은 아빠에게는 별로였단다. 아빠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 근대사를 한번 쭉 훑어보는 기회로만 삼아야겠구나.


1.

언제부터 우리나라 근대를 봐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단다. 그 시기는 개화를 통해 외부 문화와 충돌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정의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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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개화기는 새로운 외부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한 시대였다. 그 충돌은 개화기 이전부터 일어났으니 그건 바로 천주교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 대응은 박해로 나타났다.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는 당파싸움으로 인해 증폭되었다. 이는 개화기가 결국 망국(亡國)으로 종결된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의 자폐적 시스템과 더불어 내부갈등이 나라의 진로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였다는 사실을 폭로해주기 때문이다. 개화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천주교 문제를 살펴보고 넘어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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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도 본 것처럼 개화기에 천주교 문제는 빼놓을 수 없단다. 18~19세기 천주교가 탄압을 했는데, 천주교가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했다면 이런 일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한단다. 천주교에서 우상 숭배를 하지 못하게 하는데, 우리나라의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것이야. 우상숭배를 너무 폭넓게 본 것인데 그것은 천주교의 실수였단다. 우리나라에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했으니 당시 법이나 마찬가지였던 관혼상제를 거역하는 일이었어. 그래서 천주교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게 된 거야한참 나중에 교황에 의해 동양의 조상 숭배는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규정을 해서 오늘날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제사도 지내고 그런단다.

아무튼 천주교는 17세기에 우리나라에 전파되었고, 1785년 사교로 규정지었다고 하는구나. 정조 시절에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으나, 정조가 죽고 나서 반대파가 정권을 잡고 나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어. 정조의 지지기반이었던 남인들이 천주교를 많이 믿었는데, 반대파 노론이 정권을 잡으면서 천주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목적에 사용했단다. 1810년 신유박해는 많은 천주교도가 죽었고, 남인들이 몰락하게 되었단다.  이때 아빠가 좋아하는 정약용도 유배를 가게 되었지.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매관매직이 널러 퍼지게 되었단다. 대표적인 매관매직은 공명첩이 있었는데, 돈을 주고 관리직을 사는 것이었어. 능력도 필요 없고 시험도 필요 없고 돈만 있으면 관직을 가질 수 있었지. 이러니 백성들은 점점 살기 어려워졌고, 실패했지만 홍경래의 난까지 일어나게 되었단다. 헌정 때도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등이 일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알려진 김대건을 비롯하여 많은 천주교도들이 순교했단다.


2.

1850년이 넘어서는 이양선, 즉 서양배들이 우리나라 앞바다에 출몰이 잦았단다. 세계적으로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시절이라 동양의 끝까지 빼앗을 땅이 없나 기웃하던 배가 아닌가 싶구나. 이 때는 이미 여러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서양 열강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단다. 중국 베이징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몰락한 상태이고, 일본은 서양 열강을 따라 하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단다. 그런데 조선은 출처 없는 낙관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단다. 그렇다고 나라 기반이 제대로 되었냐? 그것도 아니야. 전정, 군정, 환정 등 삼정이 문란하여 백성의 여론은 땅에 떨어졌고, 어려울 때 빌려준다는 환곡의 이자가 치솟아 백성들은 더욱 어려워졌단다. 그래서 이 시절 민란이 많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했단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절에 흥선대원군의 계략에 의해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올랐어. 고종 대신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나라의 정책도 그에 의해 다 결정되었어. 비변사를 개혁하고 서원을 철폐하고, 호포법을 실시하여 양반들도 군포세를 납부하게 하는 듯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정책들을 개편하여 민심을 얻기도 했어. , 나름 정치개혁을 하려고 노력했구나. 하지만 여전히 백성들의 삶은 고달펐단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의 호의적이었대. 쇄국정책을 일관한 사람으로 알고만 있었는데, 약간 의외구나. 오히려 유학자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어. 그들의 거센 반발을 눈치 볼 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천주교를 탄압하기도 했대.(병인 박해)

1860 4 5일 최제우가 서학에 대항할 학문으로 동학을 창시했단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 즉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여 속였다고 해서 체포를 했단다. 많은 백성들의 항의로 금방 풀려났지만, 얼마 후 다시 체포되었고, 1864년 참수형으로 삶을 마감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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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들어왔다가 그 선원들이 우리나라 백성들을 난폭하게 대했고 해적질을 하는 등 난동을 부렸단다. 그래서 박지원 손자인 박규수의 지휘아래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켰단다. 물론 그곳에 타고 있던 선원들도 죽었지. 이 일이 나중에 미국에게 신미년에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빌미를 주게 된단다.

같은 해, 프랑스는 프랑스인 출신 신부의 죽음을 규명을 요구하기 위해 군함을 몰고 한강 따라 한강까지 왔었다고 하는구나. 서울에서 큰 진전을 보이지 않자 일단 후퇴했는데 강화도에서 이를 대비하고 있는 조선군과 격전을 벌였어. 그리고 이때 프랑스군이 이때 철수하면서 외규장각 서적, 직지심경 등 우리나라의 귀중한 보물들을 포함한 많은 책과 유물들을 약탈해갔단다. 그렇게 약탈해간 것인데 오늘날까지 돌려줄 생각을 없다니, 선진국의 양심들은 어디다 팔아먹었는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고 5년이 지난 1871,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를 찾겠다고 왔다가 조선의 거센 항의에 전투를 벌이게 되었단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신미양요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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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열강 뿐만 아니라 일본도 호시탐탐 노렸단다. 일본은 이미 제국주의에 대한 학습이 되어 있었고, 주변국 중에 가장 만만해 보이는 조선을 간섭하기 시작했단다. 일본 운양호 사건을 조작하여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단다. 이때 적극적으로 일본인 입장에서 도와준 김인승이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러니까 이완용 이전에 김인승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그를 친일파 1호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단다.


3.

최한기라는 사람은 이름만 들어본 사람인데 그는 우리나라 개화와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많은 글을 쓰신 분이란다. 이름은 들어봤는데 그가 어떤 분이었는지 잘 몰랐는데, 조선말 진보 지식인이었고, 많은 책들을 쓰셨구나. 나중에 시간 되면 그에 관한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예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최한기에 대해 쓴 책이 있는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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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89)

금장태는 최한기는 조선 후기 실학파의 마지막 인물이자 근대 개화사상으로 한걸음 나아갔던, 그 기대의 가장 앞선 진보적 지성인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저술은 1000권이나 된다는데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직 100여 권뿐이다. 그의 탁월한 학문의 폭넓은 식견이 알려지자 당시의 여러 재상들은 그를 조정에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는 상황에서 벼슬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신미양요로 강화도가 미국 함대에 침략당하자 친분이 있던 유수의 자문요청에 조언한 바 있다. …… 자신의 시대를 새로운 것으로 낡은 것을 바꾸는변혁의 시대로 규정한 그는 차라리 옛것을 버릴지언정 지금을 버릴 수는 없다하여 진보정신을 표방하고 과학과 문명이 더욱 발전하고 역사가 발전해나간다는 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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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우리 사회를 바꾸자고 주장하는 개화파들은 대부분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단다. 특히 서양제도와 사상까지 모두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급진개화파들이 그랬단다. 급진개화파들은 일본에 유학을 가면서 일본 메이지유신 계몽운동을 앞장선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고 와서 우리나라도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야 하자고 주장했단다. 참고로 급진개화파와 달리 우리 사상과 도덕은 그대로 두고 서양 기술만 받아들이자고 하는 온건개화파도 있었단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정부도 개화 정책을 추진했어. 민영익을 중심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는데, 1881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서 청나라에는 영선사, 일본에는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단다. 그리고 서양의 나라와는 처음으로 미국과 1882년에 수호조약을 맺었단다. 역사책에서는 조미수호조약이라고 한단다. 그런데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약인데, 이걸 주도한 사람은 청나라의 이홍장이라는 사람과 미국의 슈펠트였단다. 이렇듯 이 시절 청나라의 간섭이 심했단다. 나라의 자존심이 서질 않던 시절이구나. 조선은 참석하지 않고 조미수호조약을 승인만 했다고 하는구나.

나라 사정이 어려워지다 보니 구식 군대에서 봉급을 일 년 넘게 미지급하게 되었는데, 참다 못한 구식 군대가 난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바로 임오군란이었단다. (1882) 임오군란을 일으킨 지도부는 흥선대원군과 면담을 했는데, 한직에 물러나 있던 흥선대원군이 이들을 뒤에서 조정한 것으로 보인단다. 난을 일으킨 군인들은 궁궐을 습격하고, 이때 민비(명성황후)는 도망을 간단다. 얼마 전에 펄 벅 여사의 <살아있는 갈대>에서도 명성황후가 궁궐 습격에 충주까지 도망을 가는 장면이 있었잖아. 그것이 바로 임오군란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장면이란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흥선대원군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흥선대원군은 입궁하여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단다.

흥선대원군이 입궁을 하게 되자 난은 잠잠해졌어. 역시 흥선대원군이 뒤에서 조정한 것이 맞는 것 같구나. 흥선대원군은 입궁하자마자 정적이었던 민비의 국상을 준비했단다. 민비가 도망갔는데 죽은 걸로 치고 장례식을 치르려 했던 것이란다. 하지만, 이때 청나라가 개입하게 된단다. 아무래도 민비 쪽에서 움직인 것 같구나. 청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임오군란의 책임을 묻고,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했단다. 한 나라의 왕의 아버지를 다른 나라 군대가 침입해 끌고 가다니흥선대원군이 잘못한 것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안에서 해결을 해야지다른 나라에서 끌고 간다는 것이 말이 되니? 국력이 약한 당시 우리나라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단다. 재집권한 지 33일만의 일이었어. 그렇게 끌려간 흥선대원군은 4년이나 유폐되었다가 풀려난다고 하는구나. 민비는 궁에서 도망간 지 51일만에 다시 궁으로 돌아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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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국과 수호를 맺은 다음 조선 정부는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한단다. 이것도 펄 벅 여사의 <살아있는 갈대>에서 이야기했었는데 기억나니? 1883년 민영익, 유길준, 홍영식, 서광범 등은 미국 견학을 떠나게 된단다. 민영익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들렀다고 오고,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서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했단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지. 그는 미국의 신문에까지 실렸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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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한편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의 미국 생활은 어떠했는가?

미국 <뉴욕타임스> 1883 11 8일자는 사절 수행원의 한 사람인 유길준은 자기나라의 옷을 벗고 지금은 서양 옷을 입고 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에드워드 모스(1838~1925) 교수 지도하에 학생으로 이 나라에 머물 것이다. 어제 저녁 이 젊은이는 5번가(뉴욕)에 산책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그러나 몇 마디의 영어를 사용하여 경찰관에게 호텔 가는 길을 물어 찾아왔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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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들 중 박영효, 유길준이 주축이 되어 1883년 한성순보를 창간하게 되는데, 국내 소식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소식도 많이 알려주었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학창시절 때 한성순보가 최초의 근대적 신문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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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은 이후 다른 서양의 나라들과도 조약을 맺게 되었어. 영국과 맺은 조영수호조약, 러시아와 맺은 조러수호조약 등. 그런데 조영수호조약의 내용에 영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조영신조약이라고 다시 맺었는데, 영국 제품에 낮은 관세를 보장하는 등 우리나라에 엄청난 불평등 조약이라고 하는구나. 이런 국제 관계에 대한 경험이 없던 우리나라는 이때 맺은 조약들이 대부분 우리에게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을 거야.

마지막으로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김옥균은 급진개화파잖아. 그는 조선의 시스템을 서양의 제도로 싹 바꾸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고종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어. 고종도 김옥균의 주장을 지지했어. 고종도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서 개화사상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했거든. 이미 왕의 허락도 받았겠다, 이 정변의 성공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1884 12 4. 우정총국 완공 축하연회에서 척화수구파들을 비롯하여 대신들을 십여 명 죽이고 개화파가 정권을 잡았단다. 이 일을 성사시킨 사람들은 젊은 급진개화파인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 등이었단다. 그들은 새로운 내각을 구성을 했어. 갑신정변에 의해 구성된 내각은 대부분이 20대와 30대로 이루어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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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갑신정변의 내각은 청춘정권이었다. 내각 서른두 명의 연령을 보면 20대와 30대가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다. 김옥균 서른세 살, 홍영식 스물아홉 살, 서광범 스물다섯 살, 박영효 스물세 살, 서재필 스무 살 등 주동자들은 더 젊었다. 혈기가 지혜를 앞섰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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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여서인지 고종은 그들에 반감을 갖게 되었단다. 고종의 이런 낌새와 함께 다시 청나라의 간섭으로 청나라 군대가 궁을 침략했단다. 김옥균은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어. 하지만 고종은 끝내 그들을 배신하고 버렸단다. 이제 김옥균 등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3일의 권력을 내려놓고 도망을 가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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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너희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군주는 그렇게 개화를 버렸다. 김옥균은 군주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는다. 이제 곧 천하대역죄인이 될, 그의 부모와 아내와 아이들은 몰살을 당하게 될, 그리고 자신은 10여 년의 망명객이 될 것이며 망명지 일본에서도 버림받은 후 결국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 정부가 보낸 암살자에게 목숨을 잃을, 그러나 군주를 사랑하였고 조선의 강대한 힘을 꿈꾸었던 김옥균은 이렇게 군주와 마지막 작별을 했다.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이 김옥균과 함께 후퇴하는 일본군을 쫓아갔다. 군주의 곁에는 이제, 청군과 군중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홍영식, 박영교만 남았다. 실패한 혁명 뒤에 남은 것은 군중의 분노뿐이다. 거리는 살육으로 뒤덮인다. 일본인과 개화파들, 그들의 가족은 보이는 대로 습격을 당한다. 김옥균의 집과 일본공사관은 성난 군중의 손으로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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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일본군대까지 끌어들여 반대를 무차별하게 죽이면서 정권을 잡는 방식이 민심에도 부합하지 않았단다. 그러니까 정변에 대한 지지가 적었고, 그렇다 보니 명분도 줄어들었던 것 같구나. 결국 청나라 군대도 쉽게 간섭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구나.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신용하라는 분의 말을 인용하여 정리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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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이어 신용하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실패 요인은 일본군 무력을 차용한 요인이라며 갑신정변은 아무리 필요하고 애국적인 목적을 갖고 있어도 그 수단에 있어서 침략의도를 가진 일본의 힘을 일부 빌려서 수행하려 해서는 실패하고 만다는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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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한국 근대사 산책> 1권을 이야기해보았단다. 이 시리즈는 이미 10권까지 다 사 놓았기 때문에 끝을 봐야 한단다. 한 달에 두어 권씩 읽으면서 올해 안에 끝내는 것으로 목표를 삼아 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개화기는 새로운 외부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한 시대이다.

책의 끝 문장: 이는 김옥균 암살사건을 다루면서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블라디보스토크’의 블라디는 러시아어로 ‘정복하다’는 뜻이고 보스토크는 ‘동쪽’의 의미인바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가 동쪽으로 와서 정복한 도시인 셈이다. 이전 이 땅은 발해의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고 이후로는 여진과 거란의 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땅을 한자로 해삼위(海蔘威)라고 표기했는데 바닷가에 ‘해삼’이 많아서 해삼위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바다도 4~5개월간 결빙하기 때문에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 P72

역설이지만 서학은 물론 동학에 대한 이러한 탄압은 조선 조정이 자신들의 죄, 즉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걸 시사하는 건 아닐까? 민생을 도탄에서 건져낼 수 없는 무능이, 언제든 민심을 폭발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 제거에만 총력을 기울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게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망국(亡國)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 P90

다블뤼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자선(慈善)의 원조 국가가 조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이 나라에서는 자선 행위를 진정으로 존숭하고 실천한다. 사랑방에서 받는 대접 이외에도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면 거절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일부로 그를 위해 밥을 다시 하기도 한다.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식사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즐거이 자기 밥을 나누어준다. 뱃사공들은 밥을 먹지 않고 배 타러 나온 사람과 나누어 먹는 것을 철칙으로 한다. 잔치가 벌어지면 언제나 이웃 사람들을 초대해서 형제처럼 모든 것을 나눈다. 여비가 없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엽전 몇 닢의 도움을 받는다. 없는 사람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조선인이 가진 덕성 중의 하나이다."
먼 훗날에라도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 P99

조선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서양 문물을 수입하게 되었다. 1876년 부산이 개항하고 이어 1879년 원산, 1880년 인천이 개항했다. 학계에선 근대화가 되는 시대를 의미하는 ‘근대’가 언제부터인가 하는 논쟁이 있는데 학계의 통설적 견해는 아무런 준비 없이 강요된 것이긴 하지만 개항을 통해 새로운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한 1876년을 근대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 P161

<한성순보>는 신문발간의 동기와 기술적 지원은 일본에 의존했지만 신문의 뉴스원, 내용과 관련해선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이 신문이 기사로 가장 많이 다루었던 국가는 중국(453회)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베트남(165ㅎ회), 프랑스(71회), 영국(56회), 일본(53회), 미국(47회) 등이었다. 중국 관련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이유는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밀접했다는 것 이외에 영국,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선교사나 상인 등이 발간하던 중국계 신문들을 주요 뉴스원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성순보>의 실무자들은 "거의가 한학자와 중국어 역관(譯官) 출신들로서 한문에는 능통한 반면 일본어는 몰랐다는 점과 이들이 "일본보다는 중국을 더 숭상"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베트남, 프랑스 관련 기사가 많았던 건 1884년 6월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1883) 문제로 일어난 청불전쟁과 베트남이 프랑스에 먹히는 비극에 대한 동병상련(同病相憐) 감정 때문이었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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