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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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스타그램에서 가끔씩 신간으로 나온 책 광고가 보인단다. 어느 날 책 광고 카피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단다. 멘트가 후덜덜.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내 인생은 악몽이 됐다.”

라는 광고 카피였단다.

이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말을 대문짝 만하게 써 놓다니용감한 출판사에 박수를 보내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책인가 싶어 광고의 다음 게시물들을 넘겨 보았단다. 소설이더구나. , 지은이가 필립 로스. 필립 로스의 소설들을 서너 권 읽었는데, 모두 괜찮아서 두어 권 사서 재어두고 있었는데신간이 나왔구나. 아주 절묘한 시기에 절묘한 광고 카피를 달고 말이야. 이런 책은 안 살 수가 없지. 바로 사서 읽었단다. 이 책의 리뷰 중에 필립 로스의 책들 중에 가독성이 가장 좋았다는 평이 있었는데 그 평대로 책장이 휙휙 넘어가고, 재미 또한 좋았단다.

지나간 역사의 어떤 일이 다르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으로 쓴 소설을 대체 역사 소설이라고 한단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이 승전국이 독일이었다면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이런 걸 가정하고 소설을 쓰는 것이야. 이번에 읽은 필립 로스의 <미국을 노린 음모>도 그런 대체 역사 소설이란다. 어떤 역사적 사실을 가정했냐면…. 1940년 미국 대통령이 루즈벨즈가 아니고, 반유대주의자였던 찰스 린드버그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미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계2차 대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이 소설에서 반유대주의자로 대통령이 된 찰스 린드버그라는 사람은 실존 인물이었단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한 사람으로 미국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인 것 같구나. 그가 살았던 시절에도 인기가 있었고, 2차세계대전에 참가에 반대하면서 반유대주의 발언도 했었다고 하는구나. 전쟁 전이긴 하지만 독일에 방문하여 히틀러부터 독일 훈장을 받기도 했다는구나. 그가 후에 대통령 후보 추천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지은이 필립 로스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가 그때 실제로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으로 소설을 쓴 것이란다.


1.

주인공은 지은이와 이름이 똑 같은 필립 로스였단다. 당시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유대인이었던 자신의 가족들이 어떤 생활을 했을까, 상상을 하면서 소설을 쓴 것 같아.

때는 1940. 필립은 7살이었고, 형 샌디는 12살이었고,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어. 아버지는 진급을 해서 다른 마을로 이사 갈 기회가 있었으나, 이사 갈 마을은 유대인들이 적다고 진급을 포기할 정도로 유대인들과 함께 지내려고 하셨단다.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사촌형 앨빈도 함께 지내고 있었단다.

당시 미국에서는 찰스 린드버그라는 사람의 인기가 엄청 좋았어. 비행기를 타고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사람인데다가 첫 아이가 유괴 당한 후 죽어서 그에 대한 동정심도 있었단다. 아이의 유괴 사건 이후 미국을 떠나 영국에서 살다가 독일에도 방문하였고, 총통과 친해지면서 독일로부터 여러 훈장들을 받았단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는데, 그런 그가 미국에 와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인기에 힘입어 최종 후보가 되었단다.

그가 인기를 얻을 수 있던 것은 미국은 세계대전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공약 때문이었어. 왜 우리 젊은이들이 유럽의 전쟁에 참가해서 죽어야 하는가? 라는 거지. 전쟁은 모든 이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공약이 잘 먹혀 들어갔지. 우리만 괜찮으면 된다는 위험한 생각인데, 그것이 죽음과 관련이 있다 보니 잘 먹힌 거지. 그런데 그가 친나치에 반유대주의자란 것이 널리 알려져서 공화당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단다.

필립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유대인들은 루즈벨트가 당선될 것을 믿으면서도, 혹시나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어쩌나, 하는 걱정들을 했단다. 그런데 벨겔 스도르프라는 유명한 랍비가 린드버그를 지지한다고 했어. 랍비가 린드버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내용 때문이야. 린드버그가 반유대주의자인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어. 린드버그는 미국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미국 고립주의로 지지도가 급상승했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단다.


2.

이에 유대인들은 몸을 사리거나 격렬히 비판했단다. 앨빈 형은 유대인의 후원으로 무료로 대학에 다닐 수 있었으나,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캐나다로 건너가 세계대전에 참가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를 했단다. 아버지가 이 일이 있기 전 앨빈 형을 말렸는데, 심한 말다툼 끝에 앨빈 형은 끝내 캐나다에 갔단다.

린드버그는 취임 후 히틀러를 만나 평화 협약을 했고, 추축국 중 하나였던 일본과도 협약을 맺었단다. 이 협약들에는 미국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누가 봐도 미국은 추축국 편을 드는 모양이었단다.

필립의 식구들은 린드버그가 당선이 되기 전부터 워싱턴 DC를 여행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이 여행을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갔단다. 테일러 씨라는 가이드가 안내를 해주었는데, 워싱턴이 아무래도 미국의 정치적 수도이다 보니, 필립의 아버지는 대통령을 비판하는 정치적 발언을 했단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조마조마해 하셨어. 그런데 호텔 체크인부터 문제가 생겼어. 호텔에서 실수로 이중으로 예약을 받게 되어서 돈을 환불해주면서 호텔에 묵을 수 없다고 하는 거야. 어떻게 해서든지 빈 방을 마련해주는 것이 상식인데, 돈만 툭 던져주고 만 것이란다. 아버지는 이것이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했어. 경찰을 불러 따지려고 했으나, 경찰도 이야기를 들어보고 문제 없다면서 호텔 편을 들어주었단다.

가이드였던 테일러 씨가 다른 호텔을 알아봐주어 다행히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단다. 식당에서 가서는 유대인을 욕하는 반유대주의자들과 시비가 붙기도 했어. 아버지는 미국인인 자신이 왜 미국에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냐면서 큰 소리를 치셨지. 여행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단다.

….

필립에서는 이모 이블린이 있었어. 그런데 그 이모가 린드버그를 지지했던 스도르프 랍비의 비서로 일했어. 아버지는 그런 이모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단다. 어떻게 린드버그를 위해서 일할 수 있냐면서 말이야. 유대인 청소년들을 위한 소박한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는데, 이모는 그 프로젝트를 샌디 형에게 추천했어. 아버지가 반대를 했지만, 샌디 형은 가고 싶다면서 우겨서 8주간이나 남부에 있는 농장에서 체험을 하고 왔단다.

이 프로젝트를 다녀온 이후 샌디는 농장에 대한 동경심이 커졌고, 샌디가 다녀온 남부 지역이 공화당지지를 해서 그 영향을 샌디도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었어. 아버지와 정치적 노선과 달라 충돌하기도 했어. 샌디는 그 이후 이모 이블린과 스도르프 랍비가 일하는 동화청이라는 곳에서 일하기도 했어. 소박한 사람들이라는 프로젝트가 유대인 청소년들을 공화당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인 것 같았어.


3.

한편 앨빈 형은 전쟁에 참가했다가 왼쪽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단다. 그런데 전쟁과 부상에 대한 심한 후유증을 겪게 되었어. 처음에는 거의 폐인 생활을 했는데 조금씩 재활에 힘쓰려고 했단다. 필립도 앨빈 형과 함께 지내면서 도와주었어. 하지만 이내 노름에 빠지며 일상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어.

친척 중에 몬티 삼촌이 있는데, 앨빈 형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하자, 삼촌의 말 따라 일을 하려고 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단다. 이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어. 그렇게 잠깐의 노력이 좌절되자, 앨빈 형은 집을 떠나서 셔시라는 친구의 삼촌이 운영하는 도박장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나라 안에서는 한 동안 조용히 있던 루즈벨트 전 대통령이 반 린드버그 세력을 집결시키면서 시위와 집회를 했단다. 필립의 집안은 정치색이 두 개로 나뉘어졌단다. 필립과 아버지, 어머니는 루즈벨트를 지지하고, 이블린 이모와 샌디 형은 린드버그를 지지했어. 이블린 이모는 스토르프 랍비와 함께 백악관에 열리는 연회에 초대받기도 했는데, 독일에서 온 히틀러의 측근도 참석했단다. 유대인들을 그렇게 학대하는 히틀러의 측근과 함께 연회를 하다니이게 말이나 될 소리냐며, 아버지는 이블린 이모와 심한 말싸움을 했고, 이모를 집에서 쫓아냈단다.

린드버그 정부는 홈스테드 42’라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유대인 가족들을 특정 지역에 이주시키는 정책이었단다. 이제는 대놓다 유대인들을 차별하려는 것이었어. 필립의 엄마 베스는 캐나다로 가자고 했으나, 아버지는 이곳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했어.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이 나라에서 쫓겨나야 하냐고 말이야. 린드버그를 비판하던 유대인 방송인 윌터 윈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그는 방송국에서 퇴출되었단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다음 대선에서 출마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이어지자, 윌터 윈첼은 자신이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단다. 그러면서 지역을 돌면서 유세를 했는데, 반유대주의자들의 테러에 의해서 그만 피살되고 말았단다. 나라는 점점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지. 반유대주의자들의 선동이 이어졌는데, 이를 제대로 제지하지도 않았어.


4.

그런데 뜻밖에 일이 벌어졌어. 1942 6월 어느날 린드버그는 자가비행기를 타고(그는 전직 비행사답게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단다.) 워싱턴을 가던 도중 사라졌어. (전직 비행사인 그에게 이런 일은 아주아주 드문 일이지.) 대통령의 실종. 이동 경로를 며칠 동안 수색했지만, 비행기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어. 독일은 영국군이 린드버그를 납치해 갔다고 주장했어. 영국은 독일이 린드버그를 데리고 가서 자작극을 벌이고 있다고 했어. 린드버그가 사라지고 부통령인 휠러가 대통령 대행 임무를 하고, 나라는 계엄령이 내려졌는데, 혼란은 더해갔단다. KKK를 중심으로 한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유대인들이 백여 명이나 죽고 말았단다.

이 시기 필립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힘든 시기를 보냈단다. 필립의 친구 셀덴의 엄마가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죽음을 당했어. 엄마와 둔 둘이 살던 셀덴은 혼자 있게 되었는데, 셀덴이 살고 있는 곳까지 멀리 떨어져 있었어. 아버지는 샌디형과 함께 셀덴을 데리러 폭동과 혼란의 한 가운데를 질러 갔단다.

….

휠러의 대통령 대행은 일주일 남짓하고 의외에 사건으로 끝이 나고 말았단다. 린드버그의 아내, 그러니까 영부인이 휠러의 반국가적 불법에 대해 폭로를 했어. 영부인은 국회에 민주주의를 다시 수립해 달라고 요청을 했어. 휠러는 탄핵이 되었고, 대통령 재선거가 진행되었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다시 당선이 되었단다. 그렇게 다시 나라를 제자리에 돌려 놓았지. 루즈벨트 대통령은 연합국을 지지했겠지. 그가 당선된 지 한 달 만에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했고, 미국은 세계대전에 참전을 했단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1945년 종전을 얼마 앞두고 죽고 말았단다. 이 부분은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가지고 왔구나. 실제로 루즈벨트 대통령은 종전을 얼마 앞둔 1945 4월에 죽었거든.

….

그런데 나중에 이블린 이모가 숨겨진 진실을 이야기해주는데 놀라움 그 자체였단다.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된 것이 모두 히틀러의 작전이었다는 거야. 린드버그의 아이를 유괴한 것은 독일이었고,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다른 아이였고, 실제 린드버그의 아이는 독일로 유괴해 갔으며, 린드버그 부부가 독일에 왔을 때 아이를 보여주었다고 했어. 그리고 아이를 인질로 린드버그로 하여금 미국에 친독정부를 만들게 한 거야.

집권 중에 린드버그는 다시 독일에 가서 아이를 만났는데, 아이는 부모도 알아보지 못하고 독일 소년군 수업을 받고 있었어. 완전히 독일 사람이 다 된 거지. 이에 린드버그 부부는 그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독일에서 시키는 것에 대해 조금씩 따르지 않기 시작했다는구나. 그리고 그 와중에 린드버그가 실종된 것이라고 했어. 그렇다면 린드버그의 실종도 독일의 짓이라는 것인데….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났단다. 지은이의 상상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 책이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것이 2004년이었어. 필립 로스가 1933년생이니까, 일흔 넘어서 쓴 소설인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창의력 넘치는 소설인 것 같구나. 이제부터 <미국을 노린 음모>를 아빠가 읽은 필립 로스의 소설들 중에 가장 좋았던 소설로 손꼽아야겠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불편함이 하나 있었어. 만약 아빠가 그 시절 미국에 살고 있었고, 전쟁에 나갈 나이가 되었거나 그런 자식들이 있었다고 했을 때, 친나치이긴 하지만 린드버그처럼 절대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가지고 대선에 나왔다면 그를 뽑지 않을 도덕성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맴돌았어. 루즈벨트가 하는 일이 정의롭다고 하지만, 내가 또는 내 자식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을 지도 모르는데, 그를 지지할 수 있었을까.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 되었을 것 같구나.

그런데 친나치주의자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약을 해도, 그걸 끝까지 지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오히려 추축국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구나. 선거를 할 때, 후보자가 나중에 자신의 공약을 지킬 수 있는지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단다. 그걸 우리나라 국민들이 못해서 고생을 하고 있구나. 줄거리를 주절주절 쓰다 보니 독서 편지가 길어졌는데 그만해야겠다. 안녕.


PS,

책의 첫 문장: 이 기억엔 두려움이 잔뜩 스며 있다.

책의 끝 문장: 그애 자체가 토막난 다리였고, 그애가 결혼한 이모와 함께 살기 위해 열 달 후 브루클린으로 떠날 때까지 나는 그애의 의족이었다.


윈첼은 리벤트로프를 신사인 척하는 사기꾼이라 불러. 그가 전쟁 전에 뭘 했는지 아니? 샴페인을 팔았어. 술을 파는 장사꾼이었단다. 샌디. 그는 사기꾼이야. 재별 정치인에 도둑에 사기꾼이지. 심지어 그의 이름에 붙은 ‘폰’도 가짜야. 하지만 넌 이런 것들 것들을 전혀 모르고 있어. 넌 폰 리벤트로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괴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괴벨스와 힘러와 헤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난 알고 있다. 폰 리벤트로프 씨가 다른 나치 전범들과 호화 만찬을 즐기는 오스트리아의 성이 어떤 곳인지 들어봤니? 어떻게 그의 것이 됐는지 알아? 빼앗았어. 성주(城主)인 귀족을 힘러가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었고, 그래서 술 장사꾼의 소유가 된 거야! 샌디, 단치히가 어디인지, 거기가 어떻게 됐는지 아니? 베르사유 협약이 뭔지 알아? <나의 투쟁>에 대해 들어봤니? 폰 리벤트로프에게 물어봐라. 그가 대답해줄 거다. 그리고 나치의 관점은 아니지만, 나도 대답해줄 수 있어. - P269

아버지의 삶이 고되다는 건 아침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술을 한 잔씩 하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보통 우리집에서 포어로제스 한 병이 비려면 몇 년이 걸렸다. 절대금주를 유난히 강조하는 어머니는 스트레이트 위스키의 냄새는 물론이고 거품이 이는 맥주잔을 보기만 해도 치를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두 분의 기념일이나 저녁식사에 초대한 보스에게 얼음을 넣은 포어로제스를 대접할 때가 아니면 언제 술을 마셨던가? 하지만 이제 아버지는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고 샤워하기도 전에 작은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른 후 머리를 뒤로 젖히며 벌컥벌컥 마셨고 그런 뒤에는 즉시 백열전구를 집어삼킨 듯한 얼굴로 변했다. "좋아!" 아버지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주 좋아!" 그런 뒤에야 아버지는 긴장을 풀고 양껏 음식을 먹었고 단 한 번도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았다. - P331

마치 이렇게 해괴한 경우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옳은 판단과 틀린 판단이 분명히 보이는 것처럼, 그런 곤경에 처했을 때 다른 누구도 어리석음의 손에 이끌리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의 비통함은 후회로, 자신을 향한 무자비한 채찍질로 표출되었다. 어머니는 단지 직감에 따라 행동했으며 그 직감은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올바르지 않은 판단을 내렸다며 자책했다. 하지만 정말 가혹하게도 어머니는 설령 본능을 거부하고 행동했다고 해도 어떤 이유를 찾아내 자신의 행동을 개탄했을 정도로 무조건 자신이 파국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 P465

어머니가 고통스러운 혼란에 빠져 자책하는 것을 지켜보는(그리고 그 자신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온 것은, 사람이란 옳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잘못된 일을 할 수 있고, 가끔은 그것이 너무 잘못된 일이라 혼란이 지배하고 모든 것이 위태로울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으며(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곧 뭔가를 하는 경우일 때를 제외하고……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주 큰일을 하는 것이므로) 심지어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흐름에 매일 체계적으로 저항하는 어머니에게도 그렇게까지 불길한 혼란을 감당할 체계적인 방법은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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