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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열전 - 3.1운동의 기획자들.전달자들.실행자들
조한성 지음 / 생각정원 / 2019년 1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읽은 조한성 님의 <만세열전>도 인터넷 서점 알라딘 블로그인 알라딘 서재에서 알게 된 책이란다. 최근에
나온 책인 줄 알았는데,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출간한 책이더구나. 그러니까 책제목 <만세열전>에서 ‘만세’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줄 알겠지? 바로 3.1운동, 3.1만세운동이란다. 3.1만세운동이 어떻게 준비되어 일어났고,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 당시 기록들을 찾아서 지은이가 엮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일제가 침략하여 대부분의 백성들이 탄압 속에 살았던 것이 불과 100년
전이라니..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데
오늘날 이런 발전된 우리나라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나라를 찾겠다는 온 백성들의 의지도 큰 몫을 차지했다고 생각한단다. 이 책을 책장에 두었다가 내년 삼일절 즈음에 읽을까 생각했다가 그 때 되면 또 까먹을 수도 있겠다 싶고, 책의 내용도 궁금해서 이번에 읽었단다.
삼일절의 정신은 삼일절에만 그리는 것이 아니고, 1년 365일 내내 지녀도 나쁘지 않잖니…^^ 이 책을 쓰신 조한성 님은
역사를 전공한 후 이후 우리나라 역사에 관련된 일을 계속 하신 분이라고 하는구나. 특히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추적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하셨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하고 계시대.
이런 분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몰랐던 역사와 역사적 인물을 알게 되는구나.
1.
이 책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3.1운동에 관한 것이란다. 3.1운동을 기획한 사람들,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사람들, 3.1운동을 실행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란다. 참 많은 사람들이
나온단다. 각 사람들에 대해 각주로 설명을 해주었는데, 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변절했음에 놀랍더구나. 3.1운동을 할 때도
이미 마음 속에는 자신감이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았어. 3.1운동의 33인 민족대표 중에 친일파로 변절한 대표적인 사람인 최남선은 중요한 순간마다 한 걸음 뒤로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구나. 그런 그의 심성이 나중에 친일파로 변절하게 만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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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그럼
최남선의 경우는 어떨까? 최남선은 최린과 근거리에서 독립운동에 긴밀히 관여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뒷걸음치는
모습을 보였다. 구한국 관료들을 민족대표로 내세우려는 시도가 실팼을 때, 최린은 자신을 포함하여 최남선과 송진우가 나서면 되지 않겠냐고 호기롭게 얘기했다. 하지만 최남선은 거절했다. 학자의 삶을 유지하는 게 꿈이니 정치운동의
표면에는 나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최린이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부착했을 때에도 최남선은 선언서를 쓰긴
하겠지만 작성의 책임은 자신이 아니라 최린이 져야 한다고 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안 한용운이 책임질
수 없다는 최남선에게 어떻게 선언서를 맡길 수 있느냐며 차라리 자신이 짓겠다고 했다. 최린은 최남선에게
계속 맡길 것을 고집하여 한용운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일본 유학 시절부터 친밀했던 사이이기에 여러모로
속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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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만 보면 최린이라는 사람은 그래도 심지가 굳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친일파로 변절했다는구나.
…
3.1운동을 이끌었던 33인 민족대표에는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계 15명,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계
16명, 한용운을 비롯한 불교계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겉보기는 민족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려는 구성인 것 같구나. 하지만 그들만이 3.1운동을 준비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단다. 3.1운동 전에 우리도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의지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던 여운형과 동지들, 3.1운동에 앞서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을 하려고 했던 학생지도부들이 있었단다.
특히 학생지도부는 매우 적극적이었단다.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 등 학생지도부는 종교계에 찾아와 함께 행동하자고
했고, 그래서 33인 민족대표까지 구성하게 된 것이란다. 하지만 33인 민족대표는 3.1운동
당일 너무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단다. 3.1운동의 독립선언을 광장에서 해서 많은 백성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그들을 이끌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명월관(태화관)에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조용히 독립선언서를 읽었단다. 이 사실을 알고, 학생지도부였던
강기덕이 와서 화를 내면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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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전
민족이 참여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날의 결정은 가장 아쉬운 대목으로 남았다. 그들의
결정은 끝까지 이해받지 못했고, 격렬한 불협화음을 낳았다. 민족대표 33인은 ‘민족대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학생과 시민 앞에 서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대규모 독립운동의 전 과정을 기획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독립선언을 발표하는 것만으로 한정했다. 독립을 선언한 이후 구체적으로 진행될 독립운동에서 직접 지도하는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기획한 독립운동에서 스스로 이탈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이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탈인지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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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관에서 독립선언을 읽은 민족대표 33인은 모두 사전 약속이 되어
있는 것처럼 모두 경찰서로 호송되었다고 하는구나. 왜들 그랬을까? 그렇게
엉성한 독립 선언을 하고 모두 경찰서로 가는 바람에, 파고다 공원에 남아 있던 학생들과 시민들의 만세
운동은 33인 민족대표가 남긴 커다란 구멍을 메꿔야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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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69)
민족대표들이
세운 독립운동 계획은 완전하지 않았다. 선언서를 기초하고, 선언서를
배포하고, 조직의 힘으로 함께할 사람들을 모아 가능한 몇몇 지역의 시위를 조직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었다. 많은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독립을 선언한 후 다음 계획도 치밀하지 않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수정할 계획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곳곳이 비어 있었고, 곳곳이
허점투성이였다. 그러나 결핍은 참여를 낳았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부족함을 느낀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스스로 빈틈을 메워나갔다. 독립운동은 그렇게 민족대표의 손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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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1운동은 3월 1일 하루로
끝이 난 것이 아니란다. 1919년 3월 1일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졌단다.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는 3월 5일에도 학생들이 주도하여 대대적인 만세 시위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독립선언서는 빠르게 빠르게 전국으로 전달되었다고 했어. 그렇게
목숨을 무릅쓰고 선언서를 전국 곳곳으로 전달한 사람들을 이야기해주었단다. 보성사 사무원이었던 인종익, 배재고보 2학년이었던 김동혁, 지하신문과
격문을 만들 사람들… 사실 이 분들은 역사책에도 잘 나오지 않는 분들이란다. 아빠도 이번에 모두 처음 알게 된 분들이야.
이 책의 지은이 조한성 님은 이렇게 숨어서 자기 일을, 그것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을 해낸 숨어 있는 영웅들을 소개해주려고 하셨단다. 그 일을 마치면 또 역사 속에서
사라지시기도 하고… 인종익이라는 분도 독립선언서 전달하다가 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다른 동지들이 독립선언서를 다 배포할 때까지 모진 고문을 참아내며 발설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감옥에서 만기 출소한 이후에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대. 그렇게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하신 거지. 이런 분들이 많아서 우리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오래 이어진 것
같구나. 이런 분들의 이름을 까먹지 말아야 할 텐데, 아빠의
기억력이…
…
앞서 이야기했듯이 33인 민족대표가 낸 큰 구멍을 학생들과 시민들이
메꿔나갔다고 했잖아. 특히 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단다. 그러면서 많은 탄압을 받기도 했지. 그런 사람들 중에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주도했던 김백평이라는 학생이 있는데, 그가 나중에 체포되어 재판장에서 한 이야기가 감명 깊더구나. 순간 울컥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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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예심판사가
김백평에게 물었다.
“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된다고 생각했나?”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며
조선인이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발표하면, 일본 정부나 세계 각국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독립을 희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학생이니 다른 것은 모릅니다. 다만 조선은 4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가 일본과 병합되었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원래대로 독립국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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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명의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 심대섭이란 사람이 있었단다. 심대섭은
당시 19살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형들은 모두 친일파였어. 그도
형들처럼 친일파로 살았다면 편했겠지. 하지만 심대섭은 몸은 편한데 마음이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셨지.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심대섭은 결국 체포되었는데 그는 경찰 앞에서도 당당하게 이야기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어머님한테 쓴 편지에도 그이 절연한 의지가 엿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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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244)
“어머님! 우리가 천 번 만 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랬다. 그 큰 힘이 있어 역사가 앞으로 나갔다. 아무리 큰 폭력과 억압이
있어도 그 힘을 누를 수 있는 건 고작 10년, 20년뿐이었다.
심대섭은
그 큰 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만세 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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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편지를 한번 읽어보렴. 그의 글솜씨도 예사롭지 않지? 이 심대섭이라는 학생은 바로 <상록수>로 유명한 소설가 심훈이란다. 심훈, 좋아하기에 충분한 분인 것 같구나. 아빠도 심훈이라는 작가를 좋아하거든. 너희들도 나중에 꼭 <상록수>를
한번 읽어보렴.
…
3.1운동은 비폭력으로 이루어진 시위운동이었으나, 그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폭력적이고 무식하고 잔인했단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죽었단다. 이런 역사를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으며,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어찌 포용할 수 있는가.
…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전국 여기저기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4월 어느날 수원에서 일본인 순사가 피살되었단다. 그 사건에 연루된
순사보 오인용이 조선인들과 공모했다는 확인 불가능한 진술로 인해 일본 경찰은 살인 배후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어.
당시 만세 운동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일본 경찰들은 만세를 주도한 사람들도 찾고 있었는데, 일본
순사가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난 거야. 일본 경찰들은 이성을 잃고 방화화 살인을 저지르는데 40여명이나 죽였단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단다. 제암리라는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단다. 그리고 교회를 빠져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으로 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단다. 너무 아픈 우리의 역사란다.
….
책에서는 더 많은 내용들을 이야기해주고 있으니 나중에 좀더 커서 너희들도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이런 책들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서 숨어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알리는 계기도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친일파들도…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친일파들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단다. 씁쓸하더구나. 자,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몇 줄로 늘어선, 창백하고
중얼거리며 공포로 뒤덮인 얼굴들, 그들은 자신의 참호를 떠나 꼭대기를 넘는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의 손목시계는 단조롭고 바쁘게 똑딱거리고, 희망은, 훔쳐보는 눈빛과 불끈 주먹으로, 흙탕에서 허우적거린다.
책의 끝 문장: 그 시작에 3.1운동이
있었다.
우리를 외롭다고 말하지 말라. 16억의 양심이 우리를 후원한다. 우리를 약하다고 말하지 말라. 2천만의 심인(心刃, 마음 속 칼날)은 우리의 무기다. 아아, 세계는 바야흐로 정의와 인도 위에 일대 부활을 수행하려 한다. 조선과 조선인은 이제야 생존과 존영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지니고 있다. 거듭 말하겠다. 시대는 개화하고 있고 조선인은 자각했다고. - <독립통고문> - P92
"손병희 등이 파고다공원에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심판사의 질문에 강기덕이 답했다. "마음에 불평이 있었소." - P120
동혁이 예심판사 앞에 섰다. 예심판사가 묻는다. "피고는 학생이면서 어째서 이번 계획에 가담했는가?" 동혁이 답했다. "난 조선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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