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리는 자주 예술 작품을 통해 한 시대의 개성과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받는 독특한 느낌과 기묘한 불균형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빈의 모습 그 자체다. 19세기 말의 빈은 다가오는 다음 세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중세 시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빈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더욱 갈망한 도시였다. 클림트의 그림들은 빈의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17-18)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처럼 클림트가 살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어제의 세계였다. 황제가 거주하던 도시, 19세기 말에 바로크 스타일의 궁전과 고딕 양식의 교회를 지었던 시대착오적인 도시가 클림트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과거지향적인 분위기에서도 변화는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다. 19세기를 떠나 20세기로 전진하는 시간의 흐름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기가 바뀌는 와중에 클림트는 먼 과거와 먼 나라에서 찾아낸 영감을 통해 혁신적인 걸작들을 창조해냈다. 그 혁신 속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모순과 불균형들은 천재이기 이전에 빈 사람이었던 클림트가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클림트의 걸작들은 과거인 19세기도, 미래였던 20세기도 아닌 제3의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으며, 그 독특한 아름다움은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은 개성으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클림트의 걸작들은 변화하는 시대와 복잡하고도 모순된 한 도시가 놀라운 천재성을 만나 이뤄낸 유니크한 혁신이었다.


(66-68)

클림트의 일생에서 가족의 그림자를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클림트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가족에서 집착했고 타계하는 순간까지 가족과 함께 살았다. 클림트에게 필생의 연인이었던 에밀리 플뢰게를 만나게 된 것도 그가 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에 대한 집착이 시작된 것은 1892년이었다. 그해 아버지 에른스트가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서 동생이자 동료, 예술적 동지이기도 했던 에른스트가 심근경색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당시 클림트의 나이는 서른, 에른스트의 나이는 스물여덟에 불과했다. 연이은 비극이 클림트 일가를 덮친 셈이다.


(75)

오랜 세월 빈은 모든 역사적 발전에서 동떨어진 장소였다. 그것은 다분히 빈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바다 건너 뉴욕에서 22층짜리 고층빌딩이 지어지고 같은 유럽 대륙 내의 파리에서도 철골 구조로만 이뤄진 높이 304미터의 에펠탑이 세워지며 현재의 도래를 알리고 있을 때, 빈 사람들은 오히려 바로크풍의 웅장한 박물관과 르네상스 스타일의 기둥으로 장식된 부르크 극장을 세웠다. 그리고 그처럼 과거에 영원히 머물고 있는 자신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오스트리아 예술가 조합은 심지어 자국 예술에 해악을 끼친다는 이유로 해외 작가들의 오스트리아 전시를 금지했을 정도다.


(105-108)

빈 대학 천장화를 그리면서 클림트가 본인의 스타일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천장화를 그리기 이전부터 클림트는 황제와 귀족의 청탁을 받아들여 최대한 그들의 의도를 부각시키는 역사와 작업에 진력을 낸 상태였다. 마치는 클림트가 타고난 리더십을 가진 이였다면서, 친구들이 클림트 장군이라는 별명으로 그를 불렀다고 회상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처럼,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어떠한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클림트가 가장 존경했던 예술가는 클래식 음악의 혁명가 같은 존재,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1902년 제14회 빈 분리파 전시에서 선보인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 아니 예술 자체에 바친 클림트의 신앙고백이나 다름없었다.


(124-126)

금세공업자의 아들인 클림트는 금을 얇게 펴서 바르는 중세의 기법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은 금을 칠한 벽화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분했다. <베토벤 프리즈>가 큰 화제를 모은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클림트의 동료들은 이 새로운, 동시에 지극히 고답적인 재료의 등장에 관심을 기울였다. 금의 사용은 예술가를 마치 신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심 클림트가 바라던 바였다. 클림트의 황금시대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159)

벨베데레 미술관의 <키스>가 전시된 방으로 들어서면 검은 벽에 <키스> 한 점만이 걸려 있고 그 앞으로는 관람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몰려 있다. 독일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등 각 나라 가이드들의 열띤 해설이 한꺼번에 들려온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과 소란은 이 그림 앞에서 일순간에 정지한다. 남자가 여자의 몸을 안고 볼에 막 입을 맞추려고 하는 순간이다. 하나가 된 두 사람의 주위로 온통 황금빛 비가 내리고 있다. 이것은 곧 소멸하기 전의 우주, 마지막으로 빛나는 불꽃의 광휘와도 같다. 극도로 관능적인 순간이지만 결코 천박하거나 노골적이지 않다. 직사각형 문양의 가운을 입은 남자는 황금빛 구름을 몰고 천상에서 지상으로 막 내려온 듯하고 꽃무늬 옷을 입은 여자는 지상에서 막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 여자의 발목에는 황금빛 넝쿨이 감겨 있다.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지만, 남녀가 서로를 갈구하는 감정은 너무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161)

<키스>는 화가로서 클림트의 인생이 함축된 작품이기도 하다. 남녀의 뒤로 펼쳐진 어두운 배경이 된 암흑은 그의 여름 휴가지인 아터 호수의 고요히 일렁이는 물결과 엇비슷하고, 기하학적인 황금빛 무늬는 라벤나에서 본 비잔티움 모자이크, 그리고 아버지의 금세공 작업을 연상시킨다. 결국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화가로서 클림트의 인생은 <키스> 한 점에서 모두 표현된 셈이다. 가득한 사람들, 그리고 갖가지 언어로 들리는 해설에도 불구하고 전시실은 고요했다. <키스>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거대한 침묵과도 같았다.


(188)

여자가 없는 클림트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에게 여자란 자기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클림트의 작업실은 막 피어오르는 꽃들로 뒤덮인 것만 같았다. 그녀들 중에는 보통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처녀도 있었고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귀족 가문의 레이디도 있었으며 유대인도, 부유한 상인의 딸도 있었다. 클림트는 그들 모두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향기 속에 싸여서 살았다. 아마도 클림트보다 더 현재의 여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언론인 프란츠 세르베스가 1912년 클림트의 여성 편력에 대해 쓴 글의 일부분이다.


(199-200)

하지만 에밀리 플뢰게를 단순히 클림트의 연인으로만 부를 수는 없다. 그녀는 일생 동안 클림트의 삶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단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클림트의 연인인 동시에 예술적 동료였으며 매니저였고 삶의 조력자이자 후원자였다. 클림트는 에밀리와 평생 동안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거리낌없이 다른 여자들, 특히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기거하던 모델들과 성적 관계를 맺었다. 에밀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떤 여자가 자신의 실질적인 남편을 다른 여자들과 나누어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에밀리와 클림트에게는 이 기묘한 관계가 별달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랭크 휘포드는 이 관계에 대해 빈의 부르주아 남성들은 아내를 두고도 거리낌 없이 외도를 즐겼다. 말하자면 클림트와 에밀리 사이의 관계는 조금 느슨해진 중년 이후의 부부와 엇비슷했다.”고 설명했다.


(264-266)

실레는 열입곱 살이던 1907년 클림트를 처음 만났다. 당시 실레는 빈 미술학교 학생이었고 클림트는 이미 빈 분리파와 빈 공방을 통해 오스트리아 전체에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다. 그러나 실레의 드로잉을 본 클림트는 이 소년의 넘치는 재능에 압도되고 말았다. “제가 재능이 있다고 보시나요?”라는 실레의 물음에 클림트가 재능이 많아, 너무 많아라고 대답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리고 클림트는 덧붙였다. “나도 자네처럼 사람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 실레가 클림트에게 자신의 드로잉과 클림트의 드로잉을 바꾸자고 제안했을 때 클림트는 이렇게 답했다. “왜 자네 걸 내 것과 바꾸려고 하지? 자네 그림이 훨씬 더 나은데 말이야.” 이 대답의 의미를 실레는 곧 깨닫게 된다.


(281)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한 화가였으나 작품에 대해서는 늘 평가가 교차했다. 보수적인 빈의 분위기 속에서 클림트의 관능적이고 파격적인 그림은 많은 비판과 논란을 불러왔다. 1908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키스>를 구입하면서 위상은 더욱 높아졌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가는 아니었다. 더욱이 사망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고 빈 역시 쇠락하면서 클림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잊혔던 클림트의 작품이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사후 약 5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다. 클림트를 비롯해 이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가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면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클림트는 순식간에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288)

예술의 도시 빈에는 여러 예술가들의 흔적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남아 있다. 도시 곳곳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 요한 슈트라우스와 슈베르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거장들 중에서도 클림트처럼 빈에 자신의 발자취를 확실하게 남긴 이는 없다. 클림트는 빈의 공기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존재다. 빈 슈베하트 국제공항으로 입국하는 이들은 누구나 공항 벽에 펼쳐진 <키스>의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실물보다 훨씬 더 큰 그 이미지들은 클림트의 도시 빈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 오래된 황제의 도시는 이제 예술의 황제로 클림트를 떠받들고 있다. 제국의 광휘는 오래전 사라졌으나, 클림트의 영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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