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열전 1 - 잊힌 사건을 찾아서 독립운동 열전 1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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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도 일제시대 독립 운동 관련된 책 <제국의 암살자들>을 읽었는데, 이번에도 일제시대 독립 운동에 관한 책을 읽었단다. 우연히 이 책도 최근에 알게 되어 읽었단다. 책의 내용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 사건과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에 관한 책이라는 데 더 관심을 갖게 했단다. 예전에도 아빠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학창 시절 배웠던 독립 운동 역사는 반쪽 짜리 역사였단다.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이들, 또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생활했던 이들의 독립 운동은 배우지 않았단다. 하지만 당시 사회주의는 시대의 한 흐름으로 독립운동가들 중에도 사회주의자가 많았단다. 그들과 그들의 독립 운동 사건에 대해 공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 책을 알게 되고 나서 곧바로 읽어보고 싶었단다. 이런, 이번에 읽은 책 제목 조차 아직 알려주지 않았구나.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님이 쓰신 <독립운동 열전>이라는 책이 그것이며 이 책은 총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늘은 그 중에 1, 부제로 <잊힌 사건을 찾아서>라는 책을 소개해 줄게. , 그럼 부지런히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1.

한반도를 떠나 외국으로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은 1910년 경술국치 전후와 1919 3.1운동 이후 두 차례 많이 있었단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이미륵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단다. 경성의학전문학교면 오늘로 치면 서울대학교 의대인데, 그냥 자신의 위치에 순응하면 편히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미륵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경찰에 쫓기고 있었단다. 어머니의 권유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어. 후에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끝내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망명 이후 어머니와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독일에서 삶을 마감했다고 하는구나. 이미륵 님은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책을 통해 망명객의 삶을 이야기했는데, 아빠도 그 책을 읽어보겠다고 오래 전에 사두고 아직 읽지 못했단다. 그 책뿐만 아니라 이미륵이라는 분의 삶 자체를 더 자세히 알고 싶더구나.

...

망명객의 삶을 소설로 쓴 이는 이미륵 이외에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이라는 이가 있단다. 예전에 <상록수>를 재미있게 읽어서 아빠도 심훈이라는 작가에 호감을 갖고 있었단다. 심훈이 1920년대 상해의 망명객들을 소설로 그린 <동방의 애인>을 발표했다고 하는구나. 이 책이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제목은 알고 있단 책이란다. <상록수>를 재미있게 읽고 심훈의 다른 소설을 알아보다가 알게 된 책이지. 그런데 책 값이 너무 비싼 판본 밖에 없어서 좀 저렴한 판본이 나오길 기다라고 있던 책이었단다. 그런데 이 <동방의 애인>이 바로 1920년대 상해의 망명객들을 그린 소설이라고 하는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박헌영을 모델로 하고 있고, 아빠가 좋아하는 여성 독립운동가 주세죽을 모델로 한 인물도 나온다고 하는구나. 지은이 임경석 님이 <동방의 애인>에 대한 소개글을 읽어보니 이 책도 꼭 읽어보고 싶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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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작가 심훈은 1920~1921년 상하이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다. 심훈 자신이 상하이 망명객이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녹여 이 소설을 썼다. 상하이의 거리 풍경에 관한 묘사라든가, 상하이에서 막 발아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 및 단체 활동 양상에 관한 서술 등을 보라. 어떤 사료보다도 생생하게 역사적 진실을 전해준다. 국경도시 신의주를 통해 열차 편으로 잠입하는 비밀 활동 참가자의 행동과 심리 묘사도 압권이다. 그를 색출, 체포하려고 노력하는 경찰, 헌병, 세관 관리 등의 언행도 흥미롭다. 이렇게 <동방의 애인> 1920년 상하이 한인 망명자 사회의 내면, 특히 사회주의가 처음으로 수용되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형상화한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서술들이 역사학자의 눈길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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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2 8일 상하이에서 김립 암살 사건이 일어났단다. 처음에는 범인이나 배후가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범인은 조선인 양춘산이라는 사람이었고, 배후는 임시정부 국무국 경호원 오면직, 노종균이었어. 그들은 김구 휘하에 있던 사람이었단다. 그들은 왜 김립을 죽였는가? 김립이 러시아로부터 받은 40만루블을 횡령했기 때문이라고 했어. 40만 루블은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약 500억이라는 엄청난 돈이었단다. 임시정부 국무국 의견은 김립이 횡령을 했다고 했지만 김립 측 의견을 달랐단다. 그 돈은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 코민테른이 임시정부가 아닌 한인사회당에 지원한 돈이었다는 거야. 그래서 한인사회당 소속이었던 김립이 그 돈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지.

여기서 김립이라는 사람을 잠깐 알아보자꾸나. 김립의 본명은 김익용이야. 김립은 1910년 북간도로 망명을 갔고, 그곳에서 광성중학과 나자구무관학교를 창립했단다. 최초 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의 창립멤버이고 소련의 소비에트와 교류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오는데 성공했단다. 한인사회당 또 다른 멤버인 박진순은 레닌을 직접 만나 200만 루블 지원을 약속 받았고, 그 중 40만 루블을 1차로 받았던 것이었단다. 하지만 김립이 죽고 나서 소비에트의 지원을 끊기고 말았단다. 임시정부의 김립 암살 사건은 섣부른 판단이었던 것 같구나. 그의 횡령이 의심되었다면 재판을 통해 죄를 판단했어야 했어. 지은이 또한 이 사건을 국가 폭력이라고 판단했는데, 지금이라도 김립이라는 사람을 재평가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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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김립 암살 사건은 일종의 국가폭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의 결정에 의거하여 경무국이 집행한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큰 위해를 가져온 불행이었다. 임시정부는 두 가지 점에서 명백한 과오를 범했다. 첫째, 잘못된 정보와 판단에 입각해 있었다. 모스크바 자금 40만 금화 루블의 집행권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인사회당에 속해 있었다. 둘째, 설혹 유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형벌의 집행 과정이 적법하거나 적절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계의 폭넓은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졌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과오를 바로잡아야 한다. 진상이 규명되어야 하고, 망자에게 국가적 차원에서 사과를 해야 한다. 또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기념사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을 자임하는 한국 정보의 마땅한 태도라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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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20년 일제의 돈 15만원을 탈취하는 사건이 있었단다. 이런 사건은 정말 처음 들어보는 사건이구나. 당시 일제의 돈 15만원은 오늘날 150억 원 상당의 거금이었어. 이 일을 주도한 사람들은 철혈광복단원 여섯 명이었다고 하는구나. 임국정, 윤준희, 최이붕, 최봉설, 한상호, 김준. 이들 중 4명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는 이 돈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단다.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를 밀매하고 군관학교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해 있던 독립운동가들과도 만나 일을 착착 진행해 나갔어. 그런데 어느 새벽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았단다. 최봉설만 간신히 도망가고 나머지 세 사람을 체포되고 말았어.

, 그들은 왜 잡혔는가. 누군가 그들의 계획을 밀고했던 것이란다. 배신자 엄인섭. 그는 한때 안중군과 의병대를 이끌고 반일활동을 했던 거목이란다. 무려 14년간 의병 활동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어. 그런데 그가 왜... 그는 이미 오래 전, 그러니까 1908 11월부터 밀정활동을 했다는구나. 당시에는 몰랐는데 최근 자료에 의해 그 행적이 밝혀졌다고 하는구나. 참 나쁜 사람이구나. 그때 잡힌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대문형무소까지 끌려와서 결국 모두 사형을 당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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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건은 아빠가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경성을 쏘다>라는 책에서 이야기했던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란다. 1923 1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하하고 경찰과 쫓고 쫓기면서 총격전 끝에 사살되고 말았단다. 아빠가 이전에 읽은 책에서는 마지막 총알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는데, 이 책에서는 여러 가지 근거로 일본 경찰에 의해 죽었다고 하는구나. 그의 마지막이 무엇이든 그의 위대한 죽음은 꼭 기억해야겠구나. 김상옥님은 이전에 자세히 이야기해서 오늘은 간단히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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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사건 중에 그나마 알려진 것이 김원봉의 의열단 투쟁이란다. 아빠가 김원봉에 관한 책을 두어 권 읽고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 줄 때도 이야기했지만, 의열단 투쟁은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단다. 그 중에 한 사건만 소개해 줄게. 황포탄에서 다나카 육군 대장 저격 시도를 했던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과 김익상이 체포되었다가 오성륜은 탈옥에 성공하고 김익상은 사형 선거를 받았단다. 김익상은 나중에 감형되어 13년형을 받았단다.

김익상이 감옥에 있는 동안 집안은 몰락했어. 김익상이 없는 동안 동생은 집을 이끌다가 힘에 부쳐 자살을 했고 부인과 딸의 행적도 알려지지 않았대. 김익상 본인도 출소 후 혼자 지내다가 한강에 투신 자살을 했다고 하는구나.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마지막이 안타까운 경우가 많아 가슴이 아프구나.

이번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 운동 일화를 이야기해줄게. 블라디보스토크에 개척리라는 곳이 있었단다. 망명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어. 나중에 콜레라 때문에 신한촌으로 이전하기 전에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던 곳이야. 그곳에서 1910년 정순만이라는 사람이 양성춘이라는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양성춘은 안창호 측 사람이고, 정순만은 헤이그 특사로 유명한 이상설의 동지였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독립운동의 여러 계파가 있었고 알력 다툼이 있었나 봐. 그래서 알력 다툼을 중재하는 회의가 있었는데, 안 좋게 끝나고 그 회의가 있던 밤에 정순만이 양성춘을 찾아가 죽인 사건이었어. 양쪽 모두 독립 운동을 한다고 애썼는데 이렇게 살인까지 일어나다니 안타깝구나.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양측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과실치사로 정순만은 1년형을 받았단다. 1년 뒤 정순만이 출소하고 죽은 양성춘의 형 양덕춘과 양성춘의 아내가 정순만을 찾아가 도끼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어. 이건 그야말로 개인적 원한에 의한 복수 사건이었단다. 하지만 이상설 측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로 안창호를 지목하고 안창호 등 4명을 기소했단다. 안창호는 이 일이 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미국으로 떠났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운동은 쇠퇴했단다.

...

이후 연해주의 각 세력들은 다시 하나로 뭉치기 위한 노력을 했고,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했어. 러일전쟁 패배 이후 일본에 복수하고픈 러시아도 대한광복군 정부를 적극 지지했단다. 그러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단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러시아와 일본이 모두 연합군 진영이었어. 그러니까 갑자기 한 편이 된 거지. 일본은 러시아에 항일 운동에 제재를 요청했고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였어. 그래서 해도(연해주와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은 다시 위축되고 말았단다.


3.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있단다. 그 중에 잘 안 알려진 변절 친일파들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에서 해주고 있단다. 오현주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인텔리 여성으로 3.1운동 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도 했었어. 남편 강낙원의 선배가 친일 경찰이었는데, 이 사람이 회유를 했고 이에 넘어가 애국부인회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넘겼어. 그래서 1919 11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간부 및 비밀요원들이 대거 검거되었단다. 잡혀간 애국부인회 회원들은 온갖 잔인한 고문을 받았단다. 그에 비해 오현주 부부는 광복 후에도 큰 처벌 없이 천수를 누리다가 오현주는 1989 98살에 눈을 감았다고 하는구나. 하늘은 정의를 모르는가. 이런 사람들이 처벌도 없이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누리는 것을 보고만 있다니...

유학자 김달하라는 사람이 있단다. 유학자이면서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김창숙의 측근이었어. 그런데 그는 친일로 유명한 김활란의 형부 되는 사람이었단다. 김활란의 형부라니 좀 냄새가 나는구나. 김달하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했지만 후에 변절하고 김창숙에게 귀국을 회유하였다고 하는구나. 김창숙에 이에 크게 분노하고 다른 이들에게 김달하를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했어. 얼마 후 다물단이라는 조직이 김달하를 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어. 김창숙이 김달하를 안 좋게 이야기했지만 당시 김달하가 진짜 밀정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나중에 다른 밀정이 잡히면서 그가 나눈 편지를 통해 김달하가 진짜 밀정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하는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밀정이 된 이들이 도처에 있었나 보구나. 그들 때문에 더 독립운동이 힘들었겠구나.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된 김대우라는 사람이 있어. 그의 아버지는 친일파이자 대지주였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회유하고 경찰에 탄원서를 넣고 해서 일찍 풀려났단다. 감옥 생활이 힘들어 그랬는데 그는 쉽게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었단다. 유학까지 다녀온 후 도지사까지 했다고 하는구나. 욕이 절로 나오는구나.

고려공산당 초창기 멤버 중에 독고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배신을 하고 동지들을 밀고하고 김명시라는 여성 동지가 투옥되었대. 처음에는 독고전이 밀정이라는 것도 몰랐대. 나중에 김단야가 폭로해서 그가 밀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구나. 그의 나중 행적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구나.

독립운동가인 줄 알았던 김성근이라는 사람도 밀정임이 밝혀져서 상해에 있다가 국내로 도망 오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그는 광복 이후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다고 하는구나. 그것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고 하니, 아직 우리나라 과거사는 정리가 안 된 것이 참 많구나.


4.

101인 사건이란 것이 있단다. 105인 사건은 좀 유명해서 알고 있는데 101인 사건은 처음 들어봤단다. 당시에는 3대 독립운동 탄압 재판으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101인 사건이 조선공산당과 연루되어 그 이후 잊혀진 사건이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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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305)

101인 사건이란 식민지 시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3개 독립운동 탄압 재판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3대 독립운동 탄압 재판 중 첫 번째는 ‘105인 사건재판으로, 식민지 시대 초기를 대표하는 비밀결사 신민회 탄압 재판이었다. 두 번째는 ‘48일 사건재판으로, 3.1 운동 때 민족대표를 비롯하여 독립선언 사전 모의에 가담한 인사들에 대한 탄압 재판이었다. 이어서 바통을 넘겨 잡은 것이 바로 ‘101인 사건재판으로, 3.1 운동 이후 들불처럼 타오르던 사회주의운동 대표 단체 조선공산당 재판이었다. 세 재판은 피고인 숫자가 각각 105, 48, 101인이었다고 해서 그런 명칭을 갖게 됐다. 당대 언론매체들은 이 세 재판을 식민지 조선 통치 20년래의 대표적 중대 사건으로 지목했다. 항일운동의 역사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신민회, 3.1 운동, 조선공산당이 나란히 손꼽히고 있음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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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101인 사건은 1927 9 13일 재판이 시작되었고, 이때 고문치사로 죽은 사람이 있었는데 박헌영은 재판소에서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명연설을 했다는구나. 하지만 이후에도 고문으로 죽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났다고 하는구나. 박순병, 박길양, 백광흠, 권오상이 그렇게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이한빈이라는 분은 105일 동안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돌아가셨대. 박헌영도 고문 후유증으로 출소한 이후에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는구나. 출소 당시 사진을 보면 초점 잃은 눈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게 했단다.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해두고 그를 바탕으로 정신 없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메모의 부정확성 때문에 일부 틀린 내용도 있을 거야. 감안하렴. 오늘 편지의 뒷부분에서 변절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런 변절자 말고 진짜 나라를 사랑하신 분들이 더 많았단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채그리고리의 마지막까지 숭고함을 지켰던 가슴 아픈 이야기로 오늘 편지는 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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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이었다. 채그리고리는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속에 담아둔 얘기를 꺼냈다.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자신이 죽으면 유해를 의학 연구 재료로 사용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사후라 할지라도 신체를 훼손하는 일은 불효가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시신 기증 캠페인이 사회적으로 널리 수용된 게 수십 년 뒤의 일임을 감안하면,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선각자다운 풍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또 하나는 동지들을 만나고 싶으니 다음 날 오실 있는 분들은 모두 모여 달라는 부탁이었다. 국경에서 체포되지만 않았다면 의기투합하여 혁명사업을 함께 도모했을 동지들의 면면이 그리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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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태백아 우리 님아 나 간다고 슬퍼마라.

책의 끝 문장: 후보자들이 작성한 자필 문서의 필적을 대조한다거나, 12월테제 채택 전후 각 개인의 행적을 정밀하게 추적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립이라는 이름은 혁명에의 헌신을 결단하는, 마음속 깃발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마음 맞는 동향 출신 동료 허헌과 함께 망국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원하는 데 한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대한제국 시절, 두 사람은 ‘입헌’이라는 글자를 하나씩 나눠 갖기로 합의했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전체군주제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김익용은 ‘설 립’자를 취하고, 허헌은 자신의 본명에 포함된 ‘법 헌’자에 그 의미를 부여했다. 두 사람은 전제군주가 가지고 있는 국가 주권을 국민의 품으로 옮겨오는 시민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김립의 막역한 친구 허헌은 훗날 인권변호사가 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허헌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3.1운동 피고인들과 조선공산당 사건 피고인들을 변호했으며, 민족통일전선 단체 신간회의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다. - P70

사형선고를 받은 김익상이 일본 황태자 결혼, 천황 즉위 등을 계기로 하여 세 차례 감형을 받았고, 결국 13년 감옥살이를 마치고 1936년에 출옥했다는 이야기, 출옥 이후에도 예비검속과 요시찰 감시 등으로 고통을 겼었다는 이야기, 1941년 8월에 노량진에서 용산경찰서 경찰과 조우하여 격투를 벌이다가 다시 수감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한강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 등을 전해주었다. 김익상의 최후는 아마도 사상전향 및 예방구금제도의 시행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941년 2월에 공포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에 따르면, 만기 출옥한 시국 범죄자로서 사상전향에 응하지 않는 자는 언제라도 다시 감옥에 수감되어야만 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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