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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암살자들 - 김구 암살 공작의 전말
윤대원 지음 / 태학사 / 2022년 9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아빠가 역사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란다. 읽은 것을 오랫동안 잘 기억하고 있으면 좋겠는데, 금방금방
까먹어버리고… 그럴 때는 반복이 정답이지.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도 좋지만, 같은 시기의 역사를 다른 각도에서 본 책들을 읽는 것을 더 선호하는 편이란다. 아빠가 일제 시대 독립운동을 다른 책들을 여럿 봤는데, 이번에 읽은
책은 제목에 독특해서 읽게 되었단다. 제국의 암살자들. 부제는
김구 암살 공작의 전말.
우리나라 독립 운동의 양대 산맥 중에 한 분인 김구. 일제는 그를 죽이려고 애를 썼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모두
실패했지.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우리나라 사람한테 총격을 받은 사건은 알고 있었단다. 그래도 목숨은 잃지 않고 우리나라가 해방을 하는 것을 보실 수 있었지. 해방은
되었으나, 남한과 북한으로 둘로 나뉘어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어.
김구는 하나된 조국, 그러니까 진정한 독립을 위해 노력하시다가 결국 암살당하시고 말았단다. 일본 놈들이 그렇게 암살 시도를 해도 실패했는데, 우리나라 사람한테
암살당하시다니… 그 배후는 열등감에 똘똘 뭉친 이승만임이 틀림없지만,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고… 김구
암살 공작의 전말이라는 이 책의 부제를 이야기하다 보니 그 이후의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구나.
이 책은 윤대원 님이라는 분이 쓰셨는데, 아빠는 처음 알게 된 분이란다. 이 책은 지은이의 논문을 좀더 보충해서
출간한 것이라고 했어. 논문에서 출발한 책이라서 그런지 재미있게 읽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단다. 일제 시대 밀정들이 어떻게 활동을 했고, 그로 인해 진정한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단다.
1.
1919년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나서 초반에는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이
활발했으나 1920년대 중후반으로 가면서 파벌간 갈등도 있고 침체기를 맞이하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1929년 12월
광주 학생 운동 소식이 날아왔어. 광주 학생 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우리나라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진 학생들 중심의 독립운동이었단다. 이 광주 학생 운동을 접한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은 자극을
받았어. 김구의 임시정부 계열과 안창호의 흥사단이 주축이 되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어. 그리고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에 대응하려고 했어. 그런데 일본의 책략으로
한국과 중국의 백성들 사이에 불미스러운 사고들이 잇달아 일어났단다. 임시 정부는 중국 정부를 만나 이
불미스러운 사고들에 대한 오해를 풀고, 이 모든 것들이 일본의 기만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을 했단다.
1931년 9월 18일에는 일본이 만주를 불법 침략하는 일이 일어났단다. 중국에게
모멸감을 준 사건이지만 한국에게는 한중연합을 견고히 하고 함께 항일하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미온적으로 대응을 했어. 무력 항쟁이 아닌 국제연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단다. 이것이 중국의 만만디인가? 한국 임시 정부는 중국에 거세게 항의를
했단다. 결사 항전만이 답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중국은 무저항주의와
외교 노선으로 일관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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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그런데 9*18 사변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일 정책은, 즉각적인 대일 항전을
바랐던 임시정부는 물론 상하이 민중과 대학생들을 점차 실망시켰다.
9*18 사변 직후 “중국 정보는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국제연명에 호소하는 것과 함께 국내적 분열의 중심이 되고 있는 공산당 세력의
토벌에 집중”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에 따라 동북지방의 방위를
맡은 장쉐량에게 일본군과 교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중국 정부는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 ‘무저항주의’를 선택하고 국제연맹을 통한 외교적 해결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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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은 항일 운동에 독자노선을 가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 임시정부 침체기에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김구도 생각했단다. 그래서
의열 투쟁을 위한 한인애국단을 비밀리에 조직했단다. 하지만 의거는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어. 이봉창의 도쿄 일왕 암살 시도가 실패하고, 이덕주의 조선총독암살
시도는 사전에 체포되어 실패하고, 중국에서 최흥식, 유상근의
일제 요인 암살 시도도 사전에 체포되어 실패했단다. 그러다가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성공하여 일본 상하이
사령관 등 일제 핵심 인사들이 죽었단다.
이 사건의 배후가 밝혀지기 전에 안창호 등 젊은 독립인사들이
줄줄이 체포 당했어. 김구는 로이터 통신을 통해 자신이 배후라고 밝혔단다. 이후 김구는 한동안 은거를 했고, 일본은 김구를 체포하기 위한 대대적인
작전에 들어간단다. 상하이 경찰 조직을 확대하고 밀정 활동도 확대했어.
특히 독립운동가들을 매수하려는 시도를 많이 했단다. 김구의 연락책인 김긍호가 체포되고 그를
이용하여 김구의 거처를 알아내려고 했으나 실패했단다.
2.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는 프랑스 조계의 피치 목사의 아들에 집에
숨어 지내다가 항저우 근처 자싱에 은둔하며 지내고 있었단다. 아빠가 여러 번 이야기한 것 같은데 김구의
자싱 은둔 생활은 중국작가 하련생이 쓴 <선월>이라는
소설에 잘 그려져 있단다. 아빠도 오래 전에 읽었는데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구나. 김구는 자싱의 은둔 생활을 하면서 오랜만에 평온을 되찾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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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43)
김구는
천퉁셩 부부의 극진한 환대 속에서 한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는 천퉁셩 부부의 안내를 받으며 자싱의
산천을 감상하고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상하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산과 호수, 넓게 펼쳐진 비옥한 토지를 감상했고, 임진왜란 당시 마을 부녀자들을
살리려다가 왜놈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승려의 슬픈 사연이 담긴 서문 밖 혈인사의 돌기둥, 그리고 소낙비에
보리가 떠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오직 글 읽기에만 골몰한 서생 주바이신의 무덤에 얽힌 사연을 들으며 오랜만에 눈과 귀가 호사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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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김구 암살 작전이 시작되었어. 1934년 조선총독부 상하이 주재원으로 나카노 가츠지란 사람이 왔어. 그는
밀정을 이용해 김구의 위치를 파악하고 노력했단다. 그리고 1935년 1월 김구가 난징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밀정 오대근에게 김구 암살 지시를 내렸지. 오대근은 오랫동안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사람으로 상하이에서 독립군 민족해방을 목표로 활동을 했는데 변절을 했단다. 오대근을 중심으로 다른 공작원들 데리고 난징을 갔지만, 김구는 그곳에
없었지.
두 번째 김구 암살 작전은 나카노 가츠지 후임으로 온 히토스키
도헤이에 의해 진행되었단다. 밀정 임영창을 이용하여 고도의 작전을 펼쳤어. 무정부주의자 정화암이 있었는데, 그의 동료 중에 김오연이 체포되었어. 그런데 그것이 김구와 안공근이 밀고해서 체포된 것이라고 거짓 정보를 주었단다.
그래서 정화암이 김구를 암살하도록 하는 작전이었어. 하지만 정화암은 히토스키의 작전에 휘말려
들지 않았단다. 그리고 정화암은 김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 그런데
이 일을 주도했던 밀정 임영창의 정체가 애매했단다. 지은이는 임영창은 이중첩자였던 위혜림과 동일인물로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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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위혜림의
행적과 관련하여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해방 이후 그의 행적이다. 정병준은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이후
행적을 연구한 논문에서,
‘1959년 안두희가 서울 수도방위사단
사령부 고급부관(대령 계급)으로 오사카에 나타나 경무대 기관원이던
위혜림, 나카지마 등과 북송손 폭파 공작을 벌였으나, 정보
누설로 공작에 실패한 후 귀국하였다.’
고
했다. 그리고 위혜림은 해방 직전에 “상하이에서 아마기스
기관의 하부 조직인 무라이 기관의 기관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맥아더
사령부 정보참모부 휘하 특수 공작 기관이던 캐논 기관에서 일해”고 이 기관이 해산된 뒤에는 ‘이승만의 도쿄 주재 사설 기관인 경무대 기관에서 일했다”고 한다.
위혜림과
김구의 질긴 악연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해방 전 김구 암살 공작에 밀정 노릇을 했던 위혜림이 해방
후에는 이승만 사설 기관의 부하가 되어,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와 함께 재일교포의 북송선 폭파 공작을
함께한 이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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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 번의 암살 시도가 실패했는데, 김구는 뜻밖의 총격을 받는단다. 1938년 5월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재건
한독당이 한자리에 모여 3당 통일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이운환이라는 사람이 들이닥쳐
권총을 난사했단다. 이 사건으로 김구와 유동열은 중상을 입고, 함께
있던 현익철은 죽고 말았단다. 다행히 목숨은 건진 김구. 이운환의
총격 사건은 여러가지 설이 있었단다. 먼저 조선혁명단 소속의 박창세,
강창제, 이운환이 그들이 속한 조선혁명당을 차별했다는 것에 화가 나서 그랬다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이운환의 일탈로 단독 범행이라는 설도 있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일제 배후설이 있었단다. 지은이는 일제 배후설에 힘을 실었단다. 박창세와 강창제는 이미 히토스키의 의해 포섭되었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했단다. 박창세의
아들은 이미 밀정이라고 알려졌거든. 박창세는 1924년 교민단을
가입한 후 의용대 활동을 했단다. 이후 임시정부 활동도 활발히 했어.
1934년 비록 불발탄으로 실패를 했지만 강병학 의거를 주도했고, 한독당 멤버로도 활동을
했단다. 1937년 이청천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창당했지만 결국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고 말았단 것이야. 일제가 그의 아들들을 이용하여 회유를 했던 것이야. 그리고 밀정이
된 박창세는 김구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운환을 사주하게 된 것이고…
세 번째 암살 시도는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김구는 한 달 치료 후에 소생했단다. 정말 다행이구나.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일제의 암살 시도를 모두 이겨냈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우리나라 군인에게 총격을 당해 돌아가시다니…
참 안타깝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PS:
책의 첫 문장: 상하이의 짧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1929년 12월 29일, 바다 건너 고국에서 광주학생운동 소식이 들려왔다.
책의 끝 문장: 전자는 윤봉길 의거 이후 강화된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 조직과 활동을, 후자는 밀정 오대근의 최후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였다.
그런데 최근 학계와 사회 일각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계급적 이해관계를 위해 역사의 기억들을 왜곡하고 전용하는 현상들이 나타나 우려스럽다. 2019년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자 배상 판결 문제를 구실로 경제보복 조치를 취했다. 이때 국내의 보수적인 정치인과 지식인, 나아가 경제 단체들이 원인 제공자인 일본이 아닌 자국 정부를 향해 마구 손가락질하며 법석을 떨었다. 일본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으면 한국 경제가 당장 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들은 한일 과거사 문제의 해결 방안에서도 같은 태도이다. - P5
임시정부가 재건됨으로써 이제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정국은 김구가 주도하는 임시정부와 김원봉이 주도하는 민족혁명당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양상이 되었다. 민족혁명당은 창당 당시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했다. 반면 임시정부는 이를 반대하고 재건한 입장이기 때문에 양측 사이의 갈등은 당분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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