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 - 충렬왕에서 최영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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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의 마지막 4권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게.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모두 네 권을 읽으면서 고려의 역사를 쭉 정리해보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구나. 그런데 아빠가 독서 리뷰 적은 걸 찾아보니 아주 오래 전에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시리즈를 읽으면서 고려 역사에 대해 한번 읽고 정리한 적이 있더구나. 시간이 좀 흐르긴 했지만, 그 기억이 전혀 안 나다니, 좀 슬프구나. 그 이야기는 이번에 읽은 고려의 역사도 곧 잊혀진다는 거겠지? , 어쩔 수 없지. 그럼 또 고려 역사에 관한 책을 또 읽지 뭐…^^ 그럼 오늘도 할 이야기가 좀 되니까 얼른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게.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에서는 무신 정권과 몽골 침략과 그에 대해 항전하는 고려의 모습을 이야기해 주었잖니. 오늘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해줄게.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려의 왕 이름에는 몽골에 충성하라는 의미로 충()이 들어갔다고 예전에 얼핏 들은 겉 같구나.

그런 왕들 중에 첫 번째 왕이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이었어. 3권에서 이야기할 때 원종 때 세자를 쿠빌라이 칸의 딸과 결혼시킨다고 했잖아. 그래서 앞으로의 고려 왕들은 몽골 황제의 부마가 된다고그 첫 번째가 충렬왕이란다. 그러니까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는 거야. 그런데 당시 충렬왕은 39살이고 몽골 공주인 제국대장 공주가 17살이었단다. 그 이야기기는 충렬왕은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던 거지.

제국대장 공주가 개경에 오면서, 충렬왕의 아내였던 정화궁주는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하는구나. 제국대장 공주는 처음에는 잘 적응을 하지 못했나 봐. 질투심이 않았고, 한 성격을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기도 했대. 심지어 자시보다 20살 넘게 많은 남편을 회초리로 때린 적도 있다는구나. 그랬다가 시간이 지난 다음에 좀 괜찮아졌대. 그런데, 제국대장 공주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화가 좀 많이 났을 거야. 17살에 다른 나라에 와서 이미 결혼한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라고 하니 누가 좋아하겠니. 그것도 평생 공주로 살던 사람이 말이야. 아빠는 제국대장 공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겠더구나.

시간이 흘러도 향수병은 가시질 않은 것 같아. 나중에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몽골에 다녀온 뒤 제국대장 공주는 39살 나이에 죽고 말았단다. 이때 충렬왕은 궁녀 무비라는 사람에 한창 빠져 있었어. 그런데 세자는 엄마인 제국대장 공주가 죽은 것이 무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무비와 측근을 죽여버렸단다. 충렬왕은 그런 아들에게 뭐라 하지 못했어. 충렬왕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력이 점점 약해졌거든. 그에 반해 아들은 세력을 점점 커졌고그래서 충렬왕은 결국 아들한테 왕자리를 넘겨주었단다. 그는 고려 충선왕이었어.

 

1.

충선왕이 왕에 오르고 나서 이것저것 개혁을 추진했단다. 그 개혁들을 몽골 허락 없이 해서 밉보이게 되었단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 계국대장 공주와 결혼을 했어. 그런데 계국대장 공주와 결혼하기 전에 조비와 결혼을 했었어. 당시 왕들이 왕비 둘을 두는 것은 일상이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 그런데, 충선왕이 계국대장 공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조비만 좋아했다고 하는구나. 계국대장 공주는 독수동방만 했대. 자신의 아버지와 너무 비슷하지 않니? 자신이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무비를 죽이기까지 했으면서 말이야. 충선왕도 그리 유능한 왕은 아닌 것 같구나.

한편, 외로움에 힘든 날을 보내고 있던 계국대장 공주는 몽골에 편지를 보냈고, 이를 조사하기 위해 몽골은 100명이나 파견을 보냈다고 하는구나. 그리하여 충선왕과 조비를 몽골로 데리고 갔어. 몽골에서는 충선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서 물러났던 충렬왕을 다시 왕위에 세웠단다. 아들 충선왕에게 왕을 물려준 지 8개월만이었어. 몽골의 의해서 고려 왕이 폐위당하고, 다시 복위되고 힘없는 고려의 단모습을 보여주는구나.

몽골에 간 충선왕은 그곳에서 10년을 지냈단다. 그 사이에 몽골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어. 원나라의 당시 황제였던 성종이 죽고 황위 다툼이 일어났단다. 이때 충선왕과 충렬왕은 각기 다른 사람을 지지했대. 그런데 충선왕이 지지한 무종, 인종 형제가 차례로 황제가 되었단다. 충선왕은 이들이 황제가 되는데 일등공신이 되어 심왕으로 책봉받았다고 하는구나. 충선왕은 원나라에서 상당한 고위직이 된 거였어. 시간을 흘러 충렬왕은 73세에 죽고 충선왕은 10년만에 고려왕에 복위했단다. 그런데 이미 몽골에서도 왕위를 갖고 있었잖니. 충선왕은 두 개의 왕위를 갖게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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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이익주) 그래서 충선왕이 폐위된 지 10년 만에 복위합니다. 사실 충선왕의 전성기는 복위하기 한 해 전인, 무종을 옹립한 직후부터 시작됩니다. 그때 원에서 심왕으로 책봉받습니다. 지금의 중국 선양시와 랴오양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분봉받으면서 원의 여러 왕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마침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고려 왕까지 되어 두 개의 왕위를 겸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원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정책이 어전회의에서 토의되고 결정되는데,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케식으로 부릅니다. 충선왕이 바로 케식의 일원으로서 원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면서 원의 실력자가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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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려왕이 된 충선왕은 고려에 왔는데 얼마 머무르지 않고 다시 몽골로 갔단다. 그리고 몽골에서 편지로 고려를 통치했어. 충선왕은 두 개의 왕을 겸하고 있다 보니 몽골 황제에서 불만을 갖는 이들이 있었고, 이에 충선왕에게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했단다. 몽골 사람들은 당연히 충선왕이 고려왕을 선택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충선왕은 뜻밖에도 심왕을 선택했단다. 그리고 고려왕은 세자에게 양위를 했대. 충선왕은 좀 독특한 캐릭터로구나. , 그래도 계속 몽골에서 자라났고, 반 이상은 몽골 피를 가지고 있었으니 몽골에서 사는 것이 편할 수도 있겠다 싶더구나. 그런데 충선왕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단다. 충선왕이 지지하던 무종과 인종이 잇달아 죽고 5대 황제인 영종이 즉위한 이후 티베트 지역으로 유배를 가고 말았다는구나.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로구나. 티베트로 유배를 갈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2.

몽골의 공주가 고려왕의 왕비가 되는 경우는 많았는데, 반대로, 고려의 공주는 아니더라도 고려의 여자가 몽골 황제의 황후가 되는 경우가 있었을까? 한 명 있었단다. 드라마로 만들어진 이후로 많이 유명해진 기황후가 바로 그 사람이야. 십대 때 공녀로 몽골에 가게 되었는데, 궁녀가 되고 그 이후 2황후가 되었단다. 1황후가 아니고 2황후이긴 하지만 똑 같은 황후였기 때문에 그 권력이 막강했고 고려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단다. 고려의 왕까지 조정할 수 있었단다. 그래서 공민왕이 제때 왕이 안되고 뒤늦게 왕위에 오른 것도 기황후의 영향력 때문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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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신병주) 여기서 고려 왕의 계보를 잠깐 살펴보자면, 충선왕의 아들 강릉대군이 충숙왕이 됩니다. 그다음은 충숙왕의 장남인 충혜왕이 잇고요. 참고로 공민황은 충숙왕의 차남이죠. 충혜왕이 폐위되자 동생인 공민왕이 왕이 될 뻔했는데, 결국에는 아들인 충목왕이 고려 제29대 왕이 되죠. 충목왕이 즉위할 때 여덟 살이었는데, 4년 만에 열두 살의 나이로 병사해요. 그렇게 해서 공민왕이 이제는 자기 차례라고 생각할 때, 이번에는 충혜왕의 서자인 충정왕이 열 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니까 공민왕은 어린 조카 두 명에게 연이어 밀린 거예요. 충혜왕이 폐위되었을 때는 충목왕에게 밀려 재수하고, 충목왕이 죽었을 때는 충정왕에게 밀려 삼수한 거죠. 결국 공민왕은 삼수 끝에 고려 제31대 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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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의 집안들이 고려의 권력을 거의 잡다시피 했는데, 한가지 골칫거리 왜구 침입이 있었어. 공민왕이 왕이 되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는 생각에 기황후는 공민왕을 왕위에 앉혔다고 하더구나.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기황후의 일가를 처단하려고는 조일신이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켜서 기황후의 오빠 중 한 명을 죽였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이 난을 일으킨 조일신이라는 사람이 공민왕의 측근이라고 했어. 배후에 공민왕이 있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런데 공민왕도 기황후 집안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조일신의 난을 직접 진압하게 된단다. 그리고 기황후 집안의 파워를 새삼 알게 된 공민왕은 자세를 낮추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그것을 기회를 엿 본 거야.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왕권을 세우려고 했거든. 그러기 위해서는 친 몽골파인 기황후 집안을 어떻게든 없애야 했어. 결국 잔치를 가장하여 기황후 오빠인 기철을 비롯하여 기씨 일가를 초대한 후에 기황후와 원나라를 지지하는 부원세력을 일망타진해 버렸단다. 그리고 이자춘 이성계 부자의 도움으로 쌍성총관부를 점령했단다. 이자춘 이성계 부자는 당시 쌍성총관부의 관리였는데, 그곳을 고려왕 공민왕에게 헌납한 것이란다. 원나라가 쇠퇴하고 있는 국제 정세를 잘 읽은 것이 아닐까 싶구나. 이 공로로 이자춘과 이성계는 고려의 관직을 얻게 된단다. 드디어 이성계가 역사에 등장하는구나.

이 즈음 공민왕 암살 기도가 일어나는데 다행히 실패했단다. 증거는 없지만 기황후가 배후로 의심되는 상황이란다. 기황후는 이번에는 공민왕을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원나라 군대 1만명을 고려에 보냈어. 그런데 공민왕은 이들을 순순히 맞이하지 않았어. 최영과 이성계를 시켜 이들을 격파하였단다. 이 전투에서 몽골은 대패하고 겨우 10여 기만 돌아갔다고 하는구나.  이후 공민왕은 자신감을 갖고 개혁을 추진했단다.

이때 신돈이라는 사람을 영입했는데, 토지제도, 노비제도를 정비하고 신진관료들을 대거 양성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추진했단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요승이라고 부르고 업신여겼단다. 그럼에도 왕의 지지를 받은 신돈. 그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권력에 자꾸 관심을 갖게 되면서 결국 탄핵당해 유배를 가게 되었고, 유배 후 이틀 만에 참수 당했다고 하는구나. 권력의 욕심이란 무엇인지

초반에 개혁 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은 사랑하던 왕비 노국대장 공주가 죽고 난 이후에는 정사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아들이 없던 공민왕이 신돈의 여종인 반야와 사랑을 나누고 아들을 낳았는데, 당시에도 그 아들은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반야가 낳은 아들은 정비의 아들이 아니었잖니. 공민왕은 노국대장 공주가 죽고 익비를 왕비로 맞이했는데 아직 아들이 없었어. 그래서 몰래 자제위 중에 홍륜이라는 사람을 익비와 동침을 시켰다고 하는구나. 자제위는 아빠가 얼마 전에 읽은 이병주 님의 <정몽주>편에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공민왕이 만든 미소년의 모임이란다.

홍륜과 동침했던 익비가 임신을 하게 되었어. 공민왕은 이 아이의 아버지가 홍륜인 것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홍륜을 죽이려고 했단다. 그런데 이걸 눈치 챈 홍륜이 오히려 공민왕을 죽이고 된단다. 그렇게 공민왕은 비극적으로 죽고 말았단다. 이 공민왕의 시해 사건을 뒷수습하고 범인도 찾아낸 이가 이인임이라는 사람인데 이 일로 이인임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권력도 잡게 된단다.

 

3.

다음 왕은 누가 될 것인가. 공민왕의 공식적인 아들은 신돈의 여종 반야가 낳은 아들 한 명뿐이었단다. 신돈의 여종 반야가 낳은 아들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소문일 뿐이고 공식적으로는 공민왕의 아들이었으니, 이인임은 그를 왕위에 세우니 그가 우왕이란다. 허수아비 왕으로 세운 것으로 볼 수 있지. 이때 이인임을 지지해준 사람이 최영 장군이었단다. 최영 장군은 이때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이인임의 불법행위도 눈감아 주었는데, 그의 업적에 옥의 티를 남기신 것 같구나.

이인임은 친원 세력으로 권력을 잡으면서 신흥사대부들을 모두 쫓아냈다고 하는구나. 이인임의 권력에 우왕이 맞서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어. 그러자 우왕은 최영을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어. 한때 이인임을 지지했던 최영도 이인임이 도가 지나친 것을 알고, 우왕의 부탁을 들어 이인임을 치기로 했단다. 혼자서는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이성계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함께 이인임 세력을 몰아냈단다. 결국 이인임은 유배를 가게 되었어.

이 즈음에 왜구의 계속된 침입이 있었는데, 육지까지 쳐들어왔단다. 정몽주는 일본에 건너가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어. 일본도 왜구의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몽주의 제안에 긍정적으로 답변을 했단다. 하지만 결국 왜구를 내쫓아야 하는 것은 무장의 몫. 이때 최영, 이성계, 그리고 화약 개발로 유명한 최무선의 활약이 있었단다. 최영은 61세의 노구를 이끌고 해구 소탕을 위해 몸소 출동하고, 최무선은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공격했고,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왜구 토벌에 마무리를 지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쓰시마까지 진출하여 그곳도 정벌했다고 했어.

이인임을 몰아내고 왜구도 무찌르는데 최영과 이성계는 협력하여 큰 성과를 이루어냈단다. 최영과 이성계는 열아홉 살 차이였는데 고려 장수의 신구조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어. 하지만 둘 간의 의견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 있으니 새로 생긴 명나라에 대한 자세였단다. 당시 명나라가 함경도에 불법으로 철령위를 설치를 하였단다. 이에 최영은 명나라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성계는 사신을 보내서 외교적으로 풀자고 했단다. 결국 최영의 파워가 더 있었기 때문에 최영의 말대로 요동정벌을 떠나게 되었고, 그 일은 이성계가 맡게 되었단다.

탐탁지 않은 일을 이성계에게 시켰으니, 이성계가 4불가론을 내세우면서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 아니겠니그래서 결국 고려의 멸망까지 이어지고 말이야. 이 이야기는 예전에 <역사저널 그날 1>을 읽고 이야기해주었으니 오늘은 생략하련다. 이것으로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권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 났단다. 이 책에서는 최영과 이성계에 대한 평가를 해주면서 마무리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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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이익주) 저는 최영이나 이성계 모두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영에게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최영은 개인적으로는 참 청렴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개인의 청렴함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생각하지 못했죠. 그랬기 때문에 최영 개인은 청렴했지만, 공민왕 때는 개혁의 걸림돌이 되었고, 우왕 때는 이인임의 불법행위를 눈감아요. 사회가 구조적으로 부패해 가는 것을 막지 못한 거죠. 어쨌든 최영의 죽음으로 고려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거의 사라집니다. 이때부터 고려가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데, 고려 왕조로서는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이 된 최영에게 국제적인 감각과 사회 변화에 관한 안목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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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아빠도 고려의 역사를 한번 훑어보게 되어서 좋았단다. 중간중간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담겨 있어서 좋았고. 책이 그리 어렵지 않게 적혀 있어서 너희들도 읽으면 좋겠더구나.

오늘은 그럼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복위한 원종이 몽골에 가서 군대를 요청하고 혼인을 제의했을 때, 몽골은 군대는 바로 내주었지만 혼인은 망설였던 것 같다.

책의 끝 문장: 이때부터 고려가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데, 고려 왕조로서는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의 된 최영에게 국제적인 감각과 사회 변화에 관한 안목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익주) 호구조사를 고려의 자율에 맡긴다는 것은 고려의 호구조사 결과를 몽골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전까지 고려에 설치되어 있었던 다루가치를 폐지하고 다시는 설치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 낸 거죠. 또한 그 당시에 고려에 주둔하던 몽골군을 전부 철수하게 하고, 홍차구 같은 부원 세력이 고려의 정치에 개입하려고 하는 것도 이제는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쿠빌라이 칸의 약속이 쿠빌라이 칸이 죽은 다음 몰골의 후손들에게 세조가 정한 옛 제도라는 의미에서 세조구제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 이후에는 몰골의 누군가가, 또는 고려의 부원 세력이 고려의 자주성을 해치려고 시도하면 언제나 이 세조구제에 어긋난다는 논리로 막아 냅니다. 그래서 고려가 끝까지 국가로서 유지될 수 있었죠. 충렬왕의 외교가 거둔 성과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 P33

(이익주) 사실 기황후의 능력은 외모보다는 몽골 여인과는 다른 학식에 있었습니다. 한가할 때는 <여효경>과 각종 역사서를 읽으면서 중국의 역대 황후 가운데에서 본받을 만한 인물이 있는지 공부했다고 합니다. 또한 사방에서 올라오는 공물 가운데 좋은 것이 있으면 태묘에 먼저 바친 후에야 그것을 가졌다는 기록도 있고, 수도 근방에 커다란 기근이 들었을 때는 자기의 사재를 털어서 무려 10만여 명의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처럼 황실 안에서 상당히 현명하게 처신했다는 기록을 보면 몽골 사람들은 잘 갖지 못했던 유교적인 덕목을 기황후가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 P84

(류근) 뭐니 뭐니 해도 공민왕이 불굴의 자세로 추구한 자주성과 독립성이 가장 인상에 남아요. 그 삼엄한 원 치하에서 어떻게든 고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회복하려고 노력한 그 끈기와 오기에 아름다운 고려 정신이라고 박수를 좀 보내 주고 싶어요. - P108

(신벙주) 이인임 세력은 권력을 휘둘러 뇌물을 수수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강제적으로 뺏는 일들을 자행해요. 혹시 수정목이라는 나무 들어 봤어요? 물푸레나무예요. 이 나무가 아주 단단합니다. 야구방망이로 만들어도 되는 나무인데, 이때 이인임의 수하들이 수정목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토기를 내놓으라며 때렸죠. 그러다 보니까 몽둥이가 국가에서 발급한 공문보다도 더 효과가 크다고 해서 수정목 공문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정말 공포의 대상이 됐다는 거죠.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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