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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 만적에서 배중손까지 ㅣ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을 이야기해줄게. 아빠가 메모를 하면서
꼼꼼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너희들에게 독서편지를 다시 쓰려고 보니 이미 기억 속에서 많이 사라져 있더구나. 메모의 불분명한 내용은 다시 책도 뒤적거리기도
했단다. 아, 아빠의 짧은 기억력이 원망스럽구나. 자, 더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바로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
1170년 무신정변 이후 약 100년
동안 민란이 무려 75회나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그만큼 백성들은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야. 2권 독서편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신이
정권을 잡으면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했다면 백성들 지지를 받으면서 더 오랫동안 정권을 잡았겠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뇌가 없었어. 자시들의 욕심만 채우려고 급급했지. 그러니까
서로 치고 박고 죽이고 권력이 십 년 가기가 어려웠어. 이 때 일어난 난 중에 유명한 난을 두 개 이야기해줄게. 먼저 1176년 공주 부근의 명학소라는 곳에서 망이 망소이의 난이
있었단다. 당시 행정 구역을 나눌 때, 급이 있었는데 가장
높은 급은 주현, 그 아래로 속현이 있고 그 아래 향, 소, 부곡이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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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2)
(이익주) 고려 시대 지방 제도의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모든 군현이 같은 등급에
있지 않고, 크게 세 등급으로 나눠집니다. 가장 위에 있는
등급인, 지방관이 파견되는 군현을 주현으로 부릅니다. 주인
주(主) 자를 쓰지요. 그다음
등급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옆에 있는 주현으로부터 간접 통치를 받는 속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는 향, 소, 부곡이 있는데, 이 향, 소, 부곡에
사는 사람들은 좀 어려운 말로 잡척(雜尺)으로 부르지요. 이 작첩들은 일반 군현에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세와 공물, 역
같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유지를 경작하거나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을 생산해 국가에 납부하는 역을 더 지므로 살기가 더 힘듭니다. 사회적으로는 천대받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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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학소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소', 즉 급이 낮은 지역으로 많은 불이익을 받으며 살았단다. 당시에는 이사의 자유도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계속 살아야 했어.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가 난을 일으켜서 관군을 투입했지만 관군은 패배하고 말았단다. 나라에서는 명학소를 주현으로 등극시켜주는 조치를 했어. 그러자 백성들이
너무 착했던지, 어리석었던지 백성들의 분노가 잦아들었지. 그렇게
난리가 수그러들자 관군은 망이, 망소이와 그들의 가족을 잡아가버렸어.
그제서야 다시 봉기를 했지만 리더가 사라진 봉기는 실패를 하고 말았단다. 그리고 '주현'도 다시 명학소로 강등당했다고 하는구나.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
또 하나 민란을 이야기해볼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노비의 난인 만적의 난이 이 시절에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망이 망소이의
난도 그렇고 만적의 난도 그렇고, 예전에 교과서에 나와서 이름들만 기억나는 그런 민란이란다. 만적의 난도 안타깝게 내부 배신자 때문에 실패를 했고, 나라에서는
이 난에 참여를 했던 100여 명을 모두 수장시켜 죽였다고 하는구나. 그래도
이런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 민란이 계속 발생하자 향, 수, 부곡의
숫자는 점점 줄어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1.
최충헌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최충헌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있었는데
실패를 했다는구나. 이 암살사건이 실패하고 나서 최충헌의 자신의 권력을 더 막강하게 했고, 암살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기 위해 교정도감을 설치했는데, 이 교정도감이
나중에는 최씨 무신정권의 핵심적인 권력기구가 되었대. 그리고 그 교정도감의 우두머리를 교정별감이라고
했는데, 최충헌부터 4대 동안 교정별감을 세습했다고 하는구나.
신종이 죽고 제21대
희종이 왕이 되었는데, 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24살이었단다. 혈기 넘치던 시기에 왕이 되었는데, 모든 정권은 최충헌이 갖고 있으니
마음에 안 들었겠지. 그래서 자객 10명을 시켜서 최충헌을
암살하려고는 시도를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단다. 그러자 최충원은 희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아들을 왕위에 앉혔으니 그가 제22대 강종이었단다. 왕도 마음대로 폐위시킬 수 있는 권력이 최충헌에게 있던 거야. 왕
위에 교정별감이 있었던 거지. 강종이 왕 위에 오른 것이 60세였어. 그래서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단다. 그리고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올랐단다. 고려 제23대왕 고종은 고려 왕 중에 가장
오랜 기간 즉위했다고 하는구나. 46년간.
...
고종 3년 거란의
침입이 있었는데 관군이 변변치 않았어. 왜냐하면 유능한 장수는 모두 최충헌의 사병 소속이었거든. 그래도 사병이 얼마나 된다고 관군에 영향을 주냐고 할 수 있지만, 최충헌의
사병은 수만 명이나 되었대. 그 많은 사람들은 월급 주려면 만만치 않을 텐데, 얼마나 수탈을 해서 부를 챙겼을까 싶구나. 거란이 침입을 했지만
최충헌은 자신의 사병을 나라에 내주지 않았어. 그렇게 되자 화가 난 승려들이 최충헌을 상대로
군사를 난을 일으켰는데, 잘 훈련된 최충헌의 사병들을 이길 수 없었지.
이 난에 참여했던 승려들 800여 명이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구나. 한편, 거란의 침입은 조충이라는 분께서 간신히 막았단다. 혼자 막은 것은 아니고 거란 위쪽에서 치고 내려오는 몽골족과 연합해서 막아낸 것이라고 하는구나.
…
자신의 개인 욕심만 채우던 최충헌은 장수를 누리고 71살에 죽었다고 하는구나. 평생 자신의 권력에만 신경 썼던 최충헌. 그나마 다른 무신들과 달리 말년에 문인을 일부 등용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뿌리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최충헌처럼 권력 욕심이 많은 사람의 후세들의 특징은
서로 싸우는 것... 역시나 최충헌이 죽고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어. 이 싸움에서 장남 최우가 정권을 잡게 되었단다. 그런데 이제 권력
욕심만 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몽골이 고려를 노리고 있었단다.
2.
앞서 거란의 침입을 이야기할 때, 조충이 거란 북쪽에서 내려오는 몽골과 연합해서 거란을 물리쳤다고 했잖아. 몽골에서는 이 일로 형제의 맹약을 맺자고 했어. 고려에서는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없으니 몽골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단다. 몽골이 형이고 고려가 아우. 이 맹약 이후 몽골은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했어. 사신으로 왔던
제구예는 난동을 부리기도 했단다. 그런데 그 몽골 사신 제구예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너머에서 죽은
사건이 일어났단다. 누가 죽였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런데
몽골에서는 고려 사람이 범인이라고 단정 짓고 책임을 물었단다. 고려로서도 억울한 일이었지. 압록강 밖이면 동진족, 여진족 등 외부 세력도 있었고, 몽골족 중에 원한이나 다른 이유로 죽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이
사건으로 고려는 몽골과 단절을 선언했단다.
약간은 무리한 선택이 아닌가 싶구나. 당시 몽골은 유럽부터 아시아 대부분의 땅을 정벌한 세계 최강 기마부대를 가진 나라였는데... 이 일이 있고 6년 뒤 몽골은 고려를 침략해 왔단다. 6년이나 걸린 이유는 그 동안 남송, 금나라를 공격하느라 늦은 것이란다. 남송과 사대를 맺고 있는 고려도 가만 둘 수 없으니 제구예 사건을 핑계로 고려를 쳐들어왔단다. 개경을 지나 충주까지 그래도 밀고 내려온 몽골군. 고려 관군이 버텨내기는
쉽지 않았단다. 이 때 백성들로 이루어진 초적들이 관군을 도와 몽골군과 싸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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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최태성) 그 정체는 바로 초적입니다. 초적은 고려 민주이에요. 먹고살기 어려운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다가 무리를 지어 도적질하는 무리가 된 거죠. 사실 이 초적들은 무신 정권에 반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몽골군이
오니까 무신 정권에 손을 내밀고 몽골에 대항해 함께 싸우자고 한 거예요. 심지어 마산, 이 마산은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인데, 그 마산에 있는 초적 우두러미
두 명이 직접 최우에게 와서 몽골과의 전쟁에 자기들을 써 달라고 자원합니다.
(류근) 초적들이 평소에는 관군들에 쫓기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나라에
위기가 닥치니까 일단 묵은 감정은 접고 외적과 싸우자는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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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성에서 박서, 김경손
등이 몽골군을 무찌르는 쾌거를 이뤘지. 아빠는 박서, 김경손이라는
분들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분들인데, 엄청난 영웅이었더구나. 그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면 좋겠는데, 아빠의 기억력이 얼마나 버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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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신병주) 귀주성의 승리는 이끈 김경손에 관한 기록을 보면 몽골군이 쏜 화살에 팔을 맞아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끝까지
부대를 지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김경손이 아주 중요한 곳에서 군사들을 지휘하는데, 몽골군이 쏜 포탄이 계속 날아오자 부하들이 김경손에게 너무 위험하니까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권합니다. 근데 김경손은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이면 부하들이
동요할 것이다.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라면서 끝까지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부대를 지휘하죠. 정말 대단한 장군입니다. 명장이죠.
(류근) 당대의 영웅이었는데, 우리가 잘 몰랐던 거네요. 진짜 감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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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고려는 역부족이었어. 결국
조공과 인질을 보내기로 하고 화친을 맺었단다. 하지만 고려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인질도 안 보냈어. 그리고 다시 항전 준비를 했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단다. 강화도로 옮겨 왕족은 대피할 수 있으나
육지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은 그대로 핍박을 받는 상황이었지. 그래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최우는 반대 세력을 죽이면서까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단다. 백성들도 각자도생 한다고 산과 섬으로 피신했지만 역부족이고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하는구나.
...
몽골의 2차 침입이
일어났단다. 최우는 강화도에도 몸 사리고 있을 때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가 몽골군은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단다. 몽골의 사령관 살라타이가 화살에 맞아 죽은 대승이었어. 그래서 몽골은
잠시 물러나게 된단다.
1233년 홍복원, 필현보라는
사람이 서경성을 빼앗아 몽골에 항복하는 일이 벌어진단다.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구나. 왕권이 상실되고 권력 잡은 무신들은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고 있으니 홍복원, 필현보 이 사람들도 아마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저런 짓을 한 것 같구나. 하지만
힘없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너무 나쁜 사람들이구나. 홍복원은 몽골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되고 고려 침입의
선두에 섰다는구나.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이
약 5년간 이어졌단다.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볼 수 있어. 이 때 경주 황룡사 구층탑과 초조대장경 등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고 말았대. 그리고 불심의 힘으로 외세를 몰아내고자, 팔만대장경을
간행한 것도 이 때라고 하는구나. 몽골의 3차 침입은
본국에 있던 대칸이 죽으면서 철수를 했다고 하는구나.
1247년 몽골의 4차 침입이
있었는데, 이 때도 2년만에 대칸이 죽어 철수를 했고,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이 있었단다. 이때는 칭키스칸의 조카 예쿠와 홍복원이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어. 예쿠는
몽골 진영 내 내분이 일어나서 금방 돌아가고 홍복원이 혼자 군대를 지휘했다고 하는구나. 충주성에서
김윤후가 다시 대승을 거두어 몽골은 다시 물러났다고 하는구나. 처인성에서 활약을 했던 김윤후가 이번에는
충주성에서... 김윤후라는 분은 다시 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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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80)
(신병주) 후대의 역사는 김윤후가 높이 평가받기에는 상당히 불리한 여건으로 지속됩니다.
원 간섭기에는 몽골에 저항한 인물이니 제대로 평가받기가 어려웠고, 조선 시대에는 신분이
승려인 김윤후가 크게 활약한 것을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별로 없었죠. 하지만 조헌이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에
김윤후를 언급할 정도로 그 당시에 많은 백성 사이에서, 특히 의병장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윤후가
대몽 항쟁의 상징으로 분명히 회자되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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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4년 몽골의 6차 침입이
있었고, 이때부터 몽골은 고려에 머물면서 온갖 노략질을 했단다. 1258년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지배를 하기 시작했지. 고려가 몽골의 계속된 침입을 막아냈지만, 결국은 역부족이었던 거지. 당시 고종의 태자(나중에 원종이 됨)가 몽골 칸을 만나 강화를 맺기 위해 몽골에 갔단다. 그런데 칸이 죽고 동생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게 되었어. 원종은 어느
동생 편을 드는 것은 고려의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었어. 원종은 쿠빌라이를 찾아갔는데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단다. 쿠빌라이가 다음 칸이 되었거든. 칭키스칸 다음으로 유명한 그 쿠빌라이
칸을 원종이 찾아간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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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시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은 최의가 잡고 있었는데, 문신인 유경과 무신인 김준이 손을 잡고 최의를 제거하였단다. 그렇게 최의가 죽으면서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단다. (1258년) 그런데 김준은 혼자 권력을 잡고 싶었는지 유경을 죽이고 전권을 잡았단다.
....
3.
원종이 몽골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버지 고종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단다. 쿠빌라이 칸은 원종에게 왕을 임명하고
고려로 보내주었단다. 이 때부터 고려가 몽골에 사대하기 시작한 것이야.
이 때 원종이 쿠빌라이와 맺은 강화 조약은 비록 고려가 전쟁에서 지고 나서 맺은 조약이지만, 당당한
요구도 포함되어 있어 외교적으로 성공한 강화조약으로 평가를 받는다고 하구나. 원종이 쿠빌라이와 친분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요구를 했고, 쿠빌라이도 이를 흔쾌히 받아준 것 같아. 그것으로 인해 그 이후에도 몽골이 고려라는 나라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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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이익주) 그 당시 고려의 상황을 평가할 때는 몽골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대제국이라는 점,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 가운데 국가를 유지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을 전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때 고려라는 국가를 유지하게 한다는 쿠빌라이 칸의 약속을 뒷날 세조구제(世祖舊制)로 부르는데, 고려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모든 시도에 대해 고려 측에서는
세조구제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반대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런 점에서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이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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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이 고려로 돌아왔을 때 정권은 김준이 잡고 있었는데, 원종은 임연이라는 사람을 이용하여 김준을 제거했단다. 그러자
이번에는 임연이 권력을 차지하고 원종까지 폐위를 시켰단다. 칼 잡은 자들의 끝없는 욕망을 보고 있는
듯하구나. 이 소식이 몽골에 있는 쿠빌라이의 귀에 들어갔어. 원종과
쿠빌라이는 돈독한 사이인데 원종을 폐위시켜? 쿠빌라이는 압력을 행사했고 원종은 복위를 했단다. 복위한 원종은 다시 쿠빌라이를 만나러 몽골에 갔단다. 그리고
몽골 군대를 빌려와 임연을 공격하려고 한 것이지. 그런데 임연은 등창에 걸려 죽고 말았단다. 그렇게 길고 긴 무신정권이 끝이 나고 말았단다. (1270년)
…
원종은 태자를 쿠빌라이 칸의 딸과 결혼을 시켰단다. 앞으로 고려의 왕이 될 태자가 몽골 황제의 부마가 된 것인데, 이것은
이후 한동안 쭉 이어졌단다. 그런데 이런 원종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어.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였단다. 원래 삼별초는 무신정권 때 만들어진
조직으로 치안을 담당하고 도적을 잡는 조직으로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이루어졌단다.
이 삼별초를 이끌고 있던 배중손은 원종이 몽골에 강화조약을 맺은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계속 항전했던다. 또다른 왕, 온왕도 세웠어.
처음에 강화도에 있었는데, 강화도를
떠나 진도에 주둔지를 세웠어. 삼별초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세를 키워나갔단다. 몽골군과 싸워서 승리하기도 했어. 하지만 몽골과 고려관군의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패배하고 말았단다. 그리고 왕으로 세웠던 온왕이 죽고 배중손도 진도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돼. 배중손을 뒤이어 김통정이라는 사람이 남은 부대를 이끌고 제주도로 향했단다. 몽골에서 회유를 했는데 거절했고, 몽골은 다시 대규모 군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공격했어. 그렇게 몽골에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삼별초마저 결국
제주도에서 궤멸하고 말았단다. 하지만 삼별초와 이를 지지했던 백성들의 항전은 잘 기억해야
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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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이익주) 우리가 흔히 삼별초의 항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삼별초만의 항쟁이 아니라 삼별초를 중심으로 하는 고려 전 백성의 항몽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평가는 복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외세에
대항해 싸웠다고 해서 무조건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겠죠. 고려가 28년 동안 몽골과 싸운 점, 강화를 통해 왕조를 유지하고자 노력한
점 등을 고려해 삼별초를 중심으로 하는 항몽도 종합적으로 새롭게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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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1170년 무신 정변이 일어나고 한동안 무신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민란이 일어났다.
책의 끝 문장: 역사를 단순하게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하면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가 보인다는 사실을 삼별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됐습니다.
(신병주) 한때는 국사 시간에 향*소*부곡을 천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가르쳤는데, 최근에 바뀌었어요. 양인과 천민을 나누는 가장 큰 구분점은 국역을 지는지 안 지는지입니다. 향*소*부곡에 사는 사람들도 국역을 지기 때문에 일단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죠. 다만 하는 일이 천역(賤役)이어서 일반적인 양인과는 좀 구분해야 합니다. 특히 소라는 지역은 수공업을 전문으로 해서 물품을 조달하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금소에서는 금을 생산하고, 은소에서는 은을 생산하죠. - P33
(이익주) 다소 역설적이긴 합니다만, 최충헌이 그렇게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왕실은 그대로 두고 그 권위를 이용하면서 자기의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하고 세습까지 했죠. 그래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신하가 권력을 4대에 걸쳐 세습할 수 있었던 겁니다. - P76
(이익주) 고려에 호감이 있었다기보다는 고려를 고구려와 같은 나라로 알았다는 점이 컸을 겁니다. 훗날인 1259년에 고려 태자가 몽골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납니다. 그때 쿠빌라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고려는 만 리나 되는 큰 나라다. 옛날에 당 태종이 친정했어요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나에게 왔으니 이건 하늘의 뜻이다." (류근) 진짜 고려를 고구려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 몽골이 그 정도로 국제 정세에 어두웠는데도 패권 국가가 되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나마 고구려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게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간 보기 정도로 형제가 되자는 카드를 내밀어 본 거 같아요. - P87
(신병주) 그래서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논란이 많아요. 강화 천도가 전략적 천도인지 도피성 천도인지 판단하기가 어렵거든요. 전략으로 보는 쪽은 강화 천도가 항전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것으로 강조하고 해석합니다. 강화도라는 천연의 요새에서 오랫동안 버팀으로써 몽골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보는 거죠. 반면에 도피로 보는 쪽은 어차피 몽골에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우라는 집권자가 자기 안위를 위해 안전이 보장되는 강화도로 천도했다고 해석하죠. 이런 지적을 할 수 있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무렵에도 여전히 초적들이 준동하고 백성들이 반란을 계속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몽골이 아니더라도 최우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너무 많은 거예요.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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