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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 강감찬에서 최충헌까지 ㅣ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를
이야기해줄게. 1권에서는 고려 건국부터 후삼국 통일, 그리고
광종, 천추태후 등에 관한 이야기를 있었잖아.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거란의 침략이 있었고, 강조가 막아내려고 했으나 패배하고 개경까지 함락이 되었잖아. 그리고 당시 왕인 현종은 나주까지 천도를 했다고 이야기해 주었지. 2권에서는
이 이야기부터 다시 해주었단다. 이때 고려가 나주로 몽진한 것은 강감찬의 조언에 따른 전략적 결단이었다고
하는구나. 조선 선조의 무작정 도망과는 다른 몽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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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류근) 제가 처음에는 몽진이라는 말만 듣고 경기를 일으켰는데,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까 (조선) 선조의 몽진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요. 선조의 몽진이 지극히 보신적 도망이었다고 한다면 (고려) 현종의 몽진은 강감찬이 사태를 분석해 선택한 전략적 결단이었잖아요. 어떤
문제의 본질과 현상을 제대로 파악해서 그에 걸맞는 대안을 사유해 내는 능력을 보여 준 건데, 이래서
인문학적 교양이 필요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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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그 다음 이야기를 해줄게. 다행히 사신 하공진이라는 사람이
거란을 설득을 해서 거란은 개경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이때 하공진도 인질로 같이 거란 진영으로 끌려갔단다.
..
1018년 거란은 소배압을 필두로 다시 고려를 침입했단다. 세 번째였어. 이때는 강감찬 장군이 분비를 잘 해서 흥화진이라는
곳에서 승리를 했단다. 그래도 거란은 강감찬 장군을 피해서 개경까지 접근했지만, 거란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고려군의 대피로 다시 퇴각하고 말았어. 그런데
이 거란의 퇴각은 쉽지 않은 길이었단다.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준비하고 있었거든. 거란 군대는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한테 대패하고 세 번의 침략은 끝이 났단다.
이후 약 100년간 거란은 고려를 쳐들어오지 않았고 평화가 유지되었다고 하는구나.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승리를 했을 때 나이가 72살이었다고 하는구나. 그야말로 노익장이 무엇인지 보여준 것 같구나.
…
시간은 흘러 1104년 고려 제15대
숙종 때 이번에는 여진이 침략을 했단다. 이때 윤관 장군이 있었는데,
윤관의 제안으로 별무반을 조성해서 여진 공격에 대비하자고 했단다. 별무반이 정비가 되고 1107년(예종 때)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공격했다고 하는구나. 이 전쟁에서 대승을 해서 동부 9성을 차지를 했대. 역사 기록에 동부 9성이라고 되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하는구나. 다만 조선 세종 때 출간된 <지리지>에 따르면 두만강 북쪽 지역이 맞을 것이라고 했어. 이 지역이
세종 때 개척한 6진과도 같은 위치였거든.
그런데 멀어서 운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공을 받는 조건으로 2년
만에 동부 9성을 여진에 반환했다고 하는구나. 후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참 아쉬운 결정이구나. 그래도 이런 결정 때문에 당시 여진이 금나라를 세우고 송과 거란을
침략하면서,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1.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이자겸이라는 외척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좀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이자겸은 제16대 왕 예종의 장인이고, 제17대 왕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었다고 하는구나. 오늘날 상식으로는 좀 이해가 안 가는 관계인데, 아무튼 인종은 이모랑
결혼을 한 것이란다. 그것도 이모 두 명이랑 결혼을 했어. 이렇게
두 왕의 장인인 이자겸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어. 이자겸은 인주(오늘날
인천) 이씨였는데, 그 전부터 많은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란다.
인종은 이자겸의 권력이 너무 세다 보니 더 이상 볼 수 없고 이자겸과 그의 측근인 척준경을 공격했단다. 하지만, 이자겸의 반격에 인종은 신하 10여 명만 데리고 도망을 갔단다. 이 때 궁궐이 다 불타기도 했대. 이 사건을 역사는 이자겸의 난으로 기록하고 있단다. 도망간 인종은
이자겸에서 왕위를 주겠다고 했는데, 이자겸은 거절했단다. 지금처럼
왕의 뒤에 앉아서 권력을 독식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 것 같아. 인종은 이번에는 이자겸의 측근인
척준경을 회유했단다. 결국 이자겸은 지지 기반을 잃게 되고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고 얼마 안 있다 죽었다고
하는구나. 이자겸이 영광에 유배 갔을 때 말린 생선을 먹었는데, 그
생선에 너무 맛있어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구나. 그 생선이 바로 오늘날에도 유명한 영광 지역의 특산물인
굴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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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류근) 근데 제가 인터넷에서 이자겸을 검색해 봤더니 아주 재미있는 연관 검색어가 나와요. 영광 굴비가 나오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이자겸이 영광에서 말린 생선을 맛있게 먹고 난 다음에 비록 귀양을 온 몸이지만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지어 줬다는 겁니다. 그 생선이 바로 영광 굴비고요. 굴비가
한자로 굽힐 굴(屈)자에 아닐 비(非) 자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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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척준경도 탄핵되어 귀향을 갔다고 하는구나.
…
자, 이번에는 묘청의 난을 이야기해보자꾸나. 묘청이 원래는 난을 일으킨 것은 아니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주장했대. 서경은
오늘날 평양인데, 묘청이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하는 것은 풍수지리상으로도 좋고 여진을 공격해서 고구려
영토 회복을 하자고 했어. 시인으로 유명한 정지상, 백수한
등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지지했단다. 그에 반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반대를 했지.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에 와서 서경의 입지 조건을 함 봐달라고 했고, 인종은
실제로 서경에 가려고 했다는구나. 그런데 가는 길에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대. 그리고 이 천재지변은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지 말라는 의미라면서 서경 천도는 안 된다고 했단다. 그렇게 되니 묘청은 난을 일으켰단다. 묘청은 서경 천도에 진심이었나
보구나.
이 소식을 들은 김부식은 서경천도운동을 지지했던 정지상, 백수한을
왕명도 없이 참수해 버렸다고 하는구나. 당시 정지상, 백수한은
개경에 있었거든. 이는 분명 과잉 진압이었는데, 정지상에
대한 사적 복수라는 이야기도 돌았다고 하는구나. 묘청의 난은 묘청의 측근 조광의 배신으로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단다. 조광이 묘청을 죽였거든. 뒤늦게 조광은 자신도
처벌 받을 것을 알고 약 일 년 간 저항했지만, 토벌대장 김부식이 이끌고 온 부대에서 패배하고 말았단다.
삼국사기의 지은이로만 알고 있던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토벌대장이기도 했단다. 예전에 아빠는 다른 역사책에서 알게 되었는데, 정지상까지 자기 마음대로
죽였다니 이미지가 더 안 좋아졌구나. 묘청의 난이 1135년에
일어났는데, 묘청의 난이 진압된 이후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기 시작해서 1145년에 완성했다고 하는구나.
…
2.
제18대 왕 의종 때가 되면 고려 문신들이 무신들을 멸시하는 그런
시대가 된단다. 지위가 낮은 문신들이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무신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하극상도 빈번했어. 의종은 이런 것을 좀 조정해야 하는데, 문신들하고만 술파티를 벌이는
등 주지육림에 빠졌고, 의종과 문신들의 파티에 볼거리로 무신들이 수박희라는 결투 경기를 벌여야 했단다. 무신들도 같은 신하인데 열이 받겠지. 불만이 고조된 무신들 중에
하급관리였던 이의방, 이고가 난을 일으키게 되었단다. 이의방과
이고는 하급관리다 보니 고위급 무신 인사인 정중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정중부가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면 난이 시작되었단다.
무신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의종을 지켜줄 이가 누가 있겠어. 의종은 무신들의 의견을 모두 받아주기로 했단다. 그런데, 의종을 보좌하던 환관들이 무신을 치려는 계획을 세웠어. 그런데 환관들
중 한 명이 배신을 하면서 무신들이 환관의 계획을 알게 되어 오히려 환관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단다. 무신들은
환관뿐만 아니라 문신들도 죽였는데, 3일 동안 140에서 150명을 죽였다고 하는구나.
무신에 의해 의종은 폐위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갔고, 무신들은 의종의
동생을 왕위에 세웠는데 그가 제19대왕 명종이란다. 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세워진 왕으로 허수아비 왕이었어. 무신들은 무신회의기구인 중방을 만들었고, 이 중방이 최고권력기구가 되었어. 무신들은 논공행상을 따지다가 자기들까지
다투게 되는데, 이의방은 이때 반대파를 숙청했는데, 함께
무신의 난을 주도했던 이고도 이때 죽였다고 하는구나.
무신들의 내분을 지켜보던 문신 김보당이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켰는데 금방 진압이 되었단다. 그런데 김보당은 죽기 전에 이야기하기를 모든 문신들이 난에 참여했다고 했어.
그래서 무신들은 또다시 많은 문신들을 죽였단다. 학살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이때 이의방의 부하 이의민은 유배가 의종을 찾아가 죽였다고 하는구나.
…
이의방은 무신의 일인자가 되어 권력을 휘둘렀어. 하지만 이의방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단다. 정중부와 아들 정균이 이의방을 제거하면서 실권을 잡았어. 이때 정중부의 나이가 일흔이 넘었어. 무신들 사이에서도 일흔 넘어서도
권력을 탐내는 정중부를 좋게 보지 않고 등을 돌리기 시작했어. 5년간 이어진 정중부 정권은 25살 청년장수인 경대승에 의해 끝나고 만단다. 경대승은 정중부를
죽이고 권력을 잡았어. 하지만 경대승은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경대승의 꿈에 죽은 정중부가 나온 다음 병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더구나. 경대승이 죽고 나서는 명종의 명에 따라 이의민이 정권을 잡았고, 이의민
권력은 13년간 이어졌단다.
이의민은 최충헌에 의해 죽고 말았어.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이후 최씨
무신정권이 4대 62년간 이어지게 된단다. 그런데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는 것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는구나.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는 일로 시작된 싸움이 커져서 최충헌이 이의민까지 죽였대.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명종에게 봉사십조라는 개혁안을 제안했대. 그런데 이 명종이라는 왕은 무신정권 초기 이의민이
허수아비로 세운 왕인데 여전히 왕을 하고 있구나. 무신정권을 잡은 이들은 벌써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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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신병주) 흔히 하는 말로 “가늘고 길게 살자”라는 신조에 딱 맞는 왕이에요. 명종이라는 왕은 1170년에서 1197년까지 무려
28년간 재위했어요. 우리 역사에서 왕권이 없이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으로는 아마 1위일 겁니다. <고려사절요>를
쓴 사관들의 평가가 핵심을 찌르죠. “왕은 천품이 아주 나약하고 여러 번 변고를 겪어서 놀랍고 두려워하여
아주 심기가 약했다. 그래서 모든 군국의 기무는 무신들에게 견제 되었다. 심지어 회노애락까지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했다. “슬프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명종으로서는 자기가 왕위를 유지하는 한 집권 세력은 누구로 바뀌어도 상관없다고 적절하게 타협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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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동생 신종을 왕위에 세웠단다.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는 신종의 며느리, 그러니까 태자비를 이혼시키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에 세우려고 했어. 이 일로 최충헌과 갈등을 빚었단다. 결국 최충헌과 최충수는 싸우게
되었고, 최충수는 최충헌에 의해 척살당하고 말았단다.
…
무신 정권이 문신의 멸시를 참지 못하고 권력을 잡긴 했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은 내지 않고 문신들처럼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탐욕을 부렸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당시에도 역사적으로도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 같구나. 이 무신 정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면서 오늘 편지를 마치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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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80)
(이익주) 무신 정변을 세 가지 다른 층위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신
정변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의종의 측근 가운데 무신과 기타 세력 간의 싸움으로 볼 수 있고, 조금
멀리서 보면 무신 전체와 문신 전체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멀리서 보면 무신 대부분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문제까지 생각이 미치죠. 그 당시 고려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중하층을 구성했던 지방의
향리 계층이 무신 대부분의 원류입니다. 향리들이 서울로 올라가 무신이 되고, 무신 정변을 통해 권력을 드디어 장악한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무신
정변으로 일어난 권력 교체를 중하층의 무신이 상층의 문신들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무신 정변은 권력의 상하이동을 의미하고요. 이때 권력을
잡은 무신들, 그리고 그 공급원이 되는 지방의 향리층이 이후 전개되는 고려 후기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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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고려의 11세기는
정변과 전쟁으로 시작된다.
책의 끝 문장: 그래야 후세의 평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죠.
(박금수) 별무반은 기병을 강화한 특별 군대입니다. 크게 기병인 신기군과 보병인 신보군으로 나누고, 그 외에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전문 부대들이 있습니다. 강한 활을 쓰는 경궁군이 있고, 노 하나가 아니라 두세 개를 연결한 강력한 노를 쓰는 정노군이 있죠. 또한 돌을 그냥 던지기도 하고 돌팔매에 끼워 먼 거리를 던지기도 하는 석투군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각, 즉 뿔로 만든 악기를 입으로 부는 이 대각을 불어 신호를 보내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옆에서 죽어 나가는 매우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끊임없이 대각을 불어 추정되는 도탕군이 있는데, 도탕군은 돌격 부대인데도 기병이 아니라 보병이었어요. 그래서 이 도탕군의 임무는 적이 공격대형을 제대로 형성하기 전에 돌입해 분탕질을 치며 적의 기세를 꺾는 소수 정예부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P55
(최태성) 이자겸의 본관이 어딘지 아십니까? 인주입니다. 인주 이씨죠. 인주가 어디냐면 지금의 인천이에요. 인주 이씨는 대대적으로 왕실과 혼인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던 대표적인 외척 세력인데, 가계도를 보면 정말 복잡합니다. 순종, 선종, 예종, 인종에게 시집을 간 인주 이씨 집안의 딸이 총 열 명이나 됩니다. 그중에서도 제16대 왕 예종과 결혼 사람이 이자겸의 둘째 딸 문경태후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가 바로 제17대 왕 인종이 되지요. - P85
(신병주) 묘청의 난을 이제까지는 개경파 대 서경파 또는 문벌 귀족 세력 내부의 분열과 같은 식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사실은 국제 정세의 변화도 매우 중요한 지표입니다. 특히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수립되는 과정의 현장에 있었던 김부식이라는 인물이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고려가 나아갈 길을 어떻게 고민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지금도 그렇지만, 국내 정세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도 함께 고려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 P144
(이익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용어를 정리해 볼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환관은 거세한 남성이고, 궁궐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내리라고도 하는데, 고려 시대에는 내시와 환관이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환관은 우리가 아는 그 환관인데, 내시는 거세한 남성이 아니라 국왕에게 총애받는 젊고 유능한 문신 관료들입니다. 내시들은 늘 왕과 함께 있으면서 지근거리에서 왕을 시종하는 사람들이죠. 문벌 귀족의 자제들 또는 과거에 급제한 유능한 젊은 관료들은 내시가 되는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는 환관과 내시가 다른 개념인데, 의종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친위군뿐 아니라 환관마저도 권력자로 만들어 놓아 그들과 함께하는 측근 정치를 해 왔던 것입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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