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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 왕건에서 서희까지 ㅣ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을 마무리하고 올해는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단다. 아빠가 역사에 취약한 편인데, 특히 고려는 더욱 그렇단다. 조선시대에 책이나 영상 매체를 다뤄서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주워 들은 것들도 있곤 한데, 고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단다. 고려를 다룬 책들을 읽은 적도 있긴 한데, 아주 오래 전이라서 기억에서
희미해졌어. 그래서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을 읽으면서 고려 500년 역사를 정리해보려고 했단다. 중간중간 재미있는 내용들이 있으면 너희들에게도 이야기해주고 말이야.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는 모두 4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오늘은 1권을 이야기해줄게. 자
그럼 고고~
1.
고려 이전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가 있었고, 통일 신라 말기 정권이
무너지면서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생겨나면서 우리나라는 전쟁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단다. 먼저 후백제부터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후백제는 견훤이라는 사람이 세웠는데, 진훤이라고
읽기도 한대. 지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구나. 견훤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를 했다고 볼 수 있어. 당시 지방의 권력을 잡고
있는 호족이 되었거든. 견훤은 전라지역의 장군으로 복무하다가 전라지역을 지반으로 후백제를 건국했단다. 자신의 고향이 아닌 곳에서 나를 세운 것이 특이했는데, 그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인지 견훤은 반신라정책을 펼쳤단다. 무너져가는 신라의 반기를 든 것이지.
...
후고구려는 승려 출신 궁예라는 건국했는데, 그 밑에 있던 왕건이 민심을
잃은 궁예를 처단하고 고려라는 나라를 세웠단다. 918년이었어. 왕건의
아버지는 호족 출신으로 금수저라고 할 수 있어. 고려를 세운 왕건은 견훤과 달리 친신라 정책을 펼쳤단다. 당시 신라는 이름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고, 후백제와 고려의 기세가
비슷하였단다.
견훤과 왕건은 대구 지역에서 큰 전투를 벌였는데, 왕건은 이곳에서
대패를 하고 휘하에 있던 장군 여덟 명이 죽었다고 했어. 그들이 전투를 벌여 여덟 명이 죽은 산을 그때부터
팔공산이라고 했다는구나. 전세가 견훤으로 넘어오나 했는데, 견훤은
집안이 화목하지 못했나 봐. 견훤의 아버지가 상주 지역의 호족으로 있었는데, 왕건에게 귀부하였다고 하는구나. 귀부라는 말은 스스로 와서 복종하는
것을 뜻한단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이번에는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왕건에게 투항하는 일이
벌어진단다.
후백제를 세우고 왕건과 전투에서 대승을 한 견훤이 아들에게 쫓겨났다고? 견훤이
왕위를 둘째 아들에게 주려고 했는데, 이에 첫째 아들 신검이 반란을 일으켰던 거야. 그리고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죽이려고 하자 견훤은 왕건한테 도망을 간 것이지.
후백제는 이미 집안 싸움으로 인해 자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대세는 고려로 넘어왔어. 신라도 고려에 투항했지. 고려는 대대적으로 신검의 후백제를 공격하였고, 결국 신검은 항복하고 만단다. 왕건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게 돼. 견훤의 집안 싸움이 없었다면 어쩌면
견훤의 후백제가 후삼국을 통일했을 수도 있었던 거야. 그랬다면 그 이후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평행우주가 있다면 후백제가 통일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볼 수 있을까?
2.
우리나라 왕 중에서 가장 많은 아내를 둔 왕은 누구였을까? 그건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이야. 무려 29명의 아내를 두었대.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던 그 즈음 지방 호족 세력이 엄청나게 컸고,
그들과 관계 개선을 하기 위해서는 정략결혼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는구나. 그래서 그렇게
많은 아내를 두었다고 하는구나. 그래도 많아도 너무 많은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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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이익주) 제가 왕건을 위해
변명을 좀 하겠습니다. 너무 개인사적 측면으로만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요. 왕건이 스물아홉 명의 아내를 거느린 것, 사실은 거느렸다고 하기도
뭣하지만, 아무튼 스물아홉 번이나 결혼한 것은 여자가 좋아서라기보다는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치적인 계산을 한 것이죠. 왕건은 그 자신이 호족이고, 전국의 호족들은 왕건과 대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경력을 시작했죠. 이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견훤과 싸우며 신라를 계속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각 지방에서 독립 세력으로 존재하던 호족들의 지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력한 호족과 가장 믿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동맹을 맺는 방법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아까 지도에 봤던 것처럼 전국 곳곳에
있는, 각 지역의 가장 유력한 호족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그 호족의 지지를 끌어내려 합니다. 그 결과 스물아홉 번이나 결혼했던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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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은 29명의 아내를 통해 아들
25명, 딸 9명을 낳았대. 벌써 왕위 계승 싸움의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조선에서는 왕을
이을 아들을 태자라고 하는데, 고려에서는 정윤이라고 했다는구나. 제1왕후는 아들이 없어서 제2왕후의 장남 왕무를 정윤으로 삼았는데, 제2왕후는 배경이 별로라서 세력도 약했다고 하는구나. 배경도 좋고 세력이 좋기로는 제3왕후가 좋은데, 제3왕후는 아이도 많이 낳았다고 하는구나. 아들 다섯에 딸 둘이었지.
943년 5월, 왕건이 67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단다. 일단 제2대 왕은 왕무가 되었어.
혜종이었지. 그런데 혜종은 제3왕후의 아들들인
왕요, 왕소와 대립을 이뤘어. 혜종은 세력이 약했는데, 몸도 허약했단다. 거기에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아우들도 있고...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진단다.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혜종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역모를 꾸민 거야. 왕의 장인이 역모를 꾸민다? 뭔가 석연치 않구나. 아무튼 왕규는 혜종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다고
했어. 그리고 이 난을 혜종의 동생인 왕요가 진압을 했다고 했대. 일명
왕규의 난이지.
하지만 이것은 왕요가 다 꾸민 것으로 추정된대. 왕요가 자신의 기반을
더 다지기 위한 작전.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 일이 있고
얼마 안 되어 혜종 마저 34살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단다. 즉위한
지 2년만이었어. 그런데 혜종에는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요가 왕규의 난을 진압한 공을 들어 왕위에 오르게 된단다.
그가 고려 3대 왕 정종이란다. 정종은
왕위에 오르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어. 백성들과 호족들이 모두 반대를 했지. 그러면서 호족들은 왕요의 동생 왕소 밑으로 줄을 섰단다. 그런데
정종도 젊은 나이에 죽게 돼. 기록에 의하면 번개에 놀라 병을 얻게 되어 죽었다고 하는데, 의문의 죽음이지. 그리고 후계에 자신의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왕소에게 왕을 물려주었단다. 왕소가 제4대 왕이 되었으니
광종이란다. 고려 광종 왕소와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 동생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그 이전 왕이 고려와 조선 모두 정종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고려의
정종과 조선의 정종이 닮은 점도 지적을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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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110)
(신병주) 고려의 정종과
조선의 정종이 정말 닮았다고 했잖아요. 왕으로 재위한 기간은 두 사람 다 매우 짧아요. 근데 조선의 정종은 동생 태종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 무서운 동생이 정몽주와, 정도전, 방석 등을 죽이는 것을
다 봤거든요. 자기까지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싶으니까 동생에게 왕위를 깔끔하게 물려주고 격구와 사냥
같은 취미 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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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 4대왕 광종은 예전에 시험 문제에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되는구나. 노비안검법과 과제제도 시행으로 말이야. 광종은 26년간 재위하면서 고려라는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왕권 강화하는데 힘썼다고 하는구나. 노비안검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해주는 것으로, 호족들이
관리하던 노비들을 양인으로 풀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호족의 반발이 심했다고 하는구나. 노비안검법을 시행한
것이 광종 7년이라고 하는데, 왕위에 즉위한 7년 동안 호족들의 눈치를 보면서 왕권을 강화를 해서 팡 터뜨린 것이란다. 광종은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를 사람을 등용해서 그 사람의 조언을 정책으로 많이 삼았다고 하는구나.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과거제도인데, 이 때 만들어진 과거 제도는 인재 등용의 산물로, 조선말까지 약 1000년간 이어지게 된 것이란다.
그리고 관복을 제정하여 위계 질서를 세우려고 했고, 호족 세력의 힘을
빼기 위해 최측근 호족도 숙청했다는구나. 워낙 많은 사람을 죽여서 광종의 ‘광’이 빛날 광(光)이 아니라 미칠 광(狂)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대. 그래서 고려 광종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의 제목도 ‘빛나거나
미치거나’였다나… 그런 드라마가 있었구나.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제목인데…
…
고려 시대 유명한 사람, 어쩌면 악명 높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천추태후란
사람이 있었단다. 예전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었는데, <천추태후>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많이 유명해졌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이
사람 가족 관계가 좀 복잡하단다. 고려 초기에는 왕족 내에서 근친혼이 일상이라고 하긴 하지만, 천추태후는 복잡해도 너무 복잡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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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신병주) 천추태후는 드라마로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웬만큼 역사를 아는 사람조차도 잘 몰랐던 인물입니다. 제5대 왕 경종에게는 아내가 되고,
제6대 왕 성종에게는 동생이 되고, 제7대 왕 목종에게는 어머니가 되고, 제8대 왕 현종에게는 이모가 되는 인물이에요. 천추태후를 거치지 않고는
고려 시대의 왕 네 명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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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왕은 경종이고, 아내로는
헌애왕후 황보씨와 헌정왕후 왕보씨 이렇게 둘이었는데, 둘은 자매라고 하더구나. 이 중에 헌애왕후 황보씨가 바로 나중에 천추태후가 되는 사람인데, 왕건의
손녀이기도 했대. 경종은 즉위한 지 1년만에 죽고 동생이
왕위에 오르는데 제6대 왕 성종이란다. 헌애왕후 황보씨는
아들이 하나 있었고, 남편이 죽고 난 다음 천추궁에 머무르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곳에 있으면서 승려 출신 김치양이라는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었대. 그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김치양을 유배 보냈다고 하는구나.
이때까지는 조용하게 있었는데, 성종이 죽고 헌애왕후 황보씨가 낳은
경종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제7대 왕 목종이었어. 당시
목종의 나이가 18살이라서 자신이 직접 친정을 해도 될법한데,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였단다. 그러면서 유배 갔던 김치양을 데리고 오기도 했어. 다시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사랑을 하게 되었고, 천추태후는 마흔 살에 아들을 낳았단다. 그리고 목종은 자식들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동성연애를 했다는구나. 오호… 이런 상황이 되자,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낳은 아들을 왕위에 세우려고 했는데, 왕족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단다.
왕족들은 대량원군이라는 사람을 다음 후계자로 세우자고 했어. 그런데
대량원군이라는 사람도 흠이 있는 사람이었어. 대량원군은 누구냐면, 경종의
둘째 부인이자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 황보씨가 숙부인 왕욱과 불륜으로 애를 낳았는데 그 애가 바로 대량원군이었어. 불쌍했던 것은 헌정왕후 황보씨는 대량원군을 낳다가 그만 죽었단다. 천추태후가
낳은 김시양의 아들과 대량원군… 누가 후계자가 되었을까?
…
이때 막강 군대를 가지고 있던 강조라는 사람이 정변을 일으켰단다. 그래서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어. 그가 제8대왕
현종이란다. 강조라는 사람이 후계 정리를 싹 해버린 거지. 강조는
목종, 김치양, 천추태후이 낳은 김치양의 아들을 모두 죽였단다. 그리고 천추태후는 멀리 유배를 보냈어. 그렇게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천추태후의 세상도 막을 내렸단다.
4.
고려 초기 외세 침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거란이란다. 우리나라
북쪽 이민족들인 거란족, 여진족, 말갈족, 만주족 등이 헛갈리곤 하는데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해 주어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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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이익주) 거란과 여진은 분명히 다릅니다. 거란은 몽골 계통의 유목민입니다. 우리가 아는 요라는 나라를 건국하죠. 여진은 거란보다는 우리와 좀
가깝습니다. 발해가 건국되었을 때 고구려의 유민이 지배층이 되고 말갈족이 피지배층이 됐다고 알고 있는데, 그 말갈이 발해가 망하고 거란에 점령된 다음에 여진으로 불린 거죠. 그리고
이 여진이 1115년에 금을 건국하고 더 나중인 1616년에는
후금을 세웠다가 1636년에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만주족으로 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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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3년 성종 때 거란의 침입이 있었어. 신하들 대부분은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어 땅을 떼어주는 것을 지지했는데, 서희라는
사람은 홀로 반대를 했단다. 그리고 서희는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을 짓고, 오히려 강동6주를 얻어냈단다. 전쟁
한번 하지 않고 말로써 땅을 얻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던가. 서희는 강동6주를 얻는 대신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과 사대관계를 유지한다는 조건이
있었대. 하지만 말이 쉽지 송과 관계를 그렇게 쉽게 끊게 되면 이번에는 송으로부터 공격을 받지는 않을까? 그런 것을 대비해서 서희는 송나라에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대. 거란의
침입에 대해 송나라에게 도움을 청하는 척하고, 송나라도 도와줄 여력이 없어서 고려를 도와주지 않게 되었고, 고려는 송에서 도와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했대. 이게 다 너희 송나라 때문인 것처럼 이야기해서 송나라가 책임감을 느끼게 말이야. 정말 멋진 작전이구나.
….
강조의 정변의 이후 천추태후가 물러나고 목종이 폐위되었을 때 거란은 이것을 빌미로 고려를 쳐들어 오게 되는데
이것을 거란의 2차 침입이라고 한단다. 강조라는 사람이 강동6주에서 방어를 했지만 고려군은 패배를 하고 개경까지 함락되는 위기에 빠지게 된단다. 당시 왕이었던 현종은 나주로 천도를 한단다.
여기까지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의 이야기란다. 고려 역사도 다이나믹하고 흥미진진하구나. 편지를 쓰기 전에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대략 해주었더니 너희들도 재미있게 들었잖니. 이 책에서 읽은 기억이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고려 역사에 대한 지식으로 머리가 꽉 찬 느낌이구나. 조만간 2권도
읽고 이야기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신라 말 정치는 도탄에 빠졌고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책의 끝 문장: 개경은 불바다가 됐고, 서희도 죽고 양규도 죽고, 그럼 고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익주) 고려가 건국된 지 100여 년 정도 지난 다음에 김관의라는 사람은 <편년통록>을 씁니다. 이 책에는 왕건의 조상에 관한 설화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용왕 등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가 계속 나옵니다. 이것은 왕건의 집안이 예성강을 통해 개성에서 중국의 산동반도를 왕래하며 무역했다는 것을 암시하죠. 그런데 작제건(왕건의 할아버지)이나 그 선대가 활동하던 시기를 거꾸로 추론해 보면 남쪽에서 장보고가 활동하던 시기와 거의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 시대에 남쪽 해상에서 큰 세력을 이루었던 장보고와는 별도의 독립된 세력으로 왕건의 가문이 활동했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 P20
(이익주) 안 주는 것보다는 주는 게 나았겠죠. 그리고 왕건의 가장 큰 선물은 호족이 지방에서 가지는 세력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왕건이 견훤보다 훨씬 앞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건은 자기에게 귀부해 오는 호족들의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 주겠다고 약속하죠. 이처럼 왕건은 중폐(重幣), 즉 선물을 많이 하고, 비사(卑辭), 즉 자기를 낮추는 말을 쓰는 태도를 보입니다. 될 수 있으면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거죠. 왕건도 호족이거든요. 여러 가지 동맹의 관계로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는 정책이 왕건에게서 나왔던 것이죠. 견훤 역시 그 지역의 호족들과 연합도 하고 결혼 정책도 펼치지만, 호족들을 지배하려는 속성이 왕건보다 강한 편이었습니다. 여기서 왕건과 견훤의 차이가 나타나죠. - P39
(신병주) 조선 시대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기록을 보면 "정도전 등이 먼저 군사를 준비했으므로 우리는 정당방어다."라는 식으로 나오거든요. 근데 정작 난을 일으켰다는 정도전 등에게서는 군사적인 움직임을 전혀 찾을 수가 없죠. 그래서 왕규의 난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겁니다. "왕규가 난을 일으켰으므로 우리는 정당하게 진압한 거다." 그런데 실체가 없죠. 하지만 역사는 왕규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남았고요. - P98
(이익주) 고려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라는 문제는 여성의 지위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지요. 재산상속 문제부터가 조건과는 다릅니다. 고려에서 부모가 사망하면 제산이 어떻게 상속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사정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원칙은 "자녀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나누어 준다."입니다.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준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부모에 대한 의무도 똑같이 요구하는 것이고요. 예를 들어 제사는 조선 시대처럼 장남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지냅니다. 그리고 부모가 살아 있을 때 봉양하는 의무도 장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녀에게 똑같이 있습니다. - P157
(신병주) 거란의 제1차 침입 당시의 상황과 제2차 침입 당시의 상황을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제1차 침입 당시의 고려는 성종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왕권이 상당히 안정돼 있었죠.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는 상황이니까 서희와 같은 명장을 배출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져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제2차 침입 때는 강조라는 인물이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정치 체제가 불안정해졌죠. 결과적으로 크게 보면 정치가 안정되고 지지 기반이 확실했을 때는 국방이라든가 외교에서 힘을 받을 수 있는데, 제2차 침입 때는 고려 자체가 정치적으로 무너진 것도 패배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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