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5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 11월초 단풍 구경도 할 겸 역사 탐방도 할 겸 경주 여행을 계획했잖아. 그런데 여행 며칠 앞두고 우리 집에 코로나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다 취소됐지. 그리고 회복을 나서, 좀 춥지만 경주에 가기로 했잖니. 몇 달 전에 부여로 백제 역사 탐방 다녀오고 이번에는 경주로 신라 역사 탐방 다녀오고너희들에게 신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려고, 오래 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을 찾아 읽었단다. 경주가 가기 전에 다 읽었으면 너희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을 텐데, 절반 정도만 읽고 말았지. 여행을 다녀오고 나머지를 다 읽었고

신라의 역사는 거의 천 년 동안 이어졌단다. 우리나라에 있었던 나라 중에 고조선을 빼면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야. 그렇다 보니 왕도 56명이나 된단다. 그걸 한 권의 책으로 엮었으니 상당히 축약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라를 비롯한 삼국 시대의 역사 기록이 많지 않았어. 그래서 몇몇 사건들은 지은이의 합리적인 추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단다. 그런 걸 감안하고 신라의 역사를 들여다 봐야겠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단다. 하지만, 당시 신라도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칠 밖에 없던 상황이었단다. 그리고 당시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가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던 시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적국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삼국 통일은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할 것 같구나.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신라의 전성기가 오기 전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시대에 통일을 못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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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하지만 신라의 입장에서 헤아려 본다면 생각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지금의 경상도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 신라가 북쪽의 강대한 세력인 고구려와 최대의 라이벌 백제, 끊임없이 침략을 자행하는 왜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시엔 지금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를 민족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던 시대가 아니었음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 별개의 나라로 오직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지상과제였고, 신라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신라가 백제의 땅을 지키지 못하고 신라 땅마저 당나라에 병합됐더라면,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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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는 어떤 사람들이 세운 나라일까. 신라는 박혁거세가 세운 나라라고는 하지만,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중국 연나라 유민과 고조선 유민들이 진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와서 지금의 경상도 지역의 진한의 한 부족국가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이 신라의 시작이라고 보면 될 것 같구나. 당시 한반도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존립하고 있었는데, 마한이 가장 강력한 나라여서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이해하면 돼. 작은 부족 국가였던 신라가 세력을 점점 팽창하면서, 소위 마한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는데 그걸 주도한 이가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였단다. 기원전 57년부터 약 60년간 재위를 했다고 하는구나. 십대 나이에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재위 22년인 33살 때 서라벌에 금성을 쌓고 나라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대. 말년에는 반란이 일어나서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어.

2대왕은 박혁거세의 차남인 남해왕인데 20여 년 재위했단다. 낙랑군이 자주 침략하여 고생했는데, 이때 사위인 석탈해가 낙랑군을 격퇴하여 공을 세웠단다. 3대왕은 남해왕의 아들 유리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실제 재위 기간은 33년인데, 실제로는 초반 20년만 왕 역할을 하고, 나머지 14년은 석탈해가 집권했을 거라고 하는구나. 유리왕은 관직을 만들고 나라의 기틀을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권력의 추가 석탈해에게 넘어가 있었어. 유리왕부터 왕의 호칭을 이사금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 자국이라는 뜻이 담겼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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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3)

탈해는 훌륭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면서 떡을 깨물어 유리와 자기의 이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그 결과 유리의 이 수가 더 많자, 탈해는 자기의 측근들과 함께 유리를 받들었다. 그후로 이 자국이라는 뜻의 이사금을 왕호로 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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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왕은 석탈해란다. 신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왕을 지낸 성씨가 박씨, 석씨, 김씨 이렇게 셋이란다. 사이 좋게 번갈아 하면서 한번씩 한 것은 아니고, 우연찮게 성씨가 바뀌게 된 것이란다. 석탈해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2대 남해왕의 사위였고,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권력을 잡고 있는 실질적인 왕이었단다. 석탈해는 석씨 왕의 시조로 이 사람 또한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구나. 유리왕 20년때부터 정권을 잡은 석탈해는 이제 막 개국한 가야와 전쟁을 하기도 했고, 백제에서 요구한 조공을 거절해서 백제와도 전쟁을 벌였단다. 석탈해가 아들이 없고 김알지를 양자로 들였는데, 김알지라는 사람은 김씨 왕들의 시조가 되는 사람이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김알지 또한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구나. 김알지는 백제에 의해 망한 마한의 왕족으로 추정된다고 했어.

5대왕은 파사왕으로 3대 유리왕의 차남이란다. 비록 왕위에 올랐지만, 권력은 김알지계와 석탈해계가 잡고 있었대. 파사왕의 왕비는 김알지의 손녀라고 하는구나. 6대왕은 지마왕으로 말갈의 외부 공격을 잘 막아내고 안정을 찾았지만, 지진, 가뭄, 메뚜기 떼 등 자연재해가 잦았대. 이런 자연재해는 지마왕 때뿐만 아니라 신라 역사에 걸쳐서 빈번하게 발생했단다. 최근에는 없는 우박, 메뚜기 떼 등의 피해가 많았다는 기록이 있구나.. 7대왕은 일성왕으로 유리왕이 말년에 낳은 아들이란다. 태자이긴 했지만 유리왕이 죽었을 때 너무 어리고 석탈해가 막강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왜국으로 망명을 갔다가 지마왕이 후세 없이 죽게 되자, 신하들의 추대로 80살이 거의 다 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왕이 되었다고 하는구나.

8대왕은 아달라왕으로 반란군에 위해 죽고 마는데, 충격적인 것은 반란군의 주동자 중에 왕비인 내례부인 박씨(지마왕의 딸)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내례 부인 박씨는 9대왕이 되는 벌휴왕의 차남인 이매라는 사람과 불륜 사이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달라왕이 이매를 살해앴단다. 이런 사유로 내례 부인도 반란에 참여했던 것 같구나. 9대왕은 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벌휴왕이란다. 벌휴왕은 석탈해의 후손으로 석씨였어. 석탈해가 왕이 되었을 때는 왕의 사위로써 한시적으로 왕이 된 것인데, 벌휴왕은 반란으로 왕이 되었으니, 벌휴왕부터는 석씨들이 왕위를 물려받아 약 172년간 이어진다고 하는구나.(184~356) 벌휴왕이 왕이 된 것도 다 내례 부인이 관여를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는구나. 10대왕은 내례부인과 이매 사이에서 태어난 내해왕이었단다. 11대왕 조분왕, 12대왕 첨해왕으로 이어진단다.


2.

김알지가 김씨 왕의 시조라고 했는데, 아직 김씨는 왕위에 오르지 않았단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김씨 왕들의 시조이지만, 왕은 아니었던 거야. 성씨 3개가 신라의 왕위를 차지했지만, 삼국 통일 및 통일 신라를 열고 전성기를 누렸던 것은 모두 김씨 왕들이란다. 그 김씨 왕들의 첫 번째 왕이 바로 13대 미추왕이란다. 12대왕 첨해왕이 급사하고 신라들의 추대로 미추왕이 왕이 되었는데, 미추왕은 김알지의 6대손이란다. 261년부터 284년까지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의 신뢰를 얻었다고 하는구나.

14대왕 유례왕은 다시 석씨가 되었는데, 유례왕은 11대왕 조분왕의 아들이자, 13대 미추왕의 사위일 것이라고 추정된다고 하는구나. 백제와 왜와 대립이 점점 심해지던 시기였대. 15대왕 기림왕은 조분왕의 차남이란다. 탈해왕부터 쓰던 계림이라는 나라이름을 원래 이름이던 신라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구나. 16대왕 흘해왕은 내해왕의 후손으로 10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대. 왜와 사이가 안 좋아지고 백제와 화친을 맺는 외교 정책을 펼쳤고 약 45년간 재위를 했지만 후세를 남기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16대 흘해왕으로 석씨 왕조가 끝나고 17대왕 내물왕이 김씨 왕조를 다시 한번 열게 된단다. 역사의 기록에는 13대 미추왕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지만, 연대가 맞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내물왕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는구나. 그런 내물왕이 어떻게 왕위에 올랐을까? 당시 흘해왕의  석씨 세력과 김씨 세력의 알력 다툼이 있었고, 김씨 세력이 그 싸움에서 승리를 해서 김씨인 내물왕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하는구나. 내물왕은 교과서에도 나와서 익숙한 왕이로구나. 내물왕이 집권할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이 전성기를 다지면서 고구려 고국원왕과 한판 싸우고 있던 시기였단다. 내물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을 주시했어. 하지만 왜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왜를 몰아냈단다. 그 이후 고구려에 조공을 받치는 신세가 되었지만 말이야. 내물왕부터 왕의 호칭을 이사금이 아닌 마립간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구나.

18대왕은 실성왕으로 내물왕의 사촌동생이라고 하는구나. 내물왕의 아들이 너무 어려서 사촌동생이 왕위에 올랐대. 실성왕은 왕이 되기 전에 고구려와 전투에 참여했다가 인질로 잡혀있다가 귀국했대. 왕이 되자 내물왕의 아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어. 그래서 내물왕의 아들이 자라자 그를 고구려 인질로 보내서 죽이려고 했지만, 오히려 내물왕의 아들이 실성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19대왕 눌지왕이란다. 눌지왕은 41년간 재위했는데, 이때 국제 정세가 복잡했단다. 당시 장수왕이 집권 중인 고구려와 사이가 안 좋고, 왜의 노략질도 계속되었대. 내물왕 때 처음 사용하던 마립간이라는 호칭을 왕의 정식 명칭으로 정했다고 하는구나.

20대왕 자비왕은 눌지왕의 장남으로 왜나라가 계속 침략해와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국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단다. 그리고 가야금 명인 백결선생이 활약하던 시기가 이때라고 하는구나. 백결 선생이 이름이 백결인줄 알았는데 아니더구나. 본명은 박문량이고 신라의 문신 박제상의 막내아들이라고 하는구나. 박제상이라고 하면 <부도지>를 쓴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백결 선생의 아버지였구나. 21대왕 소지왕은 자비왕의 3남이고, 임기 내에 재해, 재난, 화재 등이 많았고, 왜의 침략도 끊이질 않아 민심을 많이 잃었다고 하는구나. 백제 동성왕과 협력하여 고구려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는구나.

22대왕 지증왕은 내물왕의 증손이란다. 왕비는 연제 부인인데 똥이 굵어서 왕비가 되었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단다. 지증왕은 이것저것 개혁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순장을 금지한 것이란다. 순장은 사람이 죽으면 하인들도 같이 묻는 잔인한 장례방법인데, 그것을 금지시켰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경작법으로 널리 알려 농사에 이롭게 했대.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에도 나오는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 복속을 한 것도 지증왕 때라고 하는구나. 그런데 아빠는 지금껏 이사부의 성이 이씨 인줄 알았는데, 이사부는 전체가 이름이고 성씨는 박씨라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박이사부.  지증왕 때부터 왕이 죽으면 왕에게 칭호를 붙여는 묘호를 처음 사용했다고 하는구나. 23대왕은 지증왕의 장남인 법흥왕이란다. 이제 계속 교과서에서 많이 본 왕들이 나오고 있구나. 법흥왕은 514년부터 540년까지 재위를 했단다. 국가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개혁을 많이 했대. 신라의 최고 관직으로 알려진 상대등을 이때 처음 도입을 했어. 영토 확장도 활발히 했고, 가야도 병합을 했단다. 다음 왕인 진흥왕이 신라의 전성기를 열 준비를 해준 것이라고 볼 수 있어. 법흥왕이라는 왕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했단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눌지왕 때 묵호자에 의해서이고, 불교의 공인은 법흥왕이고 그 공로로 묘호가 법흥왕이 된 것이란다. 법이 불교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뜻하는 것이든. 이차돈이 법흥왕에게 자신을 죽임으로써 불교 공인을 해달라 요청했고, 왕은 만류했으나 계속된 요청으로 아차돈을 처형했단다. 그리고 그의 목에서 흰 젖이 나오고 꽃 비가 내렸다는 전설이 있단다. 그런데 이차돈도 성씨가 이씨가 아니고 박씨라고 하는구나. 박이차돈.

24대왕은 신라왕 중에 가장 유명한 진흥왕. 이름은 삼맥종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도 처음 들어봤어. 법흥왕의 아우 김입종의 아들인데 7살에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구나.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엄마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했는데,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공주란다. 가족관계를 이야기하다 보면 친인척이 다 연루되는 되는 경우가 있는데, 신라는 성골 진골 등 골품제를 중시하면서 친인척간 결혼은 일상이었단다. 그런 점은 감안하고 신라 왕족의 가계도를 이해해야 한단다. 지소태후는 10여 년간 섭정을 하면서, 원화 제도와 선화제도라는 인재 양성 제도를 만들었단다. 원화의 장은 여자로 임명했대. 그런데 나중에 선화제도로 합쳐지고 이 선화제도가 화랑제도로 바뀌었다고 하는구나. 이 화랑에서 나온 인재들 중에 위인들이 많고, 이들이 삼국통일에 큰 업적을 세운 것을 보면 이때 원화제도와 선화제도를 만든 지소태후의 선견지명이 대단한 것 같구나. 청년이 된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고, 영토 확장에 힘써 함경도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된단다. 그리고 자신이 차지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북한산에 가보면 북한산 순수비를 볼 수 있단다. 진짜는 박물관에 있고, 모형물이지만 말이야. 진흥왕 순수비는 국보 3호로 지정되었단다. 신라의 전성기를 연 진흥왕은 안타깝게도 제법 이른 나이인 43살에 죽고 말았단다.

진흥왕의 아들 동륜이 태자였는데 행실이 좋지 않았대. 진흥왕의 애첩들을 사랑하게 된 동륜은, 진흥왕의 애첩 중에 한 명을 만나러 가던 도중 큰 개에 물려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또 다른 아들 금륜이 왕위에 올랐으니 25대왕 진지왕이란다.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실제 권력을 잡은 이들은 사도부인 박씨와 미실이라는 여인이란다. 진지왕은 사도부인과 미실에 의해 왕위에 올랐는데, 여색에만 빠지자 2년 만에 사도부인과 미실에 의해 폐위 당하고 말았단다.

26대왕 진평왕은 진흥왕의 첫아들로 태자였던 동륜의 아들이고, 52년간 재위했단다. 그가 왕위에 있을 때 백제와 연개소문의 고구려 연합이 공격을 해왔어. 신라는 수나라에 도움을 요청을 했고, 수나라도 영토 확장의 욕심의 고구려의 뒤를 쳤단다. 하지만,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패하고 물러나 결국 나라까지 망하게 되었단다. 중국 땅에서는 그렇게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생겨났단다. 앞서 잠깐 소개되었던 미실이라는 사람은 진흥왕부터 진지왕을 거쳐 진평왕까지 약 40년 동안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를 했던 사람이란다. 왕들뿐만 아니라 왕족들과 잠자리도 같이 했지만, 미실에게 진정한 사랑은 사다함이라는 사람이었단다. 하지만 결혼은 왕족인 세종이라는 사람과 해야 했어. 사다함이 어린 나이에 일찍 죽고 나서, 미실은 색정과 권력의 화신이 되었다고 하는구나. 미실은 예전에 드마라와 소설에 소개되면서 더 많이 알려진 사람이란다. 인터넷이나 유뷰브에서 찾아보면 미실이라는 사람은 많은 자료가 있을 거야.

이 시절 화랑도 풍월주 중에 유명했던 한 사람을 한 명 소개해 줄게. 8대 풍월주 문노라는 사람인데, 아빠는 처음 들어본 사람인데, 많은 화랑으로부터 존경과 지지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신라 시대 개방된 성생활을 하는 중에도 문노는 윤궁이라는 사람에게 일편단심이었다고 하는구나.


3.

이제 27대왕 할 차례구나. 56대왕까지 있으니, 아직 반도 안 왔구나. 진평왕은 아들 없이 첫째 딸 천명 공주, 둘째 딸 덕만 공주만 낳았단다. 그럼 예전 같으면 사위에게 왕자리를 물려주기도 했는데, 진평왕은 자신의 딸들 중에서 둘째 딸 덕만 공주에서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그가 27대왕 선덕왕이란다. 아마 선덕왕의 남편 김용춘이라는 사람의 신분이 낮아서 그랬을 거야. 신라는 골품제로 신분을 무척 중요시 여겼으니까 말이야. 당시 여자가 왕위에 오르는 일은 주변국을 다 뒤져봐도 없던 일이란다. 당나라에서도 신라의 선덕왕을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지지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입지가 그리 탄탄하지는 않았겠구나. 그런데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김춘추였는데, 김춘추는 고구려와 당에 오가면서 이웃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했단다. 그리고 당의 협력을 이끌어내기도 했어. 그것이 나중에 삼국 통일의 기반이 되기도 했지. 28대왕은 진덕왕으로 진평왕 이복동생인 갈문왕의 딸이란다. 선덕왕이 죽고 나서 성골 중에 왕을 고르다 보니 이번에도 여자인 진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을 잡고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김춘추가 진덕왕을 밀어주었다고 하는구나.

진덕왕 통치가 끝나고, 29대왕은 김춘추가 결국 왕위에 올랐으니 태종무열왕이란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장남인 김용수의 장남이란다. 진평왕 때부터 정치에 참여하여 선덕왕, 진덕왕 때 이미 유명해졌고, 특이 외교관으로 많은 성과를 냈어. 그래서 진덕왕이 죽고 신하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니 그때 나이는 52세였단다. 김유신 장군이 이때 활약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 병합에 성공했단다. 하지만 완전히 궤멸시키지 못하고, 백제 부흥군들이 공격이 계속 있었어. 무열왕의 둘째 부인 문명부인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인데, 무열왕이 김유신의 동생과 결혼하게 된 것은 김유신의 시나리오였단다. 가야 출신 김유신이 권력의 한 가운데 들어서기 위한 작전이었지.

30대왕 문무왕은 무열왕의 장남으로 20년간 재위를 했는데, 년도로 661년부터 681년이란다. 신라 삼국 통일이 몇 년? 너희들도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바로 676년이란다. 그러니까 문무왕이 재위하는 동안 삼국 통일의 대업이 이루어진 거지. 문무왕은 왕이 되기 전부터 통일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단다. 백제부흥군을 완전히 궤멸시켰고, 연개소문이 죽고 난 다음 내분에 휩싸인 고구려도 당나라와 연합하여 멸망시켰단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는 신라땅도 자신들이 먹으려 공격하였고, 신라가 이 공격을 잘 막아냈단다. 그래서 대동강 이남까지 신라의 영토가 되었단다. 그렇게 통일 신라 시대가 시작되었단다. 원효와 의상이라는 유명한 스님이 활동하던 것도 문무왕 때라고 하는구나. 그들이 절도 많이 지어서, 요즘도 절에 가보면 많은 절들이 이때 지은 것으로 적혀 있단다. 우리가 경주에 놀러 갔을 때 둘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일출을 보고 갔잖니. 조금 늦게 일어나서 아빠가 정신 없이 가느라 우리가 도착한 곳이 문무대왕릉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주지 못했는데, Shawn이 문무대왕릉은 어디에 있냐고 물어봤지? 바로 앞 바위를 보면서 말이야..ㅎㅎ 그게 문무대왕릉이었어. 우리는 문무대왕릉 사이에서 떠오른 해를 본 것이고


4.

, 이제부터는 통일 신라 시대의 이야기란다. 31대왕 신문왕은 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구역을 체제를 9 5소경으로 정비했단다. 김흠돌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김흠돌이라는 사람이 신문왕의 장인이면서 화랑도의 풍월주였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왜 난을 일으켰을까.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화랑도를 폐지했다고 하는구나. 화랑도의 풍월주가 난을 일으켰으니 화가 날만도 하겠구나. 그리고 당시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들이 난을 일으키기도 했대. 다 진압당했지만… 32대왕은 신문왕의 장남인 효소왕이었고, 33대왕은 신문왕의 차남인 성덕왕인데, 성덕왕은 효소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구나. 신라의 이방원인가? 그런데 성덕왕이 재위하는 기간에 자연재해가 엄청나게 많이 일어나서 민심을 잃었다고 하는구나. 성덕왕은 업적보다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우리도 보고 온 성덕대왕신종으로 유명한 왕이란다.

34대왕은 성덕왕의 셋째아들 효성왕인데 5년이라는 짧은 기간 재위했고, 35대왕 경덕왕은 성덕왕의 넷째아들이란다. 경덕왕 때 통일된 지도 어느 정도 되었고 왕권도 어느 정도 강화되어 나라가 안팎으로 안정이 되었단다. 그래서 풍악을 즐기기도 했는데 이에 비판이 일자 또 신하들의 조언을 듣고 국정운영을 말년까지 잘 했다고 하는구나. 이 때 우리가 경주에 가서 본 월정교(비록 복원한 것이지만)도 이때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던 성덕대왕 신종도 이때 만들기 시작했대. 36대왕 혜공왕은 8살 때 왕위에 올라서 경수태후가 섭정을 했는데,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나고 반란도 계속 일어났대. 그 반란 속에 스물세 살 어린 나이에 살해당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반란으로 왕이 된 이가 36대 선덕왕인데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이미 많이 늙었을 때여서 재위기간은 5년뿐이었다고 하는구나.

38대왕 원성왕도 혜공왕을 죽인 쿠데타의 핵심 세력이었대. 선덕왕이 죽고 추대로 왕위에 올랐고 상대등 출신이었다고 하는구나. 이때도 가뭄, 흉년, 메뚜기 떼 등 자연재해가 많았대. 39대왕은 원성왕의 장남 소성왕이고, 40대왕은 소성왕의 장남 애장왕이란다. 애장왕이 어린 나이인 13살에 왕위에 올랐어. 처음에는 섭정을 했지만 나이를 먹고 친정을 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 나갔어. 그런데 소성왕의 이복동생, 그러니까 애장왕의 삼촌인 언승이 조카들의 쿠데타를 일으켰고, 애장왕을 죽여버렸단다. 음 신라의 수양대군이구나. 그렇게 헌승이 왕위에 올랐으니 41대왕 헌덕왕이란다. 헌덕왕은 17 3개월간 재위를 하고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42대왕 흥덕왕이란다. 흥덕왕도 애장왕 반란에 참여를 했던 사람이란다. 흥덕왕이 재위하던 때는 장보고가 청해진에 터를 잡고 활약하던 시기였단다.

43대왕 희강왕은 원성왕의 손자의 아들로 희강왕 또한 애장왕 반란에 참여했었단다. 그런데 희강왕도 측근의 반란에 쫓기다 자살로 삶을 마감했단다. 희강왕을 죽음으로 몰고 간 반란을 주모자가 44대왕 민애왕이란다. 희강왕이 반란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명이란 장군은 장보고와 함께 청해진 군대를 이끌고 와서 민애왕을 공격하여 죽였단다. 그리고 김명은 신무왕을 왕위에 세웠으니 그가 45대왕이었단다. 하지만 병중으로 6개월만에 죽고 말았단다. 46대왕은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인데, 장보고와 약속하기를 장보고의 딸과 결혼하기로 약속했는데 이를 어겼단다. 그러자 장보고가 발끈하여 경주를 공격해오려고 했는데, 장보고를 두려워한 문성왕은 염장이라는 사람을 이용해서 장보고를 죽였단다. 신라의 해상을 주름잡던 장보고의 죽음은 개인뿐만 아니라 신라에게도 큰 손실이었단다.

47대왕은 원성왕의 증손자인 헌안왕이고, 48대왕은 헌안왕의 사위인 경문왕이란다. 경문왕 때는 반란도 많고, 재해도 많아 백성들이 힘들었는데, 거기에 황룡사대탑(구층 목탑) 공사로 백성들을 부역까지 시키니 불만이 치솟았단다. 49대왕 헌강왕은 오랜만에 덕치를 행해서 태평성대를 이룬 시기라고 하는구나. 하지만 재위 10년째인 이십 대 어린 나에게 그만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단다. 50대왕은 경문왕의 차남인 정강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정강왕도 1년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단다. 자식 없이 죽게 되자, 51대왕은 여동생인 진성왕이 재위했단다. 진성왕은 이름을 좀 기억하면 좋은데 그 이유는 진성왕 때 신라가 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야. 진성왕은 색욕에 빠져 국정은 뒷전이었고, 그로 인해 전국 곳곳에서 반란군이 일어났단다. 이를 답답하게 본 최치원이 시무십조를 쓴 것도 이 때였단다. 왕권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지방호족 세력들이 점점 커졌어. 호족들이 군대를 갖고 있었는데 그들도 세력 확장을 하면서 전투를 일으켰단다. 이때 후백제를 세우는 견훤, 후고구려의 전신인 태봉을 세우는 궁예도 이때 성장했단다. 이때 신라의 왕이 진성왕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진성왕이 죽고 헌강왕의 서자가 왕위에 올랐으니 52대왕 효공왕이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신라의 국력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약해진 때였단다. 궁예와 견훤이 서로 전쟁하면 세력을 키워나갔지. 효공왕도 여색과 술에 빠져 지냈고, 박씨 세력의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추정하였어. 효공왕이 죽고, 김씨가 아닌 박씨인 박경휘가 왕이 되었으니 그가 53대왕 신덕왕이란다. 이후 박씨 왕들이 이어지게 된단다. 54대왕은 신덕왕의 아들 경명왕, 55대왕은 경명왕의 동생인 경애왕이었어. 하지만 신라를 되살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나라는 엉망이 되어버렸단다. 견훤과 한 축을 이루고 있던 궁예는 왕건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고 왕건이 고려라는 나라를 세웠단다. 때는 918년이었어. 경명왕은 고려와 화친하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병으로 일찍 죽었어. 경애왕도 신라를 연명하는 방법으로 고려와 화친하는 수밖에 없었어. 백제의 견훤 부대가 공격해 들어왔어. 경애왕은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고려는 늦게 도착을 했단다. 그 사이에 경애왕은 도망 중에 자살을 하고 말았단다.

견훤이 경주를 차지하고 경애왕의 외종제 김부를 왕위에 세웠으니, 신라의 마지막 왕인 56대왕 경순왕이었단다. 마지막 다시 김씨 왕이란다. 견훤도 신라와 전투에서 이겨 승승장구를 하고 있었지만, 후계자 문제로 아들 신검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쫓겨나고 말았단다. 견훤은 고려에 투항을 했어. 경순왕도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자신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고려에 투항했단다. 그렇게 1000년 역사의 신라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망하게 되었단다. 935 11월이었단다. 투항한 경순왕은 극진대우를 받으며 삶을 마감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이 투항을 반대한 이가 있었으니 신라의 마지막 태자였단다. 그는 나라 잃은 슬픔을 개골산에 들어가 불편한 삼베옷을 입고 지냈다고 해서 마의태자로 후세에 알려졌단다. 견훤을 몰아낸 신검도 결국 왕건과 전투에서 지고 후백제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한반도는 다시 고려라는 나라로 통일이 되었단다.

, 여기까지가 아빠가 읽은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이란다. 역사라는 것이 역사가에 따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단다. 특히 역사기록이 부실한 고대 역사는 더욱 그래. 그러니까 이 책의 내용도 너희들이 교과서에 배우는 내용이나 다른 역사책의 내용과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단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그 책을 쓴 지은이의 역사관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오늘 길고 긴 독서편지를 마치마. 그런데 Shawn이 이야기한 것처럼 고구려 역사 탐방은 어디로 가야 하지?


PS:

책의 첫 문장: 신라인들이 중국 대륙에서 흘러든 종족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책의 끝 문장: 그래서 마의 태자라는 별호가 붙었다.


이렇게 볼 때, 신라 왕조는 시조 혁거세왕부터 제 8대 아달라왕까지 240년 동안은 박씨의 시대, 제9대 벌휴왕부터 제16대 흘해왕까지 172년 동안은 석씨의 시대, 제17대 내물왕부터 제52대 효공왕까지 556년 동안은 김씨의 시대, 그리고 멸망기 해당하는 제53대 신덕왕부터 제55대 경애왕까지 15년 동안은 다시 박씨의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후백제 왕 견훤이 세운 왕이었으므로, 이때는 이미 신라의 왕권이 무너진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 P73

눌지왕 대에 이르러 왕에 대한 칭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변경되었다. 김대문에 따르면 마립이란 말뚝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직위에 따라 놓는 것이니 조선 시대의 품석(品石, 품계를 새겨 나열한 돌)과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조선의 품석은 임금의 것이 없지만, 신라의 마립엔 임금의 것도 있다는 점이다. 즉, 신라 조정에는 왕의 마립의 최상석 한가운데 있고, 그 아래로 신하들의 마립이 나열되어 있는 형태였다. 따라서 마립간이란 마립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곧 임금을 의미했다. - P215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화랑도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또한 이에서 생겼다’고 했다. 김대문이 <화랑세기>에서 거론한 풍월주는 총 32명이다. 그는 이 시기의 화랑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화랑도 출신이 많았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가장 크게 기여한 김유신이 화랑의 제15세 풍월주이고,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제18세 풍월주였으며,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이 제13세 풍월주였다. 또한 가야 정벌의 영웅 사다함이 제5세 풍월주였고, 화랑 중의 화랑으로 이름을 날린 문노가 제8세 풍월주였다. 그 외에도 일일이 이름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수가 화랑도 출신이었다. 김대문의 말대로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말엽까지 신라 사회를 떠받친 인물들은 모두 화랑도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288

선덕왕이 647년 정월에 일어난 비담의 난 중에 죽자 그 와중에 승만이 왕위에 올랐는데, 왜 그녀가 왕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당시 성골로서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성골 여자인 승만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성골이라는 신분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없어 이 또한 왕으로. 무열왕부터 경순왕까지를 진골 왕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하여 이 기록의 진의조차 파악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따라서 진덕왕의 즉위를 성골과 진골의 구분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선덕왕의 영험한 지혜를 믿던 백성들을 달래기 위해 실권자 김춘추가 난국 타개를 목적으로 그녀를 왕위에 앉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P340

스물이 갓 넘은 나이에 대군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 점으로 봐서, 견훤은 꿈이 원대하고 용맹이 뛰어났으며 항상 미래를 계획하는 성품을 지닌 장부였다. 또한 상황에 따라 잘 대처하는 것으로 봐서 임기응변에 능하고, 적을 칠 때는 먼저 적을 안심시킨 다음 치는 것으로 봐서 다소 음흉하여 그 속내를 읽기 힘든 면에 있었으며, 빠른 시일 안에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를 형성한 점으로 미뤄 과단성 있고 남다른 주변 장악력을 소유했던 게 분명하다. 또 자기 손으로 열었던 후삼국 시대를 스스로 끝내는, 그래서 왕건에게 통일이라는 대업을 선물로 안기는 영웅의 면모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 P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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