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우리는 고립을 지리와 상황의 결과로 여기곤 한다. 혼자가
된 과부, 남편은 죽고 아이들은 다 자란 여자, 그는 고립된
사람이다. 늙고 쇠약한 사람, 아예 물리적으로 바깥세상에
나갈 수 없는 사람, 그들은 고립된 사람이다. 하지만 고립은
또한 마음의 상태일 수 있고, 실제로 종종 그렇다. 칩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선택을 결정짓는 상태인 것이다. 마치 당신이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나는 고립으로 추락한다. 어둡고 비자발적인 추락은 가속이 붙어, 내가 저지하기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나는 혼자 있기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연속 열 번이나 열다섯 번이나 스무 번쯤 하고 나면, 더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19)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쬐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 있는 것이다.
(24-25)
혼자 있다는 것, 그 모든 다양한 형태는-혼자 살거나, 싱글이거나, 배우자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갖거나-연습이 필요한 기술이다.
고독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돌볼 의욕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교적인 생활을 가꾸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기꺼이 취약해질 줄 알아야
한다. 캐럴린 하일브런이 그 쌍둥이 기술을 터득하는 데는 60년이
걸렸다. 내 친구 그레이스는 40대 중반인 지금 그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20년 동안 혼자 살아온 그는 이제 프라이버시와 교유의 균형을 예전보다 더 자주 달성할
줄 안다. 나로 말하면,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34-35)
해석. 물론 이것이 핵심이고, 착각에 이르는 문이다. 수줍어하는 사람들은 과묵함의 망토 뒤에 숨은
채 상대가 스스로 관계에 대해서 품는 두려움이나 편견이나 자기 인식을 투사하는 빈 화면으로 기능한다. 만약
그 상대가(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타인에게 호감을 사고
싶다고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만약 그 상태가 자신이 타인의 기대에 부합하는지 혹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불편함이나 과묵함이 그에게는 자신이 주루해서 그러는 거라고 보일 수 있다. 수줍음은 오해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수줍음을 타는 내
친구 하나는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한다. “침묵은 로르샤흐 테스트야.”
(84)
내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작은 인간
발전기 같은 록산이라는 이름의 두 살 조카를 볼 때면 나는 모성애 덩어리가 된다. 아이를 붙잡아서 껴안고
싶고, 그 자그만 얼굴과 손에 뽀뽀하고 싶다. 두 살 아기들이
즐기는 무한 반복 게임을 몇 시간이고 할 수 있다. (내가 아이를 쫓아서 30번 빙글빙글 돌고, 아이가 나를 쫓아서 30번 빙글빙글 돌고) 아이가 특히나 아이답고 사랑스러운 행동을 할
때면-낮잠을 자려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웠거나, 잠시 낯가림하며
제 아빠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있을 때-심장이 녹아내린다. 홀딱
반하겠네, 나도 아이가 있으면 좋겠어. 나는 생각한다.
(94)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의 애정이란 내가 얻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 사랑받으려면 시험을 통과하고, 지적 후프를 뛰어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여겼어. 그러니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깊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내게는
놀라운 일이야. 이것이 네가 내게 준 선물이란다. 네 존재만큼이나
소중한 선물이란다.
(119)
최근에 부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부모님이 전보다 더 늙고 약해지신 듯 보인 적 있는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적 있는가? 젠장,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 혼자 남으면 어쩌지? 아니면 이런 생각.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시면 어쩌지? 아버지가 혼자 생활하실
줄이나 아나?
사람들이 흔히 부모님에게 느끼는 죄책감, 그러니까
당신이 부모에게 좋은 자식이 아니었다는 걱정이 들 때가 있나? 혹은 만약 부모님이 아프실 경우에 당신이
좋은 자식 노릇을 하지 못하리라는 걱정이?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고?
나와 같은 입장이 된 것을 환영한다. 당신이 그동안
누리던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이제 끝난 것이다. 부모님 은혜의 시기란 당신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부모를 걱정할 만큼은
나이가 들지 않은 시기, 그 짧은 기간을 뜻한다.
(123)
이것이 삶임을 깨닫는 데도 긴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모두 나이 들수록 삶이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니라 더 쉬워진다는 신화를 믿으며 자라는데(그리고 이것은
진짜 신화일 뿐이다), 나이 드는 부모의 모습만큼 그 믿음이 사실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것은 많지 않다. 실제로는 우리가 아니 들수록 잃은 것이 많아진다. 점점 더 크고
버거운 과제가 나타난다. 실수를 되돌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144-145)
화가였던 어머니의 화실을 비우는 일이 가장 힘든 부분이었던 듯싶다. 화실은 갑자기 끝난 어머니의 인생을 생생히 떠올리게 하는 물리적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죽기 직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탁자와 붓과 페인트는 늘 그랬던 모습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진행 중인 작은 작품들, 스케치와 메모, 콜라주 재료, 색칠된 종이 무더기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그 방이 텅 빈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그것은 잔인하고 부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고, 그래서 나는 겨우 일 분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150-151)
하지만 모녀 관계가 얽히고설킨 관계가 되기 쉬운 게 그 때문이라면, 역시 그 덕분에 모녀 관계는 유달리 풍성한 관계가 될 수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어머니란 딸의 내년에 있는 로드맵 혹은 거울이다. 우리가 어머니와의 관계에는 우리가 평생
배워온 교훈들, 우리가 과거에 걸어오다가 계속 걷기로 결정했거나 포기하기로 결정한 길들이 반영되어 있다. 여자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일이나 연해 문제든,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입고 어떤 친구들을 사귈까 하는 문제든, 어떤
사람이 될까 하는 문제든-다소나마 자신의 결정을 어머니의 결정에 견주어 평가해보기 마련이고, 어머니의 노력들이 어떻게 어머니를 형성하거나 제약했는지, 강화하거나
약화했는지 따져보기 마련이다.
(183-184)
외로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말 걸 사람이 아무도
없는 파티에 있을 때 느껴지는 단절의 외로움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찾아드는 그리움의
외로움도 있고,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 채 내리 몇 시간이나 며칠을 보내면 생겨나는 고립의 외로움도 있다. 그런데 내가 제일 잘 아는 외로움은 일요일 오전의 그리움이다. 이것은
종종 사전 경고도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듯한 외로움이다. 일단 이 외로움이 들이닥치면, 이 크나큰 외로움을 극복하기란 영영 불가능하리라는 기분이 든다. 만약
우리 가게에서 외로움을 살 수 있다면, 일요일의 외로움은 커다란 상자에 담겨 있을 테고 그 위에 이런
딱지가 붙어 있을 것이다. ‘취급 주의-초강력’
(186-187)
이런 것들은 어려운 질문들이다. 그리고 나는 외로움을
앞질러 달아나는 데 급급하여, 이 질문들에 답할 기회를 회피해왔다. 물론
가끔씩 기분 전환을 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새
신발의 치유력을 열렬히 증언하는 바다. 하지만 더 큰 질문들을 피하기만 했다가는 언젠가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에 돈을 펑펑 쓰면서 종종거릴 때, 보통은
내가 평범한 일요일을 계획하는 것처럼 기본적인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무능력자라는 느낌이 강화될 뿐이다. 그래서
그날, 나는 잠시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일에 착수했다. 몇 달 동안 만들어야지 만들어야지 생각만 했던 커튼을 직접 만들어서 걸었다.
할 일을 해치웠다는 것 자체가 단순한 기쁨이었을 뿐 아니라, 이 일로 새삼스럽게 몇 가지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내게는 절망감에 맞서 싸울 자원이 있다는 사실, 내 시간을 잘 쓰고 내 영혼을 잘 돌볼 능력이 있다는 사실, 외로움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우리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사실.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고독한 일요일이었지만, 결국에 외로운 일요일은 아니었다.
(195)
나는 정말로 어떤 사람일까? 나는 정말로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일까? 내게
적합한 삶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격려받고, 무엇에 의욕을
얻고, 무엇에 만족하는 사람일까? 자아에 관한 이런 고민들은
대부분의 사람이(적어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20대에
묻기 시작하는 질문들이다. 그러니 서른일곱에 문득 내가 이 나이를 먹도록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는 고사하고
제대로 물은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말 심란한 일이다. 어떻게 하면 나는 주야장천 취한 상태가
아닌 채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보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훨씬
더 어려웠다.
(212)
술은 그토록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우리가
술에 절어 있을 때는 술이 유일한 해결책인 듯, 술이 자신을 산산조각 나지 않게 붙잡아주는 접착제인
듯 느껴지죠. 하지만 사실은 술이 문제의 근원이죠. 술은
우리가 꼼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발바닥을 바닥에 붙여놓는 접착제죠. 그날 아침, 저는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어쩌면 퍼뜩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생각이 점차 자라서 결국 저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223)
술은 재미나 친밀감 같은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줄 순 있을지라도 그런 감정들은
진짜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화학물질 덕분에 변한 나는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김에 흉금을 터놓는 대화를
오래 나누었다. 하지만 술을 마셨을 때 진짜 나는-어떤 면에서는
자신감 있고 다른 면에서는 겁 많은 나, 강한 동시에 약한 나-마음속에서
뒷전으로 물러났고, 그래서 안전해졌을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 혼자였다.
술을 끊는 것은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오는 것, 혹은 망가진 TV 안테나를 고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시야가 더 밝아졌고, 다른 사람들하고는 세상하고든 접촉이 더 또렷하고 확실해졌다.
(241)
나는 진심이다. 여자들이여, 궐기하라. 더 이상 꾸물거릴 수 없다. 분노와 공격성을 훈련하자!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법을 연습하자! 우리는 오랫동안 푸대접에도 겁쟁이처럼 얼어버리는 버릇을 떨치지 못했지만, 이제
그 버릇을 끝장낼 때가 되었다.
(295)
하지만 순환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계절의
순환도, 감정의 순환도, 여름의 불안은 왔다가도 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올여름에 내 몫의 좋은 날을 누릴 것이다. 기분
좋고 낙천적이고 마음 가벼운 날, 내 내면의 풍경이 바깥 풍경과 일치하거나 적어도 좀 더 비슷해지는
날, 내가 맨발에 밟히는 모래와 살결에 와닿는 더운 공기를 즐길 수 있는 날, 그런 것들이 모두 괜찮게 느껴지는 날. 그리고 나는 나쁜 날도 겪을
것이다. 밝고 가벼운 것들이 모두 미워지는 날, 어두운 고치를
그리워하는 날,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을 보면서 그 향기 나는 작은 머리통들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날.
그런 날이 오면, 나는 요령껏 대처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처방책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확신하는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신이 영화관을 발명하신 것이다.
(325)
화를 터뜨리는 편이 언제나 효과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화를
내면 반드시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상처가 낫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나쁜 상황이 열을 내면
더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싸움을 잘 고르는 것 못지않게 대상을 잘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정신적으로 치고받을 의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화내는 것이 효과가 있으려면-어느 쪽에게든 생산적이거나 유익하려면-관련된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서로 신뢰해야 한다. 두 사람 모두 괴로운
시기를 견뎌보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노라는 동전의 뒷면은 친밀함일 때가 많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겁나면서도 때로 가치 있는 일인 것은 그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