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7 - 영조에서 순조까지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7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신병주 감수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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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역사저널 그날 7권을 읽었단다. 7권에서는 조선후기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조, 정조, 그리고 순조까지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조선시대 왕 중에 가장 위대한 왕은 누가 뭐라 해도 세종이라고 하겠지만,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왕은 정조란다. 코드가 같다고나 할까, 아빠가 정조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그의 행동과 그의 생각들이 마음에 들었단다. 아무튼 그런 정조를 이번 책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단다. 아빠가 여러 번 이야기해서 알겠지만,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왕이 되지 못하고,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죽고 말았단다. 조선 왕궁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을 뽑으라고 하면 다섯 손가락에 들지 않을까 싶구나.

사도세자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마음이 그 당시에는 진짜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아들이 죽고 나서는 많이 후회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생각할수록 슬퍼진다는 뜻의 사도세자라 이름 지은 것도 영조이니 말이야. , 그럼 영조 때부터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꾸나.

영조는 이복형의 경종의 뒤를 이었지만, 초반에는 경종을 죽였다는 소문과 무수리의 아들로 정통성이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어나기도 했단다. 그 중에 가장 큰 반란은 이인좌라는 사람이 일으킨 난이란다. 나중에 역사 교과서에 보면 이인좌의 난이라고 나올 거야. 당시 당파싸움이 치열했는데, 이인좌는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과 반대에 있는 소론 출신이었단다. 그런데, 영조는 이때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였어. 소론인 이인좌가 일으킨 난을 소론 출신인 오명항, 박문수에게 진압하라고 명령한 것이야. 진압군인 소론들이 오히려 반란군과 합세할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지만, 결과적으로 영조의 선택은 탁월한 선택이었단다. 이 선택이 신하들에게 영조가 노론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했단다. 오명항과 박문수는 자신을 신뢰해준 영조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게 된단다. 이 난을 통해 영조를 교훈을 삼고 탕평책을 쓸 것을 마음먹게 된단다. 그 유명한 탕평채라는 요리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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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신병주) 무신란 이후에 영조가 직접 전교를 내립니다. 반란의 원인은 결국 조정에서 당쟁만을 일삼아서 재능 있는 인재들이 등용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계속 기근이 일어나 백성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구제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당쟁만을 일삼는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해 주는 게 없으니까 백성들이 조정이 있는 것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반란군에 편입된 것이라고 하고요. 그러니 결국 반란을 일으켰던 주모자와 반란에 가담했던 백성들의 죄가 아니라 조정이 잘못한 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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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인좌의 난을 진압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인 박문수. 그가 바로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라는 사람이란다. 박문수는 아빠가 아주 어렸을 때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유명했었단다. 아빠는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암행어사 출두요라고 소리지르며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고, 못된 사또가 무릎 끓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나는구나. 그렇게 드라마뿐만 아니라 많은 책들을 통해서도 어사 중에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사람이 박문수가 아닌가 싶구나. 박문수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대사성, 대사간, 도승지를 역임했고, 호조 참판과 병조 참판, 예조참판을 거치면서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고 하는구나. 영조가 균역법을 성공하는데도 박문수가 숨은 공이 있었대. 그렇게 박문수는 암행어사뿐만 아니라 여러 직책에서 공을 세웠다고 하는구나. 영조는 박문수를 특히 아꼈는데, 자신과 성격이 닮아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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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신병주) <실록>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대단히 닮았어요. 영조가 박문수를 지적하면서 나도 고집이 세지만 넌 진짜 고집이 세다.”라고 이야기하고 너는 성격이 진짜 불같다.”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영조 본인도 약간 그런 기질이 있다 보니까 서로 통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박문수가 왕 앞에서 싸우니까 다른 신하들이 박문수를 무식하다고 나무라는데 영조가 다 나라를 위하는 말이다. 무식하면 공부 좀 하면 되지.”라는 식으로 박문수를 옹호해 주는 말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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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조는 조선의 왕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머문 왕이란다. 하지만 그 긴 재위기간에 그는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조선 왕실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된단다. 그에게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죽고 만단다. 영조의 나이 42세 때, 다시 아들을 얻었으니 그가 사도세자였단다. 42살에 낳은 아들이니 얼마나 사랑스러웠겠냐. 그러면서 자신의 뒤를 이를 왕으로 잘 교육시키겠다는 마음도 컸을 거야. 그런데 그것에 도를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구나. 어렸을 때부터 지나친 교육은 예민한 성격의 사도세자를 미치게 만들었단다. 10대 중반에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했는데, 사도제사가 제대로 하지 못하자 영조는 또 불같이 화를 내고, 사도세자는 추운 겨울 눈 속에서 잘못했다고 며칠을 빌고 또 빌어야 했단다. 이런 스트레스를 사도세자는 술과 여자로 풀었던 모양이구나. 그리고 예민한 성격은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후궁들을 죽이기까지 했어.

영조와 사도세자는 사이는 점점 극과 극에 달했어. 참다 못한 영조는 결국 뒤주에 사도세자를 가두게 된 것이란다. 보통 사도세자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사람들은 영조, 사도세자의 아내인 헤경궁 홍씨,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그리고 좀더 나아가면 노론, 소론, 남인의 사람들이란다. 아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단다. 사도세자의 엄마. 아무리 아들이 못났다 하더라도 그 조그마한 뒤주에 갇혀 죽는 걸 본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니. 사도세자의 엄마인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결국 영조의 뜻에 따랐다고는 하나, 속은 문드러지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러니 사도세자 삼년상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죽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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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신병주) 이제까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라는 인물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아주 중요한 열쇠를 쥔 인물이었던 거죠. 여러 자료를 보면 영빈 이씨는 상당히 원칙이 분명하고 경우가 바르던, 아주 이성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때 파국을 막을 방법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영조도 후에 종사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평가하잖아요. 영빈 이씨 본인도 엄청나게 괴로웠겠죠. 그래서인지 기록을 보면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다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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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단다. 하지만 그의 자리도 안전하지는 않았어. 정조는 남인과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노론 세력은 보복을 당할까 무척 걱정을 했던 거란다. 그래서 먼저 정조를 없애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다고 했어. 하지만 정조는 겉으로 그런 표를 내지 않았어. 그리고 젊은 학자들 중심으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끌어들였단다. 그래서 규장각이라는 학술 정책 연구 기관을 만들었어. 능력만 있으면 서얼도 뽑았단다. 그런 서얼 중에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이 있었는데, 정조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그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 같구나. 어느 정도 왕권의 기틀을 마련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단다. 그래서 아버지의 묘지도 수원 현륭원으로 이전하였고, 신도시로 수원 화성을 만들었단다. 현륭원과 수원 화성은 너희들도 가봤는데 기억나는지 모르겠구나. 수원 화성은 특히 그 공사 내용을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으로 기록하였는데, 나중에 이 책을 통해서 수원 화성을 복원하였다고 하는구나. 수원 화성을 짓는데 큰 공을 세웠던 이가, 바로 아빠가 정조만큼 좋아하는 정약용이라는 분이란다.

정조의 많은 업적들이 있는데 그 업적들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개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단다. 오늘날 많은 정치인들이 개혁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실천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데, 정조는 과감하게 그 개혁들을 이뤄낸단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금난전권이란다. 시전 상인들에게 주어졌던 오랜 특권인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소상인을 보호해 주었단다. 이 때 금난전권 폐지에 큰 공이 있던 이가 채제공이란 분이란다. 그리고 정조는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임금으로 유명한데, 대신들이 말려도 백성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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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170)

(그날) 포도대장뿐만 아니라 대신들도 말렸다고 합니다. “서민이 상언하는 것은 매우 외람되고 난잡한 행동입니다. 상언과 격쟁을 받지 마소서.” 그러니까 정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들어라. 저 말할 것 없는 자들이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달려와 하소연하기를 어린 자식이 부모에게 하소연하듯이 하니 그렇게 만든 자가 잘못이지, 저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애민 군주의 진정성이 수백 년의 시공간을 넘어서 가슴에 감동을 안깁니다. 정말 진정한 소통과 공감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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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없다면서 많이 이야기하는 것 중에 정조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말이란다. 정조가 일찍 죽지 않고 계속 왕위에 있었다면 조선은 그렇게 허망하게 일본에게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도는 머리에 난 부스럼과 얼굴에 생긴 종기가 갑자기 악화되면서 죽고 만단다. 그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고, 그가 백성들에게 해 온 선한 행동들 때문에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고, 그래서 인지 그의 죽음이 반대파인 노론, 특히 노론의 영수인 심환지가 주도하여 그를 죽였다는 소문이 떠돌았단다. 그런 이야기는 당시뿐만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많았어.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단다. 정조와 심환지가 나눴던 편지가 발견된 거야. 아빠도 그 신문기사가 생각이 나는구나. 그 편지에는 심환지와 서로 의견을 주고 받은 내용이 실려 있는데, 둘은 당파적으로 반대 진영이었지만, 서로 존중하고 힘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정조와 심환지가 나눴던 편지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 있더구나. 쉽게 읽혀질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아무튼, 요즘에는 정조가 안타깝지만 병사했다는 것이 맞다고 하는구나.


2.

정조가 죽고 열한 살인 순조가 왕위에 오른단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다 보니, 왕실의 가장 웃어른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단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부인이긴 하지만 엄청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손자인 정조보다 고작 일곱 살 많았단다. 정순왕후는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단다. 정조가 죽자마자 정순왕후는 정조의 지지세력을 다 처단한단다. 정조의 지지 세력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유배를 보냈단다.

김조순은 정조 생전에 정조에게 신임을 얻어서,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 받았단다. 하지만 그는 정조의 믿음을 배신한단다. 순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렸단다. 세도정치란 외척과 소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형태인데, 여러 가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데 그 중에 가장 파워가 셌던 이들이 김조순의 안동 김씨 세력이었단다. 이 세도정치는 권력과 독점과 함께 매관매직 등 온갖 비리의 열매를 낳게 되었단다. 그렇다 보니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은 농민이었어. 또 참다 못한 세상이 온 거야. 홍경래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킨단다.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하면서 크게 세력을 펼쳐갔지만, 결국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단다.

여기까지 <역사저널 그날> 7권의 이야기란다. 아빠가 중간중간 빼먹은 내용도 많은데, 그런 부분은 나중에 너희들이 좀더 커서 이 책을 읽게 되면 접수하길 바란다.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은 총 여덟 권으로 되어 있고, 7권까지 읽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한 권인데, 이것도 사실은 아빠가 이미 읽었단다. 이 책에 대한 내용도 곧 이야기해 줄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이복형인 경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영조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저항에 부딪혔다.

책의 끝 문장: 홍경래의 난이 농민 항쟁으로 발전하면서 백성이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깨우침을 얻었던 날, 역사의 전환점이 됐던 바로 그날을 살펴본 거네요.


(고성훈) <정감록>에도 일종의 암호가 나오는데요. 파자(破字)라고 합니다. 글자를 풀어서 획으로 나눠 쓰거든요. 이를테면 ‘이망정흥(李亡鄭興)’으로 쓰지 않고 "목자(木子)가 망하고 전읍(奠邑)이 흥한다"로 씁니다. 임진왜란을 예로 들면 임진왜란의 키워드 중 하나가 "왜"이지 않습니까? 이것을 직접 ‘왜(倭)’로 쓰지 않고 "여인(女人)이 벼(禾)를 이고 있다."로 씁니다. 또한 병자호란이 한겨울인 12월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눈 설(雪) 자가 곧 병자호란을 상징하는데, 눈 설 자를 쓰지 않고 비 우(雨)자 아래 산(山)이 옆으로 누웠다고 해서 ‘우하횡산(雨下橫山)’ 같은 식으로 쓰는 게 일종의 파자법이거든요. 암호라고 할 수 있죠. - P26

(신병주) 좌청룔,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라고 들어 보셨죠? 푸른색이 상징하는 것은 동쪽으로, 동인을 상징하는 게 미나리입니다. 우백호라는 건 서쪽을 말하는데 백호니까 흰색인 청포묵이 서인을 뜻하죠. 그다음에 남쪽은 붉은 봉황을 뜻하니까 붉은색 소고기가 남인을 가리키고요. 또한 북쪽은 검은 거북이어서 검은색인 김이 북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인식되는 붕당에 상징색을 부여하고 이 음식들을 고루 섞어 먹으면 붕당 간의 화합이 이루어진다는 뜻을 담은 거죠. - P46

(신병주) 어사는 공식적으로 왕의 가까운 신하로서 왕명을 받아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러 파견을 나가는 사신에 해당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임무에 따라서 진휼을 감독하는 어사는 감진어사라고 했고, 별도로 파견하는 어사는 별견 어사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 관리들의 부정이나 비리를 색출해야 할 때는 비밀리에 작업을 수행해야 해하니까 암행이라는 말을 썼죠.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도 암행어사였기 때문에 신분을 위장해야 하는 거지꼴로 나타나는 바람에 장모를 깜짝 놀라게 해 주는 대목이 나오죠. - P60

(김문식) 문학 하시는 분과 예술 하시는 분들은 문체반정을 놓고 대단히 비판적으로 보시는데, 정조가 개방적인 군주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허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정치적인 입지가 있는 거고, 기본적으로는 왕위를 보존해야 하는 속성이 있죠. 또한 문체반정의 목적이 노론 세력을 약화하려는 데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시에 정조가 금지하려 했던 패관 소품체를 쓰는 사람들이 대개 노론 계통이었거든요. 참고로 패관 소품체는 대단히 짤막하면서도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문체입니다. 정조는 그런 문체로 쓴 글들이 나왔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성도 간파한 것 같아요. 계속 유행한다면 체제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본 거죠. 상당한 정치적 고려 끝에 취한 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 P147

(김문식) 정조는 자신이 강력하게 일을 추진할 때 자기를 도울 수 있는 확실한 세력을 아들인 순조의 혼인을 통해서 얻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려고 결심했을 거고요. 근데 정조가 예상 밖으로 일찍 사망한 게 하나의 패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왕들의 건강이 안 좋았던 것이 또 다른 패착이었죠. 세자가 되어서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잖아요. 근데 계속해서 왕이 이른 시점에 사망해 버리고, 덕분에 후임자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왕이 되는 악순환이 일어나다가 결국은 후손마저 끊기죠. 그래서 철종을 데려오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한 사람의 책임은 아닌 것 같아요. 안 좋은 조건이 교묘하게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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