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7)
(고성훈)
<정감록>에도 일종의 암호가 나오는데요. 파자(破字)라고 합니다. 글자를
풀어서 획으로 나눠 쓰거든요. 이를테면 ‘이망정흥(李亡鄭興)’으로 쓰지 않고 “목자(木子)가 망하고 전읍(奠邑)이 흥한다”로 씁니다. 임진왜란을
예로 들면 임진왜란의 키워드 중 하나가 “왜”이지 않습니까? 이것을 직접 ‘왜(倭)’로 쓰지 않고 “여인(女人)이 벼(禾)를 이고 있다.”로 씁니다. 또한 병자호란이 한겨울인 12월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눈 설(雪) 자가 곧 병자호란을 상징하는데,
눈 설 자를 쓰지 않고 비 우(雨)자 아래 산(山)이 옆으로 누웠다고 해서 ‘우하횡산(雨下橫山)’ 같은 식으로 쓰는 게 일종의 파자법이거든요. 암호라고 할 수 있죠.
(44)
(신병주) 무신란
이후에 영조가 직접 전교를 내립니다. 반란의 원인은 결국 조정에서 당쟁만을 일삼아서 재능 있는 인재들이
등용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계속 기근이 일어나 백성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구제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당쟁만을 일삼는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해 주는 게 없으니까 백성들이 조정이
있는 것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반란군에 편입된 것이라고 하고요. 그러니 결국 반란을 일으켰던
주모자와 반란에 가담했던 백성들의 죄가 아니라 조정이 잘못한 거라고 합니다.
(46)
(신병주) 좌청룔,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라고
들어 보셨죠? 푸른색이 상징하는 것은 동쪽으로, 동인을 상징하는
게 미나리입니다. 우백호라는 건 서쪽을 말하는데 백호니까 흰색인 청포묵이 서인을 뜻하죠. 그다음에 남쪽은 붉은 봉황을 뜻하니까 붉은색 소고기가 남인을 가리키고요. 또한
북쪽은 검은 거북이어서 검은색인 김이 북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인식되는 붕당에 상징색을
부여하고 이 음식들을 고루 섞어 먹으면 붕당 간의 화합이 이루어진다는 뜻을 담은 거죠.
(60)
(신병주) 어사는
공식적으로 왕의 가까운 신하로서 왕명을 받아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러 파견을 나가는 사신에 해당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임무에 따라서 진휼을 감독하는 어사는 감진어사라고 했고, 별도로 파견하는
어사는 별견 어사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 관리들의 부정이나 비리를 색출해야 할 때는 비밀리에 작업을
수행해야 해하니까 암행이라는 말을 썼죠.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도 암행어사였기 때문에 신분을 위장해야 하는 거지꼴로 나타나는 바람에 장모를 깜짝 놀라게 해 주는 대목이 나오죠.
(81)
(신병주)
<실록>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대단히 닮았어요. 영조가 박문수를 지적하면서 “나도 고집이 세지만 넌 진짜 고집이
세다.”라고 이야기하고 “너는 성격이 진짜 불같다.”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영조 본인도 약간 그런 기질이 있다 보니까
서로 통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박문수가 왕 앞에서 싸우니까 다른 신하들이 박문수를 무식하다고 나무라는데
영조가 “다 나라를 위하는 말이다. 무식하면 공부 좀 하면
되지.”라는 식으로 박문수를 옹호해 주는 말까지 합니다.
(120)
(신병주) 이제까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라는 인물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아주 중요한 열쇠를
쥔 인물이었던 거죠. 여러 자료를 보면 영빈 이씨는 상당히 원칙이 분명하고 경우가 바르던, 아주 이성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때 파국을 막을
방법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영조도 후에 “종사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평가하잖아요. 영빈 이씨 본인도 엄청나게 괴로웠겠죠. 그래서인지 기록을 보면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다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147)
(김문식) 문학
하시는 분과 예술 하시는 분들은 문체반정을 놓고 대단히 비판적으로 보시는데, 정조가 개방적인 군주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허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정치적인 입지가 있는 거고,
기본적으로는 왕위를 보존해야 하는 속성이 있죠. 또한 문체반정의 목적이 노론 세력을 약화하려는
데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시에 정조가 금지하려 했던 패관 소품체를 쓰는 사람들이 대개 노론
계통이었거든요. 참고로 패관 소품체는 대단히 짤막하면서도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문체입니다. 정조는 그런 문체로 쓴 글들이 나왔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성도 간파한 것 같아요. 계속 유행한다면 체제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본 거죠. 상당한 정치적
고려 끝에 취한 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169-170)
(그날) 포도대장뿐만
아니라 대신들도 말렸다고 합니다. “서민이 상언하는 것은 매우 외람되고 난잡한 행동입니다. 상언과 격쟁을 받지 마소서.” 그러니까 정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들어러. 저 말할 것 없는 자들이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달려와
하소연하기를 어린 자식이 부모에게 하소연하듯이 하니 그렇게 만든 자가 잘못이지, 저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애민 군주의 진정성이 수백 년의 시공간을 넘어서 가슴에 감동을 안깁니다. 정말 진정한 소통과 공감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지 않습니까?”
(192)
(그날) “경험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어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텐데, 정조는 매우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하는 몹시 나쁜 경험을 한단 말이죠. 근데 그 상처가 치유의 과정 없이 가슴에 남아서 오래도록 정조를 괴롭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힐링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정조야말로 힐링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너무 포용하는 정책들을 펼친 게 문제일지도 몰라요. 피바람을 몰고 오는 복수를 했으면 울화가 해소됐을 거예요. 화병이
안 생겼을 수도 있죠. 그런데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사람들과 20년간
함께 나라 살림을 걱정했어요. 철천지원수랑 같은 공간에서 매일매일
20년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종기가 안 생기기고 못 배기죠. 게다가 역사를 보면 독살 사례들이 있으니까 의심하는 거고요.
(210-211)
(김문수) 네, 그런 한계는 있습니다. 물론 민의 성장을 지도층이 받아들여 맞추면서
개혁이 계속 이루어졌으면 좋았겠죠. 우리가 조선 시대에 기대한 건 그런 개혁인데, 정조는 민의 성장으로 나타난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는 정책을 펴기는 했습니다.
다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버지로 말미암아 생긴 트라우마가 정조의 발목을 크게 잡는 요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릴 때부터 죄인의 아들이라는 의식이 있었고, 자신이 왕이 되었는데도
아버지를 쉽게 복권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아버지를 복권해야겠다는, 상당히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서 세운 계획을 하나하나 진행해 가는 것이 정조로서는 상당히 부담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장애와 정치 세력 정치를 자기 마음대로 추진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247)
(김문식) 정조는
자신이 강력하게 일을 추진할 때 자기를 도울 수 있는 확실한 세력을 아들인 순조의 혼인을 통해서 얻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려고 결심했을 거고요. 근데
정조가 예상 밖으로 일찍 사망한 게 하나의 패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왕들의 건강이 안 좋았던
것이 또 다른 패착이었죠. 세자가 되어서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잖아요. 근데 계속해서 왕이 이른 시점에 사망해 버리고, 덕분에 후임자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왕이 되는 악순환이 일어나다가 결국은 후손마저 끊기죠. 그래서 철종을 데려오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한 사람의 책임은 아닌 것 같아요. 안 좋은 조건이
교묘하게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