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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2 -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 편 ㅣ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2년 7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랜만에 유시민 님의 책을 읽었단다. 유시민 님이 유럽 도시 여행을
주제로 책을 쓰신다고 하셨고, 몇 년 전에 1권이 나왔단다. 원래는 1권이 나오고 얼마 후에
2권이 나올 예정이었으나 전무후무한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책 출간이 계속 미뤄지다가 올해 나왔단다.
코로나 전염병이 창궐해 있는 동안 해외 여행에 대한 규제가 있어서 자유롭게 여행을 하지 못하다가 올해 그 규제가 풀리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해외 여행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단다. 그래서 2권이 이번에
출간된 것 같구나. 유시민 님이 2권에서 소개된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을
여행한 것은 코로나가 창궐하기 이전이라서 이전에 책을 출간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책을 보고 책에서
소개한 곳을 여행할 수도 있으니, 해외 여행의 규제가 풀어진 시점으로 출간 시점을 맞춘 것 같구나.
그런데 최근에 다시 전세계적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어서 다시 사람들이 해외 여행을 조심하게 되는 것
같구나. 하기야 우리나라의 명소들도 못 가본 곳이 얼마나 많은데… 급히
해외로 갈 필요 있겠는가. 더욱이 지구온난화로 전 세계가 끓고 있는데 말이야. 이젠 점점 여행하기 힘든 시절이 오는 것 같구나. 예전에 많이 다니지
못한 것에 대해 너희들에게 미안하구나.
1.
이번 <유럽도시기행 2>에
소개된 도시는 모두 네 곳이란다.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 아빠는
모두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드레스덴을 제외한 세 곳은 모두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란다. 드레스덴이란 곳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드레스덴 폭격으로 많은 희생자를
생겼던 곳으로 유명한데, 아빠는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통해서 그 비극적인 사건을 알게 되었단다. 좀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읽고 너희들에게 쓴 독서편지를 읽어보렴.
…
아무튼 이 네 도시에 대한 소개와 그 도시에 얽힌 역사 등을 유시민 님의 화법으로 재미있게 이야기해주고 있단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고, 이야기해주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어.
이 책의 차례를 보면, 유시민 님이 각 도시에 대한 느낀 점을 짧게
한 마디로 적은 것을 볼 수 있단다. 빈은 ‘내게 너무 완벽한’, 부다페스트는 ‘슬픈데도 명랑한’,
프라하는 ‘뭘 해도 괜찮을 듯한’, 드레스덴은
‘부활의 기적을 이룬’. 이 차례들을 보면서 왜 유시민 님은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아빠도 그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하면서 책을 펼쳤단다. 그러나 그가
직접 걷고 보고 느낀 감정을 그가 쓴 글에서 느끼기는 어렵겠지? 여행은 역시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 경험을
해야 해…
2.
이번 편지에서는 아빠가 뽑은 네 도시의 핵심 키워드 몇 개를 소개하고, 각
도시에 대해 유시민 님이 설명하는 부분 일부를 발췌해서 너희들에게 알려줄게.
먼저 빈. 빈의 키워드는 슈테판 성당, 비엔나 커피, 시씨, 마리아
테레지아로 뽑았단다. 슈테판 성당은 빈의 대표적인 건물이고, 빈에는
비엔나 커피가 없다고 반전이 있어서 키워드로 뽑았단다. 그리고 시씨는 빈 사람들이 좋아하는 역사 속
인물인데,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라서 뽑았단다. 시씨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황후였단다. 시씨는 애칭이고 본명은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라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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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7)
사람들은
비운의 주인공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지만, 빈 사람들이 시씨를 사랑하는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운명에 의해 ‘권력형 셀럽’이
되었지만 시씨는 ‘자기다운 삶’을 추구했다. 그녀는 남편이 황제여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혼인했다. 황후의 권력과
화려한 궁정 생활에서 의미와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남편이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빈을
떠나 여행자의 삶을 영위했다. 아름다운 몸과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고 처절한 노력을 쏟았고 신분의 차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 했다. 운명을 거부하거나 극복하지는 않았으나 운명에 갇히지도 않았다.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의미를 느끼는 인생을 살아나가려고 번민하고 도전했다. 그리고 그런 끝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역사의
위인은 아니었으나 사랑할 만한 미덕을 지난 황후였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니 시씨의 사진과 초상화를 마케팅
수단으로 쓰는 빈의 상인들을 욕하지 마시라. 그들은 시씨를 정말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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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프랑스 혁명과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엄마로 알게 된 마리아 테레지아도 빈을 대표하는 위인이란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책을
읽을 때도 든 생각인데,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책을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이번에도 들었단다. 그 시절 여성으로써 어떻게 그렇게 유능한 군주가 되었는지 궁금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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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4)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로지 타고난 성격과 재능 덕분에 유능한 군주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 형제가
없었기에 어려서부터 군주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고 권력 행사와 관련한 직접 간접 경험을 쌓았다. 쇤브룬
궁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내게 말했다. “리더십을 형성하려면 지적,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학습과 경험을 해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그런 기회를 얻는다면 누구라도 탁월한 리더가 될 수 있다. 나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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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도시 부다페스트의 키워드는 도나우강, 리스트, 언드라시 등으로 뽑았단다. 유명하지만 아빠에게는 낯선 도시 부다페스트. 이 도시를 흐르는 유명한 강 도나우 강이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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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도나우강은
알프스 남쪽 경계를 타고 동쪽으로 흐르면서 빈을 지난 다음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직각으로 몸을 틀어 남쪽으로 내려간다. 헝가리를 벗어날 때 다시 동으로 전향해 카르파아산맥과 발칸 산맥 사이의 협곡을 따라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등
발칸반도 북부를 가로지른 후 루마니아 남부 평원과 우크라이나 저지대를 거쳐 흑해에 들어간다. 숱한 지류를
끌어안으며 알프스의 발원지에서 흑해까지 3천 킬로미터를 달리는 도나우의 품에서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자라났다. 1990년대에 라인강과 연결하는 운하가 개통되어 이제 도나우 물길은 흑해에서 북해까지 통하게 되었다. 하류의 도나우는 잔물결이 흐르는 푸른 강이지만 빈과 부다페스트 구간의 도나우 상류는 그렇지 않다. 탁류가 빠르게 흐르는 위험한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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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만 보는 도나우 강이지만, 아빠 생각에는 한강만 못한 것 같더구나. 부다페스트를 대표하는 위인으로 리스트가 있단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젊은 피아니스트 임윤찬 님이 콩쿠르 대회에서 리스트의 12개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연달아 치면서, 그것도 리스트가 환생했다는 극찬을 받으면서 연주를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된 리스트가 바로
부다페스트 출신이라고 하는구나. 그리고 언드라시라는 사람을 소개해 주었는데, 아빠는 처음 들어본 사람이지만 헝가리에서는 꽤나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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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언드라시(Andrassy Gyula, 1823~1890)는 오늘날 슬로바키아공화국에 속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백작의 아들이었던 그는 소년 시절부터 민족주의 정치 운동에 참여했고 세체니 이슈트반의
눈에 들어 스물세 살에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848년 귀족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크로아티아 영토전쟁에
종군했으며 헝가리혁명 정부의 명에 따라 이스탄불로 파견되어 오스만제국 정부의 협력을 끌어내려고 했다. 혁명을
진압한 합스부르크제국은 그를 반역자의 두목으로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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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도시 프라하의 키워드는 얀 후스, 보헤미아, 성 바츨라프로 뽑았단다. 얀 후스와 성 바츨라프는 프라하의 유명한
위인인데 아빠는 역시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고, 보헤미아는 프라하와 관계가 있는 말인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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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89)
그래서
‘보헤미안’이라는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보헤미아인’에 해당하는 체코 말은 ‘체키’인데 뜻은 정반대에 가깝다. ‘체키’는 슬로바키아인이나 모라비아인 같은 소수민족을 제외한 보헤미아의 체코인을 가리키는 체코 말이고, ‘보헤미안’은 독일인과 집시를 비롯해 체코인이 아닌 보헤미아 사람을
지칭하는 외국어였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보헤미안의 뜻이
달라졌다. 유럽 사회의 주류로 지위를 굳힌 부르주아 계급의 틀에 박힌 도덕 규범이나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로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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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네 번째 도시 드레스덴의 키워드는 드레스덴 폭격, 부활, 아우구스트로 뽑아 보았단다. 드레스덴을 이야기할 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벌인 만행을 빼놓지 않을 수 없구나. 독일은
자신들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드레스덴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손해배상 이야기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했어. 전쟁은 이래저래 죄 없는 민간들을 불쌍하게 만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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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영국과
미국 공군은 1945년 2월 13일 밤부터 사흘 동안 네 차례 번갈아 드레스덴을 ‘융단폭격’했다. 그때마다 고열의 화염폭풍이 도심을 집어삼켰다. 군수품 공장과 기차역뿐 아니라 주택, 상점, 호텔, 술집, 교회, 성당, 병원, 오페라하우스, 영화관, 동물원, 학교, 엘베강의 선박까지 도심 반경 3킬로미터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터지고
녹고 부서지고 불탔다. 사망자만 20만 명이라며 연합국을
비난한 나치 정부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 폭격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몇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무너진 건물에서 시신이 나왔고 지하 방공호 한군데서 1천여 명의 시신을 찾은 일도 있었다. 체코 접경지 수데텐란트(보헤미아의 독일 국경 인접 지역)에서 쫓겨나 드레스덴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던 피난민들은 거주자 통계에 잡히지도 않았다. 당시 시신을 수습한 사망자만 3만5천 명이 넘었다. 독일이
‘엘베의 피렌체’라고 자랑했던 드레스덴에는 공장 몇 개 말고는
전쟁과 관계있는 시설이 없었는데도 연합국 공군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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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간단히 네 도시에 대해 소개를 해 보았단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역시 여행은 간접 체험보다는 직접 체험이 나을 듯 하구나. 유시민 님이 아무리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셔도
감흥이 크게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야. 다시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열렬히 기다리며
오늘 편지는 이만 마칠게.
PS:
책의 첫 문장: <유럽도시기행>
1권을 내고 제법 긴 시간이 지났다.
책의 끝 문장: 관용의 정신이 더욱 널리 퍼져 인간은 더 자유롭고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기를.
온몸을 적셔 준 ‘비엔나커피’의 달콤함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우울함을 덜어주었다. ‘이성은 고상할지 몰라도 사람의 내면을 항구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해. 매 순간 더 강하게 인간을 끌어당기는 것은 감각인지도 몰라. 어때? 그런 것 같지 않아? ‘비엔나커피’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잠깐, 오해를 피하려면 ‘비엔나커피’라고 따옴표를 한 이유를 말해야겠다. 빈에는 ‘비엔나커피’가 없었다. 딱 한군데, 부다페스트행 기차를 기다렸던 중앙역 로비의 비스트로에 ‘비엔나커피’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비엔나커피’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길다방 커피’에 생크림을 올린,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정체불명 음료였다. - P32
부다페스트의 화려함은 헝가리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열등감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상처를 감쪽같이 지워버린 빈과 달리 부다페스트는 그 모든 것을 내놓고 보여줌으로써 여행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증언하는 초대형 기억 공간을 조성한 베를린 말고는 부다페스트만큼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 적극 홍보하는 도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부다페스트에서 반드시 그런 것을 챙겨야 하는 건 아니지만, 사연을 알면 부다페스트가 더 정겹게 안겨 오는 느낌이 들 것이다. - P114
나는 얀 후스를 존경한다. 후스를 모른다고 해서 프라하 여행에 지장이 생기진 않지만 알면 프라하 공간과 체코 사람들의 정서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얀 후스(Jan Hus, 1372~1415)라는 ‘종교개혁가’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 후스가 그저 종교개혁가로서 프라하의 광장에 서 있는 건 아니다.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 P181
집은 건축주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종교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건축양식은 건축기술의 발전, 활용할 수 있는 건축자재의 변화, 건축주가 동원할 수 있는 재정의 규모 등 여러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건축주의 철학과 욕망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로마제국 시대에 지은 교회는 무섭지 않다. 아테네 도심 골목의 오래된 정교회들은 아담하고 소박하고 정겹다. 원래 성당이었던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웅장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대세였던 고딕 양식 성당들은 그렇지 않다. 높고 날카로운 첨탑과 장중한 스테인글라스로 ‘경외심’ 또는 ‘공포감’을 강요한다. 고딕 양식은 가톨릭교회가 세속권력과 결탁하거나 스스로 세속권력을 능가하는 권력이었던 시대의 지배적 건축양식이다. 그들이 그런 집을 지은 것은 민중이 그곳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복종하기를 원해서였을 것이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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