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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평전 -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
강주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7년 6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휘소라는 불운의 과학자가 있단다. 그야말로 전도유망한 과학자였는데, 불운의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죽고 만 과학자였어. 그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할 정도로 뛰어난
과학자였단다. 그가 일반 대중에게 유명하게 된 것은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하는 소설을 통해서였단다. 과학자
이휘소를 다룬 소설이었는데, 이 소설이 공존의 히트를 치면서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많은 사람들이 과학자
이휘소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단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다룬 이휘소는 실제와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 문제였단다. 소설의 재미를 위해서였겠지만, 실존 인물을 너무 왜곡해서 그렸다고 했어. 그가 하지도 않은 핵무기
개발자로 나오고, 그의 죽음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내용도 있다고 하더구나.
이런 진실의 왜곡으로 이휘소의 유가족들은 힘들어했고, 그로 인에 명예훼손
등에 대한 법적 대응을 했대. 이휘소 박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강주상 님도 이휘소 박사에 대한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고, 이 책도 그런 취지로 썼다고 하셨어. 2007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아빠가 읽은 것은 2017년 이휘소 박사 40주기에 맞춰 나온 개간본이란다.
…
아빠도 이휘소 박사님을 이름만 알지,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잘 몰랐어. 작년에 힉스 보손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 ‘힉스
보손(힉스 입자)’라는 이름을 붙인 이가 이휘소 박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이휘소 박사님에 관한 책이 있으면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단다.
1.
1935년 1월 서울에서
태어난 이휘소.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의사였다고 하는구나. 비록
일제 시대이긴 했지만 부모님이 모두 의사이다 보니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대. 그런 집안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으로 피난길을 떠날 때부터였어. 마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아버지가 그만 실족사로 돌아가시고 말았어. 그 때부터 어머니 혼자 4남매를 기르셨다고 하는구나. 이휘소는 4남매의 장남으로써 계속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끊이질 않았어. 유학을
가서도 어머니에게 자주 편지를 하곤 했단다. 당시에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쉽게 갈 수 없었으니 편지가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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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8)
“요사이는 밤에 자기 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 당시의 사정이 어쩌면 그렇게 한국의 과거 수년과 똑같은지, 마치
저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꿋꿋이 싸워 오신 그리고 아직도 싸우시는 어머님의 거룩한
모습은 저로서는 항상 자랑이요, 힘의 근원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알지 못하던, 그리고 알려고 해 본 일이 없던 사실 하나를 안 것 같습니다. 즉 여성의 힘, 심리 그리고 도덕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불안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부르는 흑인 영가 <켄터키
옛집>의 한 구절에서 이상한 마음의 동요를 느낍니다.
잘 쉬어라 쉬어,
울지 말고 쉬어,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그들이
이 구(句)와 자기네의 운명을 비교하고 몸부침치는 것- 어미니, 6.25 때 우리 광릉에서 지내며 똑 같은 경험을 한 것을
아직 기억하시죠?
아름답고
거룩한 어머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재건이야말로, 전쟁
이상으로 쓰라린 시기이다’라고 이 책에는 씌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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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을 마치고 미국에서 한국의 장학생들의 유학 지원을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때 뽑혀서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단다. 원래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전공하고 있었지만,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이휘소는 미국에 가서는 물리학을 공부했단다. 낯선 곳에서 처음에는 무척 힘들어했지만, 그는 이 유학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하여 1분1초를 허투루 쓰지 않았단다. 그는 오하이오 주 마이애미 대학교를 유학간 지 1년 반 만에 졸업했고, 이어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했단다.
2.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을 마치고, 명문 중에 하나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한단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박사 자격 시험인 예비
시험을 면제까지 해주는 파격적인 대우였어. 그리고 그는 3년이
채 안되어 박사가 되었단다. 그리고 이 학교의 대학교의 물리학과 조교수에 임명된단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 일곱 살이었단다. 그것도 한국 나이로…
…
그가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가족들이 있는 국내 소식도 관심을 갖고
보았어.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그것에 대해 이휘소는 심한 절망감과 실망감을 느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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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이휘소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절망감을 느꼈다. 4.19를 통해 그나마 민주적인 정부가 세워지나 싶었는데 1년 만에 군인들에 의해 뒤집히고 말았던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를 절실하게 느껴온 이휘소는 해방된 지 15년이 되도록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
안타깝기만 했다. 더욱이 중남미의 어수선한 나라들에서나 벌어지는 군사 쿠데타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에 그는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동료 교수들이 한국 상황을 화제에 올리면 이휘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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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이휘소는 계속 군사정권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대. 나중에
이휘소가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죽고 나서 훈장 수여에 대한 제의가 왔을 때도 미국 유학 시절 만나 결혼한 이휘소의 부인 심만청 님은 이휘소의 이런
정치적 성향 때문에 받지 않겠다고 했단다. 하지만 어머님이 받는다는 것은 동의한다고 하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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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얼마
후 재미 과학 기술자 협회 부회장인 강경식은 당시 한국 물리학회 간사장이던 조병하 교수를 통해 이휘소에 대한 정부 포상을 건의한다. 세계적인 학자였으므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명예의 흔적을 남겨 놓자는 취지였다. 어렵게 포상은 결정되었지만 정작 이휘소의 부인 심만청이 포상을 거절한다. 평소
남편 이휘소가 유신 체제에 반대해 왔는데, 그런 독재 정권으로부터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남편의 철학에
어긋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휘소의 어머니가 대신 받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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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휘소는 우리나라 최초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초대 받게 되어, 1년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연구했단다. 이후 그의 이력을 보면 세계 물리학계의 주요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정교수, 앨프레드 슬론 재단 연구원, 스토니 브룩 대학교 이론 물리 연구소 교수,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 이론 물리학 부장, 시카고 대학교 물리학과 겸임 교수 등 화려한 이력이었단다. 이 책에는 그가 연구한 분야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데,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쉽게 짧게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역시 입자물리학의 세계는 어려운 분야인 것
같구나. 그가 공부는 입자물리학은 원자를 구성하는 아주 작은 입자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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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주로
양성자와 중성자들이 모여서 결합된 원자핵을 연구하는 학문이 핵물리학이다. 하지만 양성자, 중성자 이외에도 이만큼 무거운 중입자(重粒子)가 있고 중간 정도의 질량을 가진 중간자(中間子)가 있다. 또한 양성자와 중성자는
u, d의 두가지 맛깔의 쿼크로만 구성되나 다른 맛깔의 쿼크 결합체인 강입자들이 있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맛깔인 t 쿼크를 포함하는 강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명이
너무 짧아서 강입자가 만들어지기 전에 소멸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모두 대상으로 가장 바탕이 되는 기본입자를
연구하는 학문이 소립자 물리학 또는 간단히 입자 물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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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짧은 생의 마무리한 이휘소의 물리학 연구는 미완성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이휘소가 했던 연구들은 많은 물리학자들의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999년
토프만과 펠트만이라는 사람이 노벨 물리학상을 타는데 가장 기여한 사람이 이휘소 박사였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이휘소 박사는 돌아가신 후에도 많은 동료 및 후배 과학자들에게 도움을 주셨어. 아마 그때 생존해 계셨으면
같이 수상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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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토프트와
펠트만은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한다. 물론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이 두 사람의 업적이지만 토프트가 언급했듯이, 이휘소의 방법은 상호 보호적인 방법으로 그
업적을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 만약 1999년에 이휘소가
생존했다면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그렇다’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업적은 인정되지만 상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노벨상을 둘러싼
논박은 항상 존재한다. 하긴 와인버그의 경입자 모형에 대하여도 시비를 걸 수 있다. 게이지 대칭은 이미 글래쇼가 발표했고, 자연 대칭 파괴는 힉스가
알아낸 것이므로 와인버그 논문에 새로운 것이 없다고 폄하하는 식이다. 실제로 워드는 이런 생각으로 와인버그와
똑 같은 결론에 이르렀으나,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물리학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이미 알려진 인간의 자연에 관한
지식에 학자 자신의 기여를 보태 학문이 발전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여는 과거의 관련이 있고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기여로 물리학이 크게 도약하였다면 그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 와인버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게이지 대칭과 자연 대칭을 결합하여 물리학의 도약을 이루었다. 이휘소는 토프트와 상호 보완적인 방법으로 자연 파괴하는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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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죽음이 안타깝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서, 이휘소 박사에 대한 잘못된 진실을 바로 잡았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그가 위대한 우리나라의 과학자였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고 말이야.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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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294)
일반
독자들의 상당수는 진실과 상관없이 이휘소의 의문사를 믿고 싶은 마음도 있는 듯하다. 물론 순전히 정서적인
이유다. 그냥 세계적인 물리학자라는 것보다 일부러 수술을 해서 핵무기 설계도를 뼛속에 감추는 등 조국을
위해 비밀 사업을 추진하다 외국 정보 기관에 암살된다는 스토리는 얼마나 감동적이고 드라마 같은 대목인가..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드라마일 뿐이다. 소설로 읽고 소설적 감동을 얻는 건 독자에게 달렸지만 진실은 진실대로
분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휘소는 사실 그대로 세계 정상급의 물리학자로 과학사에 큰
획을 그었고,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했으며 한국 물리학계의 발전과 도움을 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다.
이것이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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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1977년 6월 16일, 미국 브라운 대학교 강경식 교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책의 끝 문장: 만일 그렇다면 이 전기가 얼마나 그의 의도에 충실했는지
부끄러운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