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노신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친구가 죽었어. 그처럼 규칙적인 사람도 해내는 걸 보면 죽는다는 건 아주 평범한 일임이 틀림없겠군. 하지만 분명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겠지. 아마 삶에 애착이 있었으니까 자서전을 썼을 게야. 그렇게 평범해 보이던 사람도 어느 날엔가는 훌쩍 세상을 뜨게 된다는 걸 누가 알겠나.


(14)

나는 여러 번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으로 뭔가 익숙한 것을 할 수 있다는 편안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더 이상의 두려움은 생기지 않았고, 죽음의 느낌이 야기하던 놀라움은 익숙함과 친근함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으로 옮겨 갔다. 이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잠이나 휴식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으로 이름 붙이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미 그 길을 지나간 친구들을 만나길 희망하면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감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가 보다. 아마도 한 인간의 죽음이 중요한 경제적 사건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언을 남기는 것일 게다. 그래,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나는 내 주변을 정리하려 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또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20)

하지만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지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림이나 비통함이 없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삶일까?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일을 해냈고,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 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48)

<얘야, 이 통장에는 일과 땀이 모여 있는 거란다. 돈을 낭비하는 건 완성된 일을 망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건 죄악이지>라고 하는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 그러면 그 돈은 어디에 쓰기 위한 거죠?>라고 묻는다면 아버지의 대답은 이럴 것이다. <노후를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건 그저 사람들이 해보는 소리지. 돈이란 근면과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노동의 결과를 보기 위해 존재하는 거란다. 이 통장에는 삶의 내용이 들어 있고, 그건 평생의 결실이야. 여기에 내가 열심히, 그리고 검소하게 살았다는 기록이 들어 있는 것이지.> 아버지에게 노후의 시간이 다가왔다.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공동묘지의 대리석 비석 아래 잠들어 있었고 (비석을 만드는 데 정말 많은 돈이 들었다고 아버지는 경건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곤 했다), 나는 좋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무겁고 부어오른 다를 이끌며 예전보다 일감이 줄어든 소목 공장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저축한 액수를 계산했으며, 일요일마다 집에서 홀로 통장을 꺼내어 자신의 정직한 삶의 합계를 들여다보았다.


(52)

지금도 아버지는 일을 하며 셈을 하고, 어머니는 걱정과 사랑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으며, 나는 은밀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아이로 남아 있는 것이다.


(57-58)

<행복한 청춘 시절>이라는 말은 얼마나 단순한 표현인가! 그런 표현과 더불어 우리는 분명 그 당시 건강했던 치아와 위장을 생각을 따름이지 고통스러워하던 영혼은 간과해버린다. 우리에게 그때처럼 긴 인생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즉각 우리의 존재를 바꾸려 할 것이다. 나는 그때가 내게 가장 불행했던 시기였고, 동경과 고독의 시기였음을 안다. 하지만 내가 변화하고 그 우울했던 청춘을 두 손으로 다시 붙잡는다고 해도, 나의 영혼이 또다시 그처럼 한량없이 절망하고 괴로워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97)

유희란 진지한 일이며, 규칙과 구속력이 있는 질서가 유지된다. 유희는 어떤 것에 대해, 오로지 어떤 것에 대해 깊이 몰두하거나, 감미롭게 또는 열정적으로 집중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몰두하는 것을 그 밖의 다른 것으로부터 격리하고, 그 규칙에 따라 구분하고, 주변의 현실에서 떼어 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놀이는 축소된 규모가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리라. 어떤 것이 축소되면, 그것은 다른 현실로부터 분리되고 그 자체로 더욱 넓고 심오한 세계가 된다.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는 우리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다른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떼어 내는데 성공하여 우리를 구분하는 마법의 원 한 가운데에 있다.


(103-104)

그러나 다른 면을 보자. 그것은 유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유희가 아니었다. 위대하고 힘든 것이 사랑이다. 또한 가장 행복한 사랑일지라도 도가 지나치면 끔찍하고 부담스러워진다. 고통 없는 사랑이란 없다. 사랑으로 죽을 수 있고, 고뇌를 통해 사랑의 원대함을 측정할 수 있다면! 기쁨은 무한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너무도 행복했고 처절할 정도로 서로의 손을 꼭 쥐었다. 그대, 나를 구원해 주오. 나의 사랑은 너무 지나치오. 아직 우리 머리 위에 별들이 있고, 사랑과 같이 커다란 것이 들어가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어 다행이오. 우리는 침묵이 우리를 억누르지 못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자요, 안녕. 영원을 시간의 조각으로 찢어 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잠을 자지 않았고, 무거운 마음이 되어 사랑에 울며 목이 메었다. 빨리 날이 밝아 그녀의 창가에 인사할 수 있기만을 기다리는 시절이었다.


(154-155)

절약이란 수동적인 미덕이며, 안정된 생활에 대한 희구이자 닥쳐올 미래와 위기와 우연에 대한 두려움이다. 탐욕이란 잔인할 정도로 우울증과 유사하다. 아버지는 엄숙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주 훈계를 했다. “공부만 해라, 얘야. 공무원이 되기만 하면 생활이 <안정>된단다. 그게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란다. 확실한 기반과 안정과 자신감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할 일이 없지.” 나무처럼 크고 강했던 아버지가 그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나약하고 응석받이인 아이가 어디에서 용기를 배웠겠는가? 내게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성향이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었으며, 육체적인 충격이 나타나자 겁을 먹고 움츠러든 나는 삶에 대한 방어적 두려움을 느꼈고, 그 두려움을 삶의 질서로 삼았던 것이다.


(199-200)

삶이란 사건들이 아니고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란 우리의 지속적인 작업이다. 그랬다. 나의 삶도 내가 깊이 몰두한 일종의 과제 같은 것이었다. 내게 소일거리가 없었다면 무척 곤혹스러웠을 게다. 은퇴하게 되었을 때 난 할 일을 가지기 위해 여기 이 집과 정원을 샀다. 씨를 뿌리고 벌초하고 물을 주는 일은 그 밖의 일이나 자기 자신까지 잊어버리게 될 정도로 몰두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곳은 정말 어릴 때 앉아 놀던 톱밥으로 덮인 작은 울타리 같기도 했다. 그곳에서 많은 기쁨을 느꼈고, 나를 한쪽 눈으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는 방울새도 만났다. <너는 대체 누구지?> 방울새야, 난 울타리 너머에 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주 평범한 사람이란다. 지금 나는 정원사가 되었고, 이 일은 노신사가 가르쳐 주었단다. 거의 모든 일이 헛되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모든 일에는 신기하고 지혜로운 질서가 있고, 곧고 필연적인 길이 있다. 어려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한 인간에 관한 연관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이 단순하고 질서 정연한 목가적인 삶이 말이다.


(201-202)

그건 우울증 환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어머니가 관련되어 있다. 어머니는 나를 응석받이로 만들었고, 나 자신 속에 있는 억척스러운 자아의 나약한 동생 같은 인물이 내게 형성된 것이다. 둘 다 분명 이기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억척이는 공격적이었고, 우울증 환자는 방어적이었다. 이 우울증 환자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소극적이었고, 오로지 안전한 생활만을 원했다. 그는 아무데에도 끼어들지 않으려 했고, 안전한 항구나 방풍막 같은 것만을 찾았다. 무엇보다 그 때문에 공무원이 되었고, 결혼을 했고, 자신의 주위에 울타리를 친 것이다. 우울증 환자는 첫 번째 자아인 평범하고 착한 인간과 지내기가 가장 편했다. 규칙적으로 일하는 생활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은신처를 만들어 주었다. 억척이의 불만에 찬 명예욕은 때로 우울증 환자가 느긋하고 편안히 지내는 데 방해가 되기는 했지만, 생활이 더욱 윤택해지는 데에는 쓸모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세 개의 삶은 서로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으나 조화를 이룬 셈이었다. 평범한 자아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일을 했고, 억척스러운 자아는 그 일을 상품화하면서 한눈팔지 않고 이 일은 하고 저 일은 하지 말라는 지침을 정해 주었으며, 우울증 환자인 자아는 가장 괴로워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우울증 환자인 자아는 가장 괴로워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았고 모든 일을 적당히 처리했다. 그처럼 세 개의 상이한 본성이었지만 서로 불화하지는 않았다. 말없이 타협했고, 아마도 서로를 배려하기도 했을 것이다.


(212)

대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인생이 있었던 건가. , 다섯, 여덟?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삶이 있었다. 내게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고, 조금 더 맑은 정신이 든다면 일련의 또 다른 삶들을 발견하게 되겠지. 아마도 전혀 연관성이 없고, 단지 일회적으로 일어났거나 한순간 동안만 지속되었던 그런 삶들이 나타나리라. 어쩌면 한 번도 나타나지 못했던 삶들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의 삶이 다르게 진행되었거나, 내가 다른 존재였거나, 다른 상황이 주어졌더라면 내게서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서 나와는 다른 삶을 영위했을 수도 있다. 만일 내가 다른 여자와 살았더라면 내게서는 호전적이고 흥분하기 쉬운 인간이 나타났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어떤 상황에서는 경솔한 인간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건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것도 배제하지 못한다.


(215)

사람은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 집합 속에 평범한 인간, 우울증 환자, 영웅, 억척이 같은 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사람은 그처럼 뒤섞인 무리로 이루어진 존재이지만, 이 무리는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늘 그중 누군가가 앞장서서 한동안 길을 인도한다. 그가 지도자라는 걸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왕의 깃발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 깃발에는 <내가 자아>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가 나의 자아이다. 이건 간지 단어에 불과하지만 강력하고 거창한 단어이다. 그가 자아인 동안 그는 집합의 지배자이다. 그 후 또다시 누군가 무리 중의 다른 인물이 앞으로 헤쳐 나오고, 이제는 그가 왕기(王旗)를 들고 인도하는 자아가 된다. 이 자아는 단순히 명분일 뿐이며, 그런 깃발이 그저 이 무리의 단일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집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이 공통된 표지도 필요하지 않으리라. 단순하고 단지 유일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을 사는 동물에게는 자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가 복잡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 자아를 우리의 내면에 각인시키고 최대한 부각시켜야 한다. <여길 보라,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237)

우리들 개개인은 우리를 이루며, 개개인은 무한대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집합인 것이다. 단지 자신을 보라. 네가 거의 인류 전체를 망라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건 끔찍한 일이다. 네가 죄를 지으면 그들 모두에게 벌을 내리고, 그 거대한 집합이 너의 모든 고통과 저속함을 감당한다. 너는 그 많은 사람들을 저속하고 헛된 길로 인도해선 안 된다. 너는 나이고, 네가 인도자이며,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 모든 인물들을 너는 어디론가 이끌고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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