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얼마 후 재미 과학 기술자 협회 부회장인 강경식은 당시 한국 물리학회 간사장이던 조병하 교수를 통해 이휘소에 대한 정부 포상을 건의한다. 세계적인 학자였으므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명예의 흔적을 남겨 놓자는 취지였다. 어렵게 포상은 결정되었지만 정작 이휘소의 부인 심만청이 포상을 거절한다. 평소 남편 이휘소가 유신 체제에 반대해 왔는데, 그런 독재 정권으로부터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남편의 철학에 어긋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휘소의 어머니가 대신 받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18-19)

이휘소는 42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74년부터 전산화된 고에너지 물리학 데이터데이스에는 비록 60여 편밖에 수록되지 않았으나 전체 인용 횟수는 1만 회 이상에 이르고 있다. 논문의 인용 횟수는 해당 논문이 학계에 미친 여향을 가름하는 가장 기본적인 잣대로, 이론 분야에서 총 1만 회가 넘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논문들의 중요성은 충분히 입증된다.


(67-68)

요사이는 밤에 자기 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 당시의 사정이 어쩌면 그렇게 한국의 과거 수년과 똑같은지, 마치 저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꿋꿋이 싸워 오신 그리고 아직도 싸우시는 어머님의 거룩한 모습은 저로서는 항상 자랑이요, 힘의 근원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알지 못하던, 그리고 알려고 해 본 일이 없던 사실 하나를 안 것 같습니다. 즉 여성의 힘, 심리 그리고 도덕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불안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부르는 흑인 영가 <켄터키 옛집>의 한 구절에서 이상한 마음의 동요를 느낍니다.

잘 쉬어라 쉬어, 울지 말고 쉬어,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그들이 이 구()와 자기네의 운명을 비교하고 몸부침치는 것- 어미니, 6.25 때 우리 광릉에서 지내며 똑 같은 경험을 한 것을 아직 기억하시죠?

아름답고 거룩한 어머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재건이야말로, 전쟁 이상으로 쓰라린 시기이다라고 이 책에는 씌어 있습니다.


(102)

주로 양성자와 중성자들이 모여서 결합된 원자핵을 연구하는 학문이 핵물리학이다. 하지만 양성자, 중성자 이외에도 이만큼 무거운 중입자(重粒子)가 있고 중간 정도의 질량을 가진 중간자(中間子)가 있다. 또한 양성자와 중성자는 u, d의 두가지 맛깔의 쿼크로만 구성되나 다른 맛깔의 쿼크 결합체인 강입자들이 있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맛깔인 t 쿼크를 포함하는 강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명이 너무 짧아서 강입자가 만들어지기 전에 소멸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모두 대상으로 가장 바탕이 되는 기본입자를 연구하는 학문이 소립자 물리학 또는 간단히 입자 물리학이다.


(119)

이휘소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절망감을 느꼈다. 4.19를 통해 그나마 민주적인 정부가 세워지나 싶었는데 1년 만에 군인들에 의해 뒤집히고 말았던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를 절실하게 느껴온 이휘소는 해방된 지 15년이 되도록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 안타깝기만 했다. 더욱이 중남미의 어수선한 나라들에서나 벌어지는 군사 쿠데타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에 그는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동료 교수들이 한국 상황을 화제에 올리면 이휘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52)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

이것은 이휘소가 물리학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던 대학원 시절부터 남모르게 가슴에 지녀 온 좌우명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남에게 뒤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이 알아낸 것을 뒤쫓아가는 연구가 아니라 스스로 물리학의 새로운 화두를 제공하는 선두 연구자가 되고 싶다. 이것이 학자로서의 그의 욕망이고 꿈이었다. 그리고 이런 욕망은 아마도 정상급 학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욕망일 것이리라.


(206)

이휘소는 인류 문화의 거대한 흐름에서 물리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자연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오늘 알아낸 지식은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유산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명입니다. 누가 이러한 지식을 알게 되었는가는 결국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한 시대, 한 국가가 이룩한 영감과 성취 결과는 영원히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213)

토프트와 펠트만은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한다. 물론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이 두 사람의 업적이지만 토프트가 언급했듯이, 이휘소의 방법은 상호 보호적인 방법으로 그 업적을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 만약 1999년에 이휘소가 생존했다면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그렇다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업적은 인정되지만 상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노벨상을 둘러싼 논박은 항상 존재한다. 하긴 와인버그의 경입자 모형에 대하여도 시비를 걸 수 있다. 게이지 대칭은 이미 글래쇼가 발표했고, 자연 대칭 파괴는 힉스가 알아낸 것이므로 와인버그 논문에 새로운 것이 없다고 폄하하는 식이다. 실제로 워드는 이런 생각으로 와인버그와 똑 같은 결론에 이르렀으나,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물리학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이미 알려진 인간의 자연에 관한 지식에 학자 자신의 기여를 보태 학문이 발전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여는 과거의 관련이 있고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기여로 물리학이 크게 도약하였다면 그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 와인버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게이지 대칭과 자연 대칭을 결합하여 물리학의 도약을 이루었다. 이휘소는 토프트와 상호 보완적인 방법으로 자연 파괴하는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214-215)

노벨상은 학문적 성휘에 대한 최고의 인정이다. 그러나 노벨상이 학자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학문을 닦다 보면 큰 공헌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공이 인정되는 과정이 노벨상이다. 마치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추구하는 태도로 노벨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흔히 업적도 중요하지만 행운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학문의 분야는 다양하고 심도가 깊은 것이다. 노벨상은 기초 연구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기초 과학 발전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과학상 분야에서 노벨상을 배출한 나라는 30여 개국인데 한국은 포함되지 않는다. 여러 명을 배출한 나라들은 G7처럼 경제 선진국이거나 러시아, 중국, 스페인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이 뚜렷한 나라들이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이고 역사와 전통에서는 어느 나라 못지않은 자부심을 자랑하면서도 아직까지 한 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한 것은 과학 교육과 기초 과학 연구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253)

1974년은 이휘소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의 해라 할 수 있다. 이미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나 참 입자의 탐색 논문과 발견으로 소립자 물리학자의 위상이 확고했다. 연구 활동이나 학계의 인지 면에서 그의 인생의 절정기에 있었다. 한편 한국에만 국한되는 이야기지만, 서울대 과학 교육 혁신을 위한 AID 평가 활동은 1980년애 이후의 한국 대학 교육 향상의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 학자들이 고에너지 실험 물리학 분야에서 국제 공동 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293-294)

일반 독자들의 상당수는 진실과 상관없이 이휘소의 의문사를 믿고 싶은 마음도 있는 듯하다. 물론 순전히 정서적인 이유다. 그냥 세계적인 물리학자라는 것보다 일부러 수술을 해서 핵무기 설계도를 뼛속에 감추는 등 조국을 위해 비밀 사업을 추진하다 외국 정보 기관에 암살된다는 스토리는 얼마나 감동적이고 드라마 같은 대목인가..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드라마일 뿐이다. 소설로 읽고 소설적 감동을 얻는 건 독자에게 달렸지만 진실은 진실대로 분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휘소는 사실 그대로 세계 정상급의 물리학자로 과학사에 큰 획을 그었고,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했으며 한국 물리학계의 발전과 도움을 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다.

이것이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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