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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5 - 광해군에서 인조까지 ㅣ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5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 민음사 / 2016년 2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가끔씩 읽는 <역사저널 그날> 시리즈
5권을 읽었단다. 이 책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방송에
나왔던 내용을 편집한 책이라서 쉽고 재미있게 잘 써져 있었단다. 너희들이 조금 더 크면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더구나. 너희들이 역사를 좀 안 좋아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이번 <역사저널 그날> 5권에서는
광해군부터 인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단다. 우리 Jiny도
학교에서 역사를 배워서 광해군과 인조라는 사람을 들어봤는지 모르겠구나. 작년에 <역사저널 그날> 4권의 이야기가 임진왜란 이야기였는데, 그 다음 이야기라고 보면 된단다.
광해군도 왕인데 ‘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왕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란다. 연산군과 광해군… 이렇게 두 명의 왕이 왕자리에서 쫓겨났지. 사실 단종도 오랫동안 노산군으로 불렀는데, 단종은 쫓겨난 것이 아니라
삼촌한테 왕자리를 빼앗긴 것이니 그들과는 좀 다르단다. 그런데 연산군과 광해군도 좀 많이 다르단다. 연산군이 쫓겨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지만, 광해군이
쫓겨난 것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부당하다는 의견이 많이 있단다. 아빠도 오래 전에 한명기 님의 <광해군>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된 이후
광해군을 쫓아낸 것은 부당하고 생각하게 되었단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조선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 그 와중에 어려운 국제 문제를 해결해 가는 모습이 현명한 왕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단다. 당시 신하들 대부분은 명나라를 받들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광해군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대처했어. 당시 명나라는
쇠퇴해가고 있었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은 기병부대를 앞세워 세력이 커지고 있었거든. 광해군은 그런 후금을 오랑캐로 보지 않고 하나의 나라로 보았고, 그런
명과 후금 사이에 조선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거야. 그는 명의 눈치도 봐야 하고, 후금의 눈치도 보면서 요령껏 대처했단다. 명에서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을
때도 일단 원군을 보냈지만 후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전투에서 지면서 바로 항복을 했단다. 당시 이 원군을 이끌던 사람은 강홍립 장군이라는 사람인데 사전에 광해군과 의견 조율이 있었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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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계승범] 그렇죠. 명에 대한 광해군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죠. 게다가 명이 후금 진영으로 들어가 선제공격을 하겠다며 원군을 요청했는데, 광해군은
명나라 군대가 반드시 패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광해군은 조선이 명을 도와서 군대를 보내면 아까운 조선
병사들만 죽을 것이고 거기에 후금의 원한까지 사서 후금이 우리에게 보복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죠. 반대로
신하들은 ‘명이 분명 이길 텐데 우리가 미적거리면서 확실하게 돕지 않으면 나중에 후환이 있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누가 이길 것인가? 그 판단에 차이가 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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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 정세도 어려웠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내 사정도 어려웠어. 광해군은 여러 당파의 인재들을 등용하였고, 나라의 조세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대동법을 시행하려고 했단다. 대동법은
기득권의 거센 반발로 결국 경기도만 시범 적용하는 것으로 축소되었어.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들의 자기
밥그릇 챙기는 버릇은 알아줘야겠구나. 광해군의 콤플렉스는 자신이 적자가 아닌 서자라는 사실이었어. 그래서 늘 역모 사건에 대한 걱정이 있었던 것 같아. 실제로 적정자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자는 역모가 발생하기도 했단다. 이 사건이 진압되긴 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여덟 살이었던 영창대군도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단다. 물론
영창대군은 이 역모와 관련이 없었지. 지금은 여덟 살로 어리지만 그가 스무 살이 된다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
강화도로 유배를 간 영창대군은
불을 뜨겁게 달군 방에서 죽게 되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이 이정표라는 사람이란다. 광해군의 지시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구나. 광해군이 잔인하다고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권력 싸움으로 상대진영을 죽이는 것은 아주 흔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드문 것도 아니었단다. 태종이나
세조 모두 가족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잖니.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엄마이자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도 폐위시켰단다. 자신의 친엄마는 아니지만, 현재는
자신의 엄마이니, 엄마를 폐위시킨 격이 된단다. 위에서 아빠가
이야기한 것들이 인조 세력이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들이야. 명과 후금 사이의 줄다리기 외교를 한
것은 조선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고,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것은 권력 다툼의 부산물이라고
보면 이것이 과연 반정을 할 정도의 잘못이냐 라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날까지 계속 논란이 되었던 거야.
1.
하지만 인조반정은 손쉽게
성공하고 만단다. 광해군도 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반정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대. 지나가는 소문으로 흘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고, 반정이 일어나고 왕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유배 생활. 유배를 가서도 18년 동안 지내고 나서 나이
들어 죽었다고 하는구나. 참, 그의 삶도 참 파란만장하구나.
만약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고 광해군이 계속 왕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후금이 이름을 바꾼 청나라와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구나. <역사저널 그날> TV 프로그램의 패널로 참여하신 역사학자
최태성 님은 더 낙관적으로 보시더구나. 인조반정, 참 안타까운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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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최태성] 일단 명나라는 멸망했을 거 아니예요. 그럼 광해군 그늘 밑에서 친청
세력이 성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실제로 이로부터 100년
뒤에 북학파가 나와서 청의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잖아요.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아마 그런 세력이
더 일찍 형성되었을 테고, 청의 문물을 빨리 수용하면서 근대 사회로 일찍 진입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일제강점기도 없었을 테고 산업화도 더 빨라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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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법. 인조 반정은 일어났고, 인조와 반정세력은 이제 자신들의 나라로 만들려고
했어. 무너져가는 명나라에 무조건 숭배하고, 강력해지는 후금을
멸시하고는 감각 떨어진 세력들. 그리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데 기여를 했다고 공신책봉을 하는데, 왜 나는 적게 주냐고 불만인 사람들… 그릇이 딱 그 정도에 모양도
엉망인 그릇들이었단다. 인조 또한 준비된 왕이 아니니 우왕좌왕. 그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진 신하들의 이야기나 따라야지…
공신책봉에 불만을 가졌던
이 중에 이괄이라는 사람이 변방으로 좌천까지 되고 역모를 꾸민다는 누명까지 쓰자 화가 나서 실제로 난을 일으킨단다. 역사는 이괄의 난이라고 불렀어. 이 한 사람이 일으킨 난도 제대로
막지 못하고 한양을 두고 공주성까지 도망을 가는 것이 당시 인조와 측근 세력이었단다. 그러면서 후금을
쳐야 한다는 소리를 하다니… 이괄은 한양까지 점령을 했어. 그렇다고
이괄의 군대도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다 보니 오래 가지는 못했단다. 한양 입성 3일만에 정규군에 의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단다.
이 반란에 참여했던 한윤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반란이 실패하고 후금으로 도망가서 투항했단다.
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 있고, 조선 조정에 미움 박힌 그가 후금에 가선 조선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조선 조정이 갖고 있는 후금에 대한 의견에 거짓말까지 더해서 이야기를 했겠지. 당시 후금은 누루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정권을 잡았는데, 홍타이지는
늘 조선에 강경한 자세를 보였던 사람이란다. 거기에 한윤의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그것이 직접적 원인은 아니겠지만, 후금은 명을 공격하기 전에 후방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을 쳐들어왔단다. 정묘호란이었어.
이때 한윤은 후금의 앞잡이가
되어 함께 쳐들어왔단다. 후금의 기병부대를 조선이 막을 힘이 있었겠니.
다시 도망가야지. 이번에는 강화도로 도망을 갔단다. 기병부대가
주력인 후금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육지에 있는 백성들이 어떻게든 나 몰라라 하고 자신들만
살겠다고 강화도에 콕 박혀 있는 인조와 신하들. 후금은 여기서 오래 시간을 끌 수 없어서 먼저 화친
요청을 했고,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형과 아우 같은 관계를 갖자고 했단다. 인조는 이에 동의하고 강화도에서 나와 한양에 입성했단다.
지금이라도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후금과 사이를 좋게 유지해야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후금에 대한 자세는 오랑캐를 보는 듯한 자세였단다. 외교 사절단이 와도 오랑캐 취급을 해서 그들 속을 뒤집어 놓는 등 다시 사이가 급격하게 안 좋아졌단다. 얼마 뒤 홍타이지는 다시 조선을 쳐들어왔단다. 인조는 이번에도 강화도로
도망을 가려고 했지만, 타이밍을 놓치고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단다. 남한산성이
지대가 험하긴 하지만, 바다 위에 섬도 아니고 날씨는 엄청 추운 겨울이고, 먹을 것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몰래 강화도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빙판길에 넘어져 다쳐 다시 남한산성으로….
이 싸움은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고, 산성 안에 갇혀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겠니… 거기에
강화도 마저 무너지고 말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단다. 사실 강화도에 왕과 신하들의 가족들이 대피하고 있었거든… 결국 조선의 왕 인조는 항복을 하고, 삼전도에서 삼배구고구례라는
굴욕을 감당해야겠단다. 이 일을 인조 속마음은 굴욕이라고 생각했을지는 잘 모르겠구나. 그저, 휴,, 살았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어. 왕이 되면 안 될 사람.
…
오늘 이 이야기들은 아빠가
예전에 한명기 님의 <병자호란>을 읽고 해준 이야기들과
많이 겹쳤구나. 그 때 이야기해준 독서 편지를 찾아보면 조금은 더 자세히 나와 있단다. 참고하시고…
2.
광해군과 인조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이 책에는 당시 유명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온단다.
그 중에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도 나왔어. 허준은 아빠가 이미 다른 책을 읽고 쓴 독서편지에
여러 번 소개를 했던 것 같아서 생략할게. 또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말이야. 우리나라 의사의 원탑이라고 할 수 있잖니.
그리고 또 한 사람 허균. 학교에서 허균이라는 사람은 국어교과서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사람으로 배웠던 기억이 있어. 아빠가 학창 시절 역사에
관심이 없어서 역사 교과서에도 그가 나왔는지 잘 모르겠어. 나중에 커서 허균이라는 사람의 실체를 알고
그의 가치관과 그의 최후를 알고 놀랬던 것이 있단다. 그리고 아빠가 좋아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뽑기
시작했단다.
아빠가 허균을 제대로 알게
된 책은 허경진 님이 쓰신 <허균 평전>이라는
책이었단다. 이 책을 일고 나서 허균 팬이 되어 그가 쓴 산문들을 찾아 읽고, 허균에 대한 책들도 찾아 읽고,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에 관한 책들도
찾아 읽었단다. 읽으면 읽을수록 허균이라는 사람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더구나. 허균은 한마디로 시대를 앞서 산 사람이었어. 예전에도 허균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기 때문에 오늘은 따로 안 하고, 허균이 주장한 호민론에 대해 설명한 부분만 발췌하는 것으로
대신할게. 아무튼 허균이 역모 사건으로 안타깝게 죽지 않았다면, 더
좋은 작품들을 남겼을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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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03)
[신병주] 허균의 혁명가로서의 면모를 가장 뚜렷이 보여 주는 글이 바로 <호민론>입니다. <호민론>에서는
백성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눕니다. 먼저 시키는 일만 하는 백성인 항민(恒民)이 있습니다. 또 세상에 원망을 품는 원민(怨民)이 있죠. 원민은
저항은 하지 않고 억울함을 속으로 삭힙니다. 반면 세상에 대한 울분이다 원한을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호민(豪民)입니다. 결국 활빈당을 조직해서 조정 관리들에게 맞서는 홍길동이 호민이라는
구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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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인조 세력이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광해군의 죄목은 숭청배명과 폐모살제였다.
책의 끝 문장: 이런 참담한 비극은 꼭 막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하죠.
[이다지] 저는 이 얘기 들으면서 중국의 유명한 명의 편작이 떠올랐어요. 편작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저보다 더 뛰어난 의사 두 명 있는데 모두 제 친형들입니다. 형들 중에는 큰 형님이 가장 뛰어나고, 둘째 형님이 그 다음입니다. 큰 형님은 환자가 증상을 느끼기도 전에 환자의 얼굴만 보고 무슨 병이 생길지를 미리 알고 치료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둘째 형님은 환자의 병세가 미약할 때 병을 알아내어 치료해 주니 환자들은 간단한 치료를 받은 줄로만 알고 크게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병이 커져서 심한 고통을 느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치료를 시작하니 환자들은 큰 병을 치료해 주었다고 믿고 고마워하는 것일 뿐입니다." 양생이란 결국 이런 개념이 아닐까요? - P77
[정철상] 허균이 남긴 글과 기록을 추론해 볼 때, 허균은 언변능숙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외향적이며 낙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죠. 실제로 허균은 임진왜란 시기에 왜군에 쫓기면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경치를 즐기고 누정마다 걸린 시판을 평하는 여유까지 즐겼다고 합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허균은 풍부한 직관적 감성을 지닌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러한 성격이 타고난 천재성과 결합되어 소설이나 시 등 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것으로 보입니다. 허균은 감성만 풍부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 세계를 다루는 이론 분야에도 능했습니다. 유학뿐 아니라 불교, 도교, 천주교 등을 깊이 있게 파고든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P94
[윤성은] 그렇죠. 이 인절미가 오늘 얘기하는 주제와 연이 깊은 음식이거든요. 백성들이 피란 온 인조에게 인절미를 가져다 줬다고 해요. 그때 이 떡을 처음 먹어 본 인조가 너무 맛있어서 ‘누가만든 떡이냐?’ 했더니, 답하기를 ‘이름은 정확히 모르나 임씨가 만든 떡입니다.’ 해서 임절미, 임절미 하다가 인절미가 됐다는 거죠.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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