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는 쉬지 않고 일단 덕에 온갖 관직을 죄다 맡았고 온갖 지위에 올랐다. 포품에서 소송을 벌였고, 전장에서 군단을 지휘했으며 집정관이 되어 공화국을 다스렸고 총독이 되어 속주를 다스렸다. 엄청난 재산을 손에 넣었다가 큰 빚을 지기도 했다. 팔라티움 언덕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가졌지만, 적들이 그 집을 불태우고 부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중요한 논문을 썼고 길이 남을 연설을 하기도 했다. 자식들을 얻었지만 잃기도 했다. 용감하기도 했지만 비겁하기도 했으며, 고집을 부리다가도 금세 아첨꾼이 되곤 했다. 칭송도 많이 받고 미움도 많이 받았다. 이 변화무쌍한 인물은 모순투성이지만 광채를 가득 뿜어내고 있다. 한마디로 키케로는 당대에서 가장 매력이 넘치는 흥미진진한 인물이다. 마리우스로 시작해서 카이사르로 끝나는 파란만장한 40년 세월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키케로와 끈끈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86)

이제껏 발보아는 왕권에 반기를 든 뻔뻔한 무법자에 불과했고 카스티야 법정에서 교수형이나 참수형을 선고받을 처지였다. 그런 사람이 막강한 추장의 처소를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세계사에 남을 결정을 내리게 된다. 코마그레 추장은 널찍한 석조건물에서 그를 맞이한다. 집에 가득한 사치품을 보며 발보아는 깜짝 놀란다. 코마그레는 손님에게 자발적으로 4천 온스나 되는 금을 선물하기까지 한다. 이번에는 추장이 놀랄 차례다. 최고의 예우를 갖춰 영접한 신의 아들들이, 신을 닮은 위풍당당한 이방인들이 금을 보자마자 망나니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사슬 풀린 개처럼 검을 뽑아 들고 주먹을 휘두르며 서로 달려든다. 다들 악을 쓰고 날뛰면서 금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 든다. 추장은 기가 막혀서 이 미친 짓거리를 경멸스럽게 지켜본다. 지구 끄트머리에 사는 자연인들은 문명인에게 자신들이 이뤄낸 온갖 정신적이고 기술적인 업적보다도 한 줌의 누런 금속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곤 한다. 이런 일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94-95)

스페인 정복자들의 성격과 품성에는 여러 요소가 희한하게 뒤섞여 있어서 설명이 어렵다. 그들은 여느 기독교도보다도 더 경건하고 신앙이 돈독하다. 열렬히 하느님께 기도하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르곤 한다. 용감히 자신을 희생하고 고통을 견디면서 영웅답게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뤄낼 수 있지만, 지극히 야비한 방식으로 서로를 속이며 싸우곤 한다. 그런가 하면 한심한 짓을 벌이는 와중에도 새삼 명예를 지극히 존중하는 면모를 보이며 자신들의 과제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놀라울 만치 정확히 파악하는 족속이 바로 그들이다. 발보아는 하루 전에는 묶여서 저항도 못하는 죄 없는 포로들을 사냥개들에게 던져주고 아직 따뜻한 사람 피를 뚝뚝 흘리는 짐승의 주둥이를 쓰다듬으며 흐뭇해했다.


(160-161)

그러나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운명은 야릇한 변덕을 부리며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에게 내맡기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세계사에서 몹시 불가사의한 순간이 되곤 한다. 어쩌다가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운명의 실마리를 손에 쥐게 되면 그 사람은 행복해하기보다는 겁에 질리기 마련이다. 영웅들이 세계를 놓고 벌이는 도박판에 끼어들게 되면 엄청난 책임을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벌벌 떨다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운명을 놓쳐버린다. 이런 경우 힘차게 기회를 움켜쥐고 위로 올라서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위대한 존재가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일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기회를 한 번 놓친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는 영영 오지 않는다.


(181)

위대한 순간이 속세의 삶을 사는 인간을 찾아 내려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엉겁결에 불려 나온 사람이 그 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모진 복수를 당하게 된다. 평온한 시절에는 조심성, 복종, 노력, 신중함과 같은 시민적 미덕들이 불길 속에 맥없이 녹아내리고 만다. 웅대한 순간은 늘 천재만을 택해서 불멸의 형상을 부여하는 반면, 우유부단한 자를 경멸하며 밀쳐낸다. 지상의 또 다른 신이기도 한 운명의 순간은 불 같은 팔로 대담한 자만을 들어 올려 영웅들의 천국으로 들여보낸다.


(265-266)

선생님, 오직 사랑만이 인간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부자라서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맞는 말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굶주리며 평생을 지주의 지배 아래에서 시달리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말하는 형제의 사랑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느라 지쳐 있습니다. 그들은 기다리기보다는 주먹을 휘두르게 될 겁니다. 돌아가실 날이 머지않으신 선생님께 감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상은 피로 뒤덮일 겁니다. 지주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자녀들까지 목숨을 잃고 능지처참을 당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들의 사악한 자취를 몽땅 없애려면 그래야 합니다. 선생님이 그릇된 선택을 하셨음을 살아생전에 직접 보시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생님이 평화로이 눈을 감으실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267)

이토록 한결같다니, 러시아 청년들은 정말 대단해! 이들은 모든 정렬과 힘을 증오와 살인에 쏟고 있어. 그것이 마치 성스러운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그들은 내게 좋은 일을 해 주었어. 두 청년은 나를 흔들어 깨웠어. 정말이지 그들 말이 옳아. 지금이야말로 나약함을 떨쳐내고 내 말을 실천에 옮겨야 할 때야. 죽음이 코앞에 닥쳤는데 아직도 주저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올바른 것은 젊은이에게서만 배울 수 있다니까. 젊은이가 스승이야!


(297)

위대한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곧잘 그가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떠나 멀리 도망쳐야만 하지요. 이렇게 된 것이 사필귀정입니다. 여기서 돌아가신다면 그 분의 삶은 완성되고 신성해질 겁니다.


(314)

인류 역사상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지구의 남극은 수천 년 동안, 아니 어쩌면 세상이 개벽한 이래로 인간의 눈길이 닿은 적이 없는 곳이었는데 찰나에 불과한 15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두 번이나 사람이 찾아온 셈이다. 그런데 그들은 두 번째이다. 한 달이 백만 번이 되는 기 세월 가운데 딱 한 달 차이로 2등이지만 인류 역사에서는 1등이 모든 것을 얻고 2등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지난 몇 주, 몇 달, 몇 년 동안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숱한 고통을 견디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건만 이 모두가 말짱 헛수고라니! “그토록 애를 쓰고 고생을 하며 아픔을 견뎌낸 대가가 고작 이것인가?” 스콧은 일기장에 이렇게 쓴ㄷ다. “이제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대원들은 눈물을 흘린다. 너무나 지쳤지만,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다. 참담한 심정으로, 희망을 잃은 사형수처럼 그들은 극점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옮긴다. 환호하며 그리로 달려가려고 했는데 말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려 들지 않는다. 다들 말 없이 지친 몸을 끌고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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