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상당한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낸 후, 국내에서 유일무이한 타이탄 전공자가 되어 대학원을 졸업했다. 물론 모든 박사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남의 연구를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에게 주는 학위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유일무이하다고 감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에서는 타이탄에 관심을, 학위논문 주제로 삼을 만큼의 관심을 갖는 자가 나 이후로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내 연구가 그렇게 지루해 보였나. 하하, 난 괜찮으니 혹시 지금 안쓰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면 거두길 바란다. 국내 천문학계는 대단히 좁은데, 천문학의 범위는 천문학적으로 넓어서 관심을 줄 대상이 너무 많다. 그리고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은 외롭지만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50)

76년마다 돌아오는 핼리혜성도 우리나라 사료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989년 고려 성종 때의 기록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말인 1835년까지 매번 핼리혜성을 관측하고 기록했다. , 성실한 공무원들이요. 우리 세대도 선조들 못지않게 훌륭하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는 <조선왕조실록>을 위시하여 수많은 사료가 인터넷으로 무상 제공되고 있다. 본래의 기록은 한자로 된 것이었지만 아주 많은 부분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주제별로 열람할 수도 있고 검색도 할 수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숙제로 내기 딱 좋다.


(55)

학생들은 대학에 학문을 배우러 오지 않는다. 초등학교 다음 중학교 다음 고등학교에 간 것과 같이 고등학교를 마쳤으니 대학에 진학할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학비보다 열 배는 비싼 등록금이요, 모두가 입어야 하는 교복 대신 모두가 가져야 하는 스펙을 등에 업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젊음은 싸구려 술과 술값보다 비싼 커피와 크고 작은 성추행과 미필자조차 향유하는 선배들의 군대식 갑질, 전공과목 들을 시간을 뺏는 교양 강의와 대학생다운 교양을 쌓을 틈을 주지 않는 전공 강의, 토익 시험과 한국사 시험과 각종 컴퓨터 자격증과 크고 작은 기업의 공모전과 인턴 경력에 소모된다. 과제로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제대로 된 글쓰기를 연습할 기회는 별로 없다. 대신 비문으로 A4 용지 다섯 장을 채워내는 끈기, 남의 것을 베끼되 표절 여부를 자동으로 검사하는 프로그램에 걸리지 않게 몇몇 표현을 바꿔치기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 비용과 시간과 어처구니없는 문화와 그 젊음은 대체 무엇을 위한 제물인가.


(59).

학자들은 교류를 통해 지식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기록을 발표한다. 지역적으로 가까운 사람들끼리만 학문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멀리 있는 학자들과도 교류하기 위해서 편지 형식을 취했던 것이 오늘날 논문의 전신이다. 논문에서는 과거 다른 사람이 발견하고 연구하고 논했던 내용을 정확히 밝히며 인용한다. 남의 업적을 내 것인 양하는 태도는 국가나 가족에 대한 긍지를 느낄 때나 쓰는 것이요, 남의 글 베끼기는 타자 연습할 때나 하는 일이다.


(107)

부모 중 누군가가 본인의 일을 잠시 포기하면서까지 아이를 위해 달려가는 것은 양육자로서의 의무다. 아이가 아플 때 엄마가 일을 포기하고 달려가는 건 누군가는 가야 하는데 남편이 안 혹은 못 달려가기 때문이다. 현실이 그런 걸 누가 비난할 수 있겠나. 비난의 대상은 아픈 아이도, 달려가는 엄마도, 못 달려가는 아빠도 아니다. 갈 수 있으면서 안 달려가는 아빠가 있다면 그를 비난할 수 있을 뿐이고, 그런 경우엔 그게 아빠가 아니라 엄마라도 비난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남의 가정 일에 비난할 자격과 기회가 있다면 말이다.


(131)

요즘은 우주탐사선 자료를 쓰고, 직접 관측하더라도 CCTV를 보며 원격으로 망원경에 명령을 보내기 때문에 그렇게 온몸으로 관측하는 일이 드물다. 심지어 망원경을 미국에 설치해놓았더니 시차 덕을 본다. 대낮에 내 연구실에 앉아 미국의 밤에 뜬 달을 관측하니까 밤을 지새울 필요도 없다. 그래도 하늘이 유난히 맑은 날이면, 노을도 차분히 지고 공기가 신선한 날이면 나는 관측하기 딱 좋은 날이네하고 중얼거린다. 그러고는 관측자의 일과를 상상한다.


(143-144)

촌극은 그렇게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주 뒤 인터뷰가 실린 호가 출판되자 국내 여러 언론과 매체에서 연락을 해왔다. 내가 <네이처>가 선정한 젊은 달 과학자 다섯 명에 들었다나.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니 흥미로웠다. <네이처>에서 무슨 엄청난 심사나 평가를 거친 것도 아니고 그저 기자가 여기저기 묻고 물어 몇몇 나라의 연구자들과 인터뷰를 했을 뿐인데, 그리고 기사를 읽어보았다면 엄청난 실력자를 골라내려는 목적의 인터뷰가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 대단한 침소봉대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당시 나는 대학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이 직급의 이름 풀이를 해보자면 호봉이 높은 박사후연구원이요, 연차나 경험은 조금 더 많지만 비정규 계약직 연구전담 인력이기는 매한가지라는 뜻인데 그걸 언론에서 약칭해 교수로 부르자 갑자기 설국열차의 꼬리 칸에서 앞칸으로 옮겨 탄 효과가 났다. 어이쿠야.


(180)

우주 탐사에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데, 당장 상업적으로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기 때문에 대기업이 돈을 대는 일은 드물다.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그러려면 정부에 우주 탐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것이 국가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비전을 제시해주는 자문단이 필요하다. 그 조언을 바탕으로 정책을 만드는 전문가, 이를 승인하는 최고결정권자와 국회, 그리고 그 실무를 담당하는 수많은 공무원이 현장을 방문하고, 공문서를 작성하고 낸 세금을 기꺼이 우주 탐사에 쓰도록 허락하고, 공감하고, 지지하고,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봐주는 국민이 필요하다. 당신이 꼭 필요하다. 천문학자가 아니라도 우주를 사랑할 수 있고, 우주탐사에 힘을 보낼 수 있다. 우주를 사랑하는 데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


(244-245)

뉴호라이즌스의 책임연구자 앨런 스턴 박사는 요즘도 명왕성을 행성이라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명왕성을 행성이라 부르든 왜소행성이라 부르든 134340이라 부르든, 사회에서 의도적으로 따돌림받고 소외당하며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자의 심정을 명왕성에 이입시켜려 하든 말든 명왕성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 멀고 어둡고 추운 곳에서, 하트 무늬처럼 보여 지구인에게만큼은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얼음평원 스푸트니크를 소중히 품은 채 태양으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중력의 끈을 잡고 있을 뿐이다. 그 곁에 오랫동안 지켜온 위성 카론은 명왕성의 위성으로 보기에는 너무 덩치가 커서 위성이 아니라 명왕성과 이중행성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카론 역시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든 개의치 않는다. 명왕성, 그리고 자신보다 더 작은 여러 위성 친구들과 서로 중력을 주고받으며 아주 오랫동안 멈추지 않을 자신들만의 왈츠를 추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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