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두 남자는 미소지으며 산책길을 따라간다. 그 모든 일이 그들 뒤로 아주 멀리 있다. 둘 중 한 사람은 이십오 년간 교직에 있었다. 대략 2500명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중 상당수는 심각한 난관에 처한 학생들이었다. 두 남자는 저마다 가정을 꾸린 아버지다. 그들은 선생님이 그랬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안다. 열등생이 지루한 푸념 속에 들어앉히는 희망, 그래 그거다…… 선생님의 말이라 급물살을 타고 추락하는 강물 위에서 공부 못하는 학생이 붙잡고 매달리는 부표일 뿐이다. 열등생은 선생님이 한 말을 반복한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고, 규칙을 구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순간적으로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놓여나기 위해하는 말이다. 아니면 사랑받기 위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47)

나를 구해냈던 그리고 나를 교사로 만들었던 선생님들은 그 일을 위해 양성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나의 무능한 학교생활의 기원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았다. 원인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거니와 나에게 설교를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위기에 빠진 청소년을 마주한 어른이었다. 그들은 절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던졌다. 그들은 나를 놓쳤다. 하지만 매일같이 다시 몸을 던지고 던지도 또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거기서 건져냈다. 나와 더불어 다른 많은 아이도 건져냈다. 말 그대로 우리를 낚아올린 것이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다.


(82)

선생이라는 직업이 필연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다시 시작하는 일. 만일 우리가 한 명의 학생을 우리 수업의 직설적 현재에 정착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의 앎과 그것의 활용에 대한 안목이 이 아이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그들의 실존은 식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막연한 결핍의 늪지에서 질척거릴 것이다. 물론 우리 선생들만이 그런 갱도를 파낸 것도 아니고, 그걸 메울 줄 몰랐던 것도 우리 책임만은 아니지만, 그때 그 아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 혹은 몇 년의 어린 시절을 우리 앞에 마주앉아 함께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망쳐버린 학교생활 일 년은 하찮은 게 아니다. 어항 속에서는 영겁의 세월이다.


(96-97)

하지만 선생이 거짓말을 모른 척하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좀더 깊숙이 숨겨진 이유인데, 명석한 의식에 비춰보자면 대충 이런 거다. 즉 그 아이가 교사라는 내 직업의 실패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발전시키지도 공부시키지도 못한 채, 그저 내 반에 들여놓고 그 아이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는 것이다.


(98)

지쳐버린 수많은 부모들은 사람의 진을 빼는 이런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척한다. 우선은 그들 자신의 고통을 잠시나마 진정시키기 위해(1515년 마리냐노 전투 같은 극소량의 진실은 진통제 역할을 한다), 그 다음엔 가족의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하여 저녁식사 시간이 비극으로 선회하지 않도록, 제발 오늘 저녁은 아니기를, 각자의 마음을 찢어놓은 고백의 시련을 늦추기 위해, 요컨대 틈틈이 편지함을 살펴보던 당사자에 의해 다소 교묘하게 위조된 학기말 성적표를 받아들고, 사실  별로 놀라워하지도 않으면 학교생활의 재앙의 범위를 가늠하게 될 순간을 밀어내기 위해서다.

내일 생각해보자.

내일 생각해보자고……


(110-111)

우선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다. 알다시피 어른과 아이는 시간을 동일하게 지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십 년 단위로 계산하는 어른의 눈에 십 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이 오십이 되면 십 년은 금세 지나간다! 그렇게 빠른 속도감 때문에 어머니들은 아들의 장래를 근심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오 년 후면 벌써 대학 입시네, 아니 이제 금방이잖아! 이 어린 것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근본적으로 뭐 그리 변할 수 있겠어? 그런데 아이에게 그 시절의 일 년은 천 년과도 같다. 아이의 눈에 자신의 미래는 뒤 이은 며칠 안에 몽땅 달려 있다. 아이에게 장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한을 센티미터로 재라고 요구하는 꼴이다. ‘되다라는 동사가 아이에게 주눅들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어른들의 걱정이나 질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장래란 최악의 상태의 나를 말하며, 바로 그것이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선생님들의 말에서 내가 대충 이해한 바였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시간이란 게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조금도 생각해내지 못했고, 그냥 순진하게 영원히, 언제나 바보일 거라는 그들의 말을 믿었다. ‘영원히언제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이 열등생에게 시간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단위였다.


(133)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생이란 놀랍고도 짧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렇게 한마디로 말할 수 있겠는걸. 예를 들자면 한 젊은이가 우연히 맞닥뜨린 불행한 사고는 제쳐놓는다 해도 별 탈 없이 흘러가는 평범한 나날조차도 나들이를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점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떻게 옆 마을로 말을 타고 나설 작정을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으로 말이다.”

이자벨은 존경심을 표하며 그 작가의 이름을 말했다. 프란츠 카프카.


(158)

망쳐버린 시간이 나를 기진맥진하게 했다. 나는 지치고 화가 난 채로 교실에서 나왔다. 그 화는 하루종일 학생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위험이 있다. 자기불만에 휩싸인 선생은 누구보다 재빨리 학생을 야단치기 때문이다. 얘들아, 조심해라, 바짝 기어라, 선생이 자기바하에 빠져버렸으니 맨 처음 걸려든 사람한테 불똥이 튈 거다! 그날 저녁은 집에 가서 숙제 검사 같은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피로와 불쾌한 의식은 좋은 충고자가 될 수 없다! 아니, 그날 저녁은 숙제 검사도, 텔레비전도, 외출도 그만두고 잠자리로 직행! 선생의 첫째 자질은 수면이다. 일찍 자야 착한 선생이 된다.


(275)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막시밀리앵은 젊음만능주의라는 동전의 이면이다. 우리 시대는 젊음의 의무로 이루어져 있다. 젊어야 하고, 젊게 사고해야 하고, 젊게 소비해야 하고, 젊게 늙어야 하고, 유행은 젊고, 축구도 젊고, 라디오방송도 젊고, 잡지도 젊고, 광고도 젊고, 텔레비전도 젊은이로 가득하고, 인터넷도 젊고, 사람들도 젊고, 살아 있는 베이비붐 세대의 마지막 사람들도 젊게 남아 있고, 우리의 정치인들마저 마침내 다시 젊어졌다. 젊음 만만세! 젊음에 영광을! 젊어야만 한다!


(281)

이때 담임선생님의 질문.

신발은 걸어다니는 데 쓰이고, 상표는 뭐에 쓰이지?”

교실 구석에서 터져나온 돌발 발언.

뽀다구 내는 데요!”

모두의 폭소.


(323-324)

모든 점을 잘 따져보면 이 세 분의 선생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모른다고 하는 우리의 고백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철자법의 결함을 이유로 내세우며 지 선생님은 내게 얼마나 여러 번 논술문을 다시 쓰게 했던가? 발 선생님은 내가 복도에 멍하니 있거나 자습실에서 몽상에 잠겨 있었다는 이유로 얼마나 여러 번 보충수업을 시켰던가? “시간이 있으니까 우리 한 십오 분만 더 사학을 해보면 어덜까? 페나키오니? , 십오 분만 해보자……”) 익사 위기에서 구해내려는 그 몸짓의 이미지, 자살하려는 몸짓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저 위로 나를 끌어올리려는 그 손목, 내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쥔 살아 있는 손의 생생한 이미지, 이런 것들이 바로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맨 처음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들의 현존 안에서 그들의 과목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눈을 떴다. 수학자인 나, 역사가인 나, 철학자인 나로. 그러한 나는 이 스승들을 만날 때까지 진정으로 여기 있다는 느낌을 방해했던 나를 한 시간 동안 잠시 잊고, 나를 괄호 속에 집어넣고, 나로부터 나를 치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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