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석탄발전소, 자동차 등록대수, 주유소, 산업단지, 소 사육두수. 상징적인
주요 온실가스 배출원이다. 지난해 정부는 ‘2050 탄소
중립’을 발표했는데, 순배출량 ‘0’를 탄소중립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도무지 감을 잡기 어렵다. ‘2050 탄소중립’은 간단히 말하면 2050년까지 온실가스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 30년 안에 석탄발전소, 내연기관 차량, 주유소 같은 화석연료 기반 시설은 완전히 사라지고
산업단지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를 전환해야 하며, 소 사육두수는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2018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1.5도 특별보고서를 계기를 본격 등장한 ‘탄소중립’은 지금껏 지구에서 인간이 구축해온 화석에너지 기반의 경제
사회 체제를 완전히 뒤흔드는 일이다.
(11)
우리나라는 1차 에너지의 80%를
화석에너지를 태워서 쓰고 있다. 2017년 기준 이산화탄소 배출량 세계 7위, 석탄 소비 세계 4위, 석탄 해외투자 3위, OECD 온실가스
배출 증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나라가 30년 이내에 탄소중립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난 30년간 하는 체만 해왔던 기후위기 대응을 끝까지 버티다가 이제는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그동안 정부와 산업계는 기후위기를 방관해왔다. 특히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 산업계는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규제를 강화하면 해외로 산업체를 이전하겠다고 정부를 압박했고, 정부는
그런 산업계에 끌려다녔다. 지금까지 정부와 기업이 행동하지 않음으로 인해, 한국사회 전체가 3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탄소중립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셈이다.
(15)
어쩌다, 지금, 지구에서, 사는 우리는 한정된 지구에서 인간의 무한한 소비와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세대이다. 지구의 생태적 한계 내에서 살 만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탄소중립산회는
정부와 기업, 시민이 각자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합의해야 실현할 수 있는 사회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무엇이 지금의 위기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뼛속 깊이 인식하지 않고서는 변화도 합의도 만들어내기 어렵다. 탄소중립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탄소중립사회를 위해 누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지 등 우리가 바라는 사회에 대한 그림을 공유하는 시간을 거쳐야 한다.
(39)
우리가 현재 ‘향유하고’ 있는
시장경제에 대해서, 호주 출신의 작가인 테드 트레이너는 “물자가
부족해지면 부자만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기발한 장치”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우리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석연료가 점차 부족해지면서
이 말은 진실로 밝혀질 것이다. 부유층은 어떤 식으로든 에너지를 충분히 갖고 사용하면서 부와 정치적
권력을 유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과거의
문명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사회가 붕괴할 때 부유층 역시 가난한 이웃들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좀더 오래 연명할 뿐이다. 이번에는 개발도상국에서도
선진국에서도 빈곤층은 조용히 사멸해가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화된 통신수단이 그럴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가장 부유하고 가장 잘 방비를 한 엘리트일지라도 장단기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사회적 정의(正義)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43)
피크오일로 인해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좀더 지속가능하고 재생가능에너지로 동력을 얻는 경제로 옮겨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간극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 사이에 디딤돌은 없다. 저편의 세상은 이쪽과 매우 다를 것이다. 또 달라야 한다. 그러므로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전면적인 개조 말고는 대안이 없다. 소심하게 조금씩 바꾸어나가려는
정책, 실패하고 있는 체제를 조금 개량하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52-53)
오늘날 우리는 인류세를 살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한편으로 인류가 자연자체를
바꾸는 환경적 힘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 행위의 결과로 인간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말하기도 한다. 다행히 이를 막기 위해 탈탄소화를 비롯해서 생태적 전환이 긴급하게
필요하며, 이는 정의로운 전환이어야 하고 또 정의로운 전환일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의미와 존엄을 가지고 있다는 보편적 정의가 없다면 우리의 생태적 전환은 불가능하거나
인간의 파멸을 유예시키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류세까지 오게 된 것은 인간 존재를
자연과 분리하여 특권화시키고 분리된 자연을 격하시켰기 때문인데 이를 회복하지 않고는 생태적 전환이라는 말로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107-108)
‘많을수록 좋다’는 인식이
우리를 지배한다. ‘질’은 ‘양’으로 결정되고, 행복은
성장으로 보장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자율성을 상실했고 체념과 순응에 익숙해졌다. 타율성에 길든 우리는 이제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은
성장 이데올로기의 식민지가 되었고 성장은 자연의 질서로 행세한다. 경제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성장의
주술에 걸린 현실에서, 탈성장은 우선 ‘상상력’의 문제다. 탈성장은 경제성장에 대한 문제의식과 비판에서 나왔지만, 경제학적 관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탈성장은 “다른 경제, 다른 생활방식, 다른
문명, 다른 사회적 관계”를 요구하는 삶의 근원적 전환을
뜻한다.(<에콜로지카>). 탈성장은 일차적으로
경제성장이 삶의 터전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삶과 다른 사회가 가능하다고 세상 사람들을 깨우는 외침이다. 성장주의가 의식을 마비시키고 소비주의가 삶을 잠식한 현실에서 새로운 전망을 열려고 하는 탈성장은 “상상력의 탈식민지화”로 시작해야 한다.(세르주 라투슈, <탈성장사회>).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탈성장의 가능성이 아니다. 가능성부터 따지면, 시작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우리는 먼저 새로운 삶의 양식과
사회의 전망을 상상할 수 있는지, 상상할 자유가 있는지 묻고 고민해야 한다(월터 브루그만, <예언적 상상력>).
(121-122)
온 나라, 온 세계가 코로나 역병의 비상사태로 코와 입을 막은 채
형제간의 만남조차 제지되는 자리에서
수백만 수천만의 가축들이 역병 방지라는 이름으로 무차별 살처분되고
미세먼지 하늘과 플라스틱 바다와
기후위기와 종의 대멸종으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절박한 이 엄중한 시기에
한때의 정권을 위해
한갓 선거의 매표행위를 위해
생명을 담보로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을 만들고 통과시킨 자들
그들에게 다시 묻는다
그 파괴와 죽음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 신공항
누구를 위한 신공항인가.
무엇을 위한 신공항인가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이 죽어가야
얼마나 더 숱한 생령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그 삽질
그 탐욕
그 피 묻은 손 내려놓을 수 있을까
지금 우리 모두 죽어가고 있다
인제 그만두어라
그 죽임의 굿판 제발 걷어치워라
그렇게 모두가 죽어간 뒤에 남겨질 것이 무엇인가
- 이병철 <그 죽임의 삽질을 내려놓아라> 중에서…
(144)
바다가 바다인 것은 바닥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는
강물을 품어주기 때문이네
산이 산인 것은 지리산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네
변치 않는다는 것이지
돌 속에서 돌을 꺼내 돌의 자리에 세우고
나무속에 나무를 꺼내
나무로 자라게 했기 때문이네
제자리에 있어야 하네
사람은 사람의 자리에
반달가슴곰은 반달가슴곰의 자리에 있어야 하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산자락마다 깨알처럼 모여 사는 마름과 마을을
능선과 능선 너머
푸르고 푸른 첩첩의 산능선을
그리하여 사람의 처음처럼 거기 서 있는 지리산을
그 곁을 따라 그대와 나의 마른 꿈을 적시며
골짜기마다 풀어놓은
논과 밭을 키우고 흐르는 섬진강을
정녕 그대를 보지 못하는가
-
박남준 <지리산은 지리산의 자리에서 노래하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