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발이야말로 우리 몸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부위라고 늘 생각해 왔었다. 성기도, 심장이나 뇌도 아니고, 그리 대단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과대평가를 받아 온 장기(臟器)도 아닌, 발 말이다. 발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지식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대지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관해 몸이 보내는 묵직한 신호가 바로 발에서 흘러나온다. 땅을 디딤으로써 우리 몸과 땅을 접촉시키는 바로 그 지점에 모든 비밀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물질의 원소들로 이루어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물질로부터 분리된 이질적인 존재라는 비밀, 발은 소켓에 꽂는 우리의 플러그나 마찬가지다.


(34)

공식적인 이름과 성이라…… 이 얼마나 빈곤한 상상력인가. 그런 식의 이름은 기억하기 어렵고 개별적인 특성과는 너무 동떨어져서 해당 인물을 떠올리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뿐만 아니라 세대별로 유행하는 이름이 따로 있어서 갑자기 모든 사람이 마우고자타나 파트리크, 그리고…… 맘소사, 정말 듣기 싫은 이름이지만, 야니나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는 타인을 지칭할 때 이름과 성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보다는 우리가 누군가를 처음 볼 때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표현이나 느낌을 호칭으로 사용하는 편을 선호한다. 의미를 상실한 단어를 아무렇게나 내뱉기보다는 이것이 언어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41-42)

평소 유독 대화를 나누기 힘든 상대가 있는데 대부분은 남자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많은 남자들이 테스토스테론 자폐증을 경험한다. 사회적 지능과 의사소통 능력이 점차 감소되고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이 약해지는 증상이다. 이러한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점차 말이 없어지고, 수많은 생각의 갈림길에서 길을 잃은 듯한 혼돈에 빠지게 된다. 또한 다양한 도구와 기계류에 관심이 집중되고, 2차 세계 대전이나 정치인 또는 악당과 같은 유명 인사의 이력에 흥미를 느낀다. 반면 소설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거의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테스토스테론 자폐증은 인물에 대한 심리적인 이해를 방해한다.


(50)

사람이 가끔 분노를 실감하게 되면 모든 게 단순 명료해진다. 분노는 질서를 만들고, 세상을 간략히 요약해서 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분노는 다른 감정 상태로는 얻기 힘든 선명한 시야를 우리에게 확보해 준다.


(68)

별과 행성에 대한 채널이 있으면 좋겠다. ‘우주의 영향력에 관한 채널.’ 이런 유의 방송 또한 화면이 지도들로 구성될 것이며, 우주의 영향력을 선으로 표시하고, 행성의 충돌을 구역별로 보여줄 것이다. “화성이 황도(黃道) 위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오늘 저녁에는 명왕성의 영향력이 구역을 넘어설 것입니다. 그러니 차를 차고나 실내 주차장에 두십시오. 칼은 치우고, 지하실로 내려갈 때는 조심하실 것을 당부합니다. 이 행성이 게자리를 통과할 때는 목욕을 피하시고, 가족 간의 다툼도 삼가십시오.”


(69)

밤이 되면, 나는 금성을 관찰하면서 아름다운 처녀자리의 이행과정을 상세히 추적해 본다. 나는 이 처녀자리가 이브닝 스타처럼, 아니면 마술처럼 난데없이 나타났다가 태양 뒤편으로 저무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영원한 빛의 불꽃, 땅거미가 질 무렵이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는 시점이다. 이 무렵에는 단순한 차이점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나는 영원한 땅거미 속에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70)

자신이 보는 것을 의심하는 자는

무엇을 행하든 끝내 믿지 못하리라.

태양과 달이 서로에게 의심을 품으면

둘 다 곧 하늘에서 사라질 것이다.

-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에서


(86-87)

점성학이란 실습을 통해 익혀야 한다고 나는 늘 믿어 왔다. 그것은 상당 부분 경험에 의존하는 견고한 지식이며 심리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지식이다. 주변인 중 몇 명을 면밀하게 관찰해야 하며, 그들의 삶에서 구체적인 순간들을 태양계와 일치시켜야 한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과 공통으로 연관된 사건들을 확인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유사한 별자리를 패턴이 곧 유사한 사건을 나타낸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다. 그 순간에 점성학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 질서는 분명히 존재하며 우리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 별과 행성이 그것을 결정한다면 하늘은 우리 삶의 문양을 만들어 주는 일종의 형판(形板) 같은 것이다.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면, 이곳 지구에서 벌어지는 작은 세부 항목들을 통해 천체에서 일어나는 행성들의 배치를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오후의 폭풍우, 우체부가 문틈에 밀어 넣은 편지, 욕실에 망가진 전구. 어떤 것도 그 질서를 피할 수 없다. 내게 그것은 술이나 아니면, 짐작건대 인간에게 순수한 희열을 안겨 줄 것 같은, 새로 개발된 마약과도 같다.


(88)

하지만 오늘날에는 새로운 무언가를 고안해 낼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서만 쉬지 않고 떠든다. 똑같이 낡은 생각들을 그저 계속해서 쏟아내고만 있는 것이다. 현실은 쇠잔해졌다.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가 노화하듯이 현실에게도 똑 같은 법칙이 적용되어 나이를 먹는 것이다. 몸의 세포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가장 작은 구성 요소인 감각 또한 아폽토시스(apoptosis), 그러니까 세포 자멸에 굴복하고 만다. 아폽토시스란 물질이 피로와 탈진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찾아오는 일종의 세포 자멸사다. 그리스어로 이 단어는 꽃잎의 떨어짐을 의미한다. 세상은 꽃잎을 떨어뜨렸다.


(121)

내게는 한 가지 이론이 있다. 우리의 소뇌가 대뇌에 제대로 연결되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프로그래밍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실수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우리를 잘못 만들었다는 뜻이다. 우리의 모델이 교체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소뇌가 대뇌와 제대로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 자신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 그러니까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스스로 완벽한 지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혈액 속의 칼륭 수치가 떨어졌어. 세 번째 경추에 긴장이 느껴지네. 오늘은 혈압이 낮으니 몸을 움직여야겠다. 어제 먹은 마요네즈가 내 몸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너무 높여 놓았으니 오늘은 먹는 것을 조심해야겠군.


(124)

우주에는 아직 타락하지 않은 곳들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그곳에서 세상은 망가지지 않았고, 에덴동산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거기에서 인류는 어리석고 엄격하기만 한 이성의 법칙이 아니라 마음과 직관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들은 헛소리나 지껄이며, 자기가 이미 아는 것을 뽐내는 데 그치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놀라운 것들을 창조한다.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일상을 억압하는 족쇄를 채우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의 희망과 꿈을 실현하도록 돕는다. 개인은 기계처럼 돌아가는 시스템의 톱니바퀴나 특정한 역할 수행자에 머물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렇게 누워 있는 게 기쁘게 느껴지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아픈 사람만이 진정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156)

사실 인간은 동물이 그들의 고유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책무를 갖고 있습니다. 가축들은 그들이 우리에게서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애정을 돌려주는 건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빚을 청산하고, 현생의 모든 업보를 명부에 기록하고 갚아 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나는 동물로 태어나 살았고, 먹었고, 녹색 초원에서 풀을 뜯었고, 새끼를 낳았고, 내 체온으로 자식들을 따뜻하게 덥혀 주었고, 둥지를 지었고, 내게 주어진 의무를 모두 완수했노라고 말이죠. 인간이 그들을 죽일 때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어제 내 눈앞에 쓰러져 있었고, 아직도 거기에 있는 그 야생 멧돼지처럼 업신여김을 당하고, 진흙탕에 더럽혀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썩은 고깃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동물을 지옥으로 내모는 순간,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합니다. 왜 다들 그 사실을 모르는 걸까요? 어때서 인간의 이성이 사소하고 이기적인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사람들은 다음 생에서 동물들이 해방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구속으로 자유로, 틀에 박힌 관습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단계로.


(161)

나쁜 꿈을 처리하는 오래된 방법은 화장실 변기에 대고 그 꿈을 큰 소리로 말한 다음, 변기의 물을 내리는 것이다.


(179-180)

봄은 단지 짧은 막간일 뿐이고, 그 뒤에는 강력한 죽음의 군대가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이미 도시의 성벽을 포위하고 있다. 우리는 포위된 상태로 살고 있다. 인생의 한순간을 잘게 쪼개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포에 질려 숨이 막혀 버릴지도 모른다. 몸 안에서 끊임없는 분열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머지않아 병을 앓고, 죽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떠날 것이며, 그들에 대한 기억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점점 사라질 것이고, 결국엔 옷장 속의 옷 몇 벌,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된 누간가의 사진들만 남을 것이다. 그렇게 가장 소중한 추억은 흩어져 버리고,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자취를 감추겠지.


(230)

내 나이에 사람에게는, 자신이 정말로 사랑했고 진심으로 귀속되어 있던 장소의 대부분이 더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장소들, 휴가차 들렀던 시골, 첫사랑을 꽃피웠던 불편한 벤치가 있는 공원, 오래된 도시와 카페, 집 들이 이제는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설사 외형이 보존되었더라도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처럼 느껴져서 더욱 고통스럽다.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마치 투옥 상태와도 같다. 내가 보고 있는 지평선이 바로 감방의 벽이다. 그 너머에는 낯설고, 내 것이 아닌, 딴 세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금, 여기밖에는 없다. 모든 앞날이 미지수이고, 도래하지 않은 모든 미래는 공기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쉽사리 파괴될 수 있는 신기루처럼 불투명하다.


(294)

시간이 작동하는 건 바로 우리 때문이니까.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으로 바꿀 기회 역시 우리에게 있다. 별들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가두었기에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그들은 그저 그물을 디자인할 뿐이다. 그들이 우주의 베틀로 날실을 짜면 우리는 거기에다 우리의 씨실을 엮어야 한다. 문득 흥미로운 가설이 떠올랐다. 어쩌면 별들은 우리가 개를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바라볼 지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는 때로 개에게 좋은 게 무엇인지 개보다 더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가죽끈으로 묶어 놓기도 하고, 쓸데없이 번식하지 않도록 불임 수술을 시키기도 하며, 아플 때는 치료받게 하려고 수의사에게 데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개는 무엇 때움에, 어떤 목적으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우리의 결정을 따를 뿐이다. 어떠면 우리 또한 그런 방식으로 별의 영향력에 굴복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때도 인간의 감수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어둠 속에서 계단에 앉아 생각했던 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301)

불꽃은 빛의 근원에서 흘러나오고 가장 순수한 밝기에서 만들어진다고, 가장 오래된 전설은 이야기한다. 인간이 태어나려고 하면 먼저 불꽃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우주 공간의 암흑을 뚫고, 그 뒤에는 은하수를 통과하여 날아가다 마지막으로 여기, 지구로 떨어지기 직전에 그 가여운 불꽃은 행성의 궤도에 부딪힌다. 각각의 부딪힘으로 인해 불꽃은 특정한 속성에 물들고, 그렇게 점차 어두워지고 희미해진다.


(340)

하지만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엉겅퀴에게는 생명권이 없는가? 창고의 곡식을 훔쳐 먹는 쥐는 또 어떤가? 꿀벌과 말벌, 잡초와 장미는?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더 못한지 과연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유묭한 것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이익은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71-372)

그는 또한 신문을 갖고 와서 읽어 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게 혐오감을 일으킬 뿐이다. 신문은 우리를 언제나 불안한 상태로 만들어서 우리가 진짜 느껴야 할 감정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무엇 때문에 내가 언론의 권력에 굴복하고, 그들의 지시에 내 생각을 맞춰야 한단 말인가?



(380)

윌리엄 블레이크는 창조적이고 전복적인 작품을 남긴 시인이면서 급진적인 사상가였고, 산업 혁명 이후 영국의 물질적 타락을 개탄한 아나키스트였다. 또한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에 얽힌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독특한 예언자적 전망을 피력하면서 이를 예술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상징체계를 통해 재창조한 선지자이기도 했다.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시대에 블레이크는 고독하게 동판화를 새기며 시를 썼고, 유작인 <예루살렘>(1804~1820)의 시구처럼 죽음의 세계로부터 생명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노력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지향했고, 자연에 대한 통합적 사고와 전체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생태주의 예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자연 생태계의 일부로 보고,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해 온 토카르추크가 블레이크의 시를 작품의 모토로 설정한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으리라.

   - <옮긴이의 말>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