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

완벽하게 승리한 역사였다면, 우리 스스로 완전한 독립을 이뤄냈다면,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광복군의 국내 진입작전이 이뤄졌다면 아마도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을 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었던 길을 좇으면 좇을수록 아쉬움이 계속 커졌다. 항일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던 애국지사들은 너무나도 힘겹게 투쟁을 이어갔겄만, 끝내 영광을 잇지는 못했다. 영광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지 못했다. 숱한 애국지사들이 도리어 억울하게 살다가 안타깝게 죽어갔다.

(51)

효창공원 입구부터 거대한 축구장(효창운동장)이 있습니다. 반세기 넘게 김구 선생과 삼 의사 묘역 남쪽을 막고 있습니다. 효창운동장 때문에 숨이 턱 막힐 지경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9 <2회 아세아축구선구권대회> 개최를 구실로 독립운동가의 표를 이장하고, 운동장 건설을 밀어붙였습니다. 특히, 이승만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다음, 효창원에 경찰을 배치해서 시민들의 참배를 막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만행이 이 전 대통령이 쫓겨난 뒤에도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1969, 박정희 정권은 김구 선생과 삼 의사 묘역이 능선으로 이어진 머리 쪽에 느닷없이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을 세웠습니다. 일본군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만들어진 건데, 이 역시 반세기 넘게 김구 선생의 묘역과 삼 의사 묘역 머리 쪽에 버티고 있습니다.

(55)

김구 선생이 1946년 고국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당시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단장 박열 선생을 통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수습해서 국내로 모셔오게 한 것이다. 의거 이후 십수 년이 지났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위해 국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긴구 선생께서 몸소 보여주셨다. 지금 우리는 어떨까?

(70)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 탄생한 곳 서금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장소다.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 명명된 국가가 만들어진 곳이며,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이 정립된 곳이다. 우리 헌법이 세계만방에 공표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반복되는 건국절 논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99)

선생(예관 신규식)의 집을 나오니 빗줄기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더 아쉬웠나 봅니다.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했고, 외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까지 맡으셨던 분의 거처치고는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운 좋게 선생의 집에 거주하는 중국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 안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지만, 선생의 거주지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번째, 두 번째 청사처럼 아무런 표식조차 없었습니다.

(136)

한번 상상해보자. 이름만 알던 지인에게 무려 현상금 200억 원이 걸렸다. 정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다. 결코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오히려 남남에 가깝다. 만에 하나 그 사람을 숨겼다 발각당하기라도 하면 내 몸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런데 지인이 갑자기 나를 찾아와 숨겨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대부분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혹자는 거절에 그치기는커녕 현상금 200억 원에 눈이 멀어 오히려 적극적으로 신고할지도 모른다. 1932, 중국인 주푸청 선생에게 찾아온 선택의 갈림길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200억 유혹을 뿌리쳤다.

(142-143)

김철 선생은 1932 1, 이봉창 의사 일왕 저격 사건, 같은 해 4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 당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장을 역임하며 김구 선생과 같이 대업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제의 핍박이 더욱 거세지자, 1932 5 10,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청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김구 선생 등 임정 주요 인사들이 자싱에 피난처를 마련하는 동안 김철 선생은 자신의 숙소인 청태 제2여사 32호실에 임시정부 판공처를 설치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지속함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178)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 2015 12 1, 정식 개관했다. 위안소를 주제로 한 전시관 중 압도적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다. 평안도 출신 박영심 할머니가 이곳 두 번째 건물 19번 방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 2003 11 21, 박 할머니가 현장을 찾아 내가 있던 곳이 여기라고 증언하자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 난징 중심부에 유적 진열관을 마련했다. 3,000m^2 규모로 1,600여 점의 전시물과 680장의 사진이 생생하게 보존돼 있다. 진열관 가운데에는 마당이 있는데, 한쪽 벽면이 70명의 할머니 얼굴 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70명 할머니 중 다수가 한국 출신이다. 광장 가운데 박영심 할머니가 위안부 시절 임신했을 당시 모습이 동상으로 서 있다.

(215)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 인사들이 그대로 미 군정에 부역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러난 일제의 자리를 미 군정이 채운 상황, 한평생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정정화 여사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족들과 함께 어렵게 서울에 자리를 잡았지만, 믿고 의지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9 6 26일 암살당했다. 이후에 시련의 연속,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40년 지기이자 독립운동 동지였던 남편 김의한이 납북되었다. 남한에 남은 정정화 여사는 부역죄로 끌려가 투옥당하는 등 잦은 고초를 겪었다. 여사는 1991년 사망할 때까지 세상에 나서지 않고 조용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별개로,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 이어진 독재정권이 그들을 가만히 두지않았다.

(230)

황포군관학교는 항일 애국지사 청년들이 군사 간부 훈련을 받던 학교다. 1924 6 6, 1차 국공합작의 산물로 설립되었다. 소련의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 설립한 소련식 사관학교이며 정식명칭은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였다. 그러나 주강의 황포 장주도에 위치한 탓에 흔히 황포군관학교라고 부른다. 당시 장제스 총통이 황포군관학교에서 피압박민족 후원으로 조선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며 대우하자, 지망생이 증가했다. 조선 청년들은 신식군관학교인 황포군교에서 새로운 정치와 군사를 배우고자 모여들었다. 의열단 의백 김원봉과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도 그 중 한 명이다. 김원봉 장군을 비롯한 의열단 간부들은 군관학교 4기로 대거 입학했다. 학생명단에서 확인한 인원만 73명이다. 무한분교까지 따지면 무려 200명이 넘는다. 이들은 황포군교 졸업 후 <조선혁명간부학교>로 이동, 조선 청년들의 군사간부 양성에 힘썼다. 결과적으로 1938 10 10, <조선의용대>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335)

조명하 선생, 아마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처음에 조명하 의사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거짓말인 줄 알았다. 마치 무협지 주인공처럼, 혼자 무공(?)을 연마했다. 단도 한 자루를 던져 의거에 성공했다. 그것도 당시 히로히토 장인이자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를 없애 버린 것이다. 1928 5 14, 대만 타이중에서 의거한 스물네 살 청년 조명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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