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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평전 ㅣ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안재성이라는 작가가 있단다. 좌파 작가라고 해야 할까?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좌파 인물에
대한 책들을 많이 쓰셨어. 아빠는 안재성님이 쓰신 책 중에는 <경성
트로이카>와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읽어봤어. <경성 트로이카>는 읽은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 책을 통해서 학창시절 역사책에서 나오지 않았던 많은 좌파 독립운동가들을 알게 되었단다. 일제
시대 여러 가지 사상들이 출현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 들어 공산주의 운동을 하면서 그와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았어. 후에 해방이 되고 우리나라 남북으로 나뉘고 전쟁이 일어나고,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서, 공산주의는 우리나라에 금기시되었단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공산주의자들도 교과서에서 사라진 것이지. 하지만,
일제 시대 그들은 뜨거운 피가 끓던 우리나라 젊은이였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많은 노력들을
하셨고, 목숨도 잃으셨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경성 트로이카>에 나왔고, 그 책에 나온 이들에 대해 몇 사람에 대해서는 지은이 안재성님께서 평전으로 좀더 자세히 쓰셨단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이현상이었어.
1.
이현상의 젊은 시절 얼굴을 보면, 강렬한 눈빛을 통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더구나. 그는
늘 웃음이 적고, 원칙에 충실한 그런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의
얼굴과 딱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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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좌익 내부의 정적들조차 김삼룡이나 이주하는 말이 통하지만 이현상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고 평했다. 먼저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상대방을 설득하다가 안 되면 감정이라도 분출시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현상은 끝까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끝내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원칙을 관철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정적들이 조선공산당 중앙을 비판할 때 공식적으로 이현상의 이름을 거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현상의 원칙이란 것이 상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지도할 때 보여준 그의 융통성과 현실주의적인 감각이 이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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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그러나 이현상은 도무지 말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를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하급 간부들은 이현상의 심중이 무엇인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짧게 표현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은유나 비유는 사용하지 않았고, 입에서 내뱉은 말과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르지 않았고, 정치적 암투를 위해 사람을 모함하거나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거짓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곤 없었다. 근본적으로 복잡한 생각이나 정치적 욕심이 없는 담백한 사람이라고 보면 좋았다.
따라서 동료들이나 하급자들은 그가 회의 시간 내내 듣고만 있어도 무슨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다가 한마디 하면 그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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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악랄하고 인간미
같은 것이 없는 사람은 아니란다. 그는 생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중요시하고 존중했단다. 전투 중에 적의 생명을 어쩔 수 없이 앗아간 경우는 있지만, 생포된
포로에 대해서는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며칠 동안 교양을 한 다음에 다시 돌려보냈다고 하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의 포로 원칙은 바꾸지 않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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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미군이라고 해서 마구 죽이지는 않았다. 미군도 일단 포로로 잡으면 죽이지 않고 며칠 동안 데리고
다니며 교양을 한 다음 살려 보냈다. 이 고지식한 공산주의자는 ‘미워해야
할 것은 제국주의이며 제국주의 국가의 인민들은 다 같은 피해자’라는 교리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쫓기는 처지라 포로를 감시하는 일도 쉽지 않아 쏘아버리자고 주장하는 대원도 있었으나 이현상은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살려준 미군들이 유격대의 위치를 파악해 보고하는 바람에 포격을 당하는 일도 생겼지만
이후로도 포로 수칙을 바꾸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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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럼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짧게
이야기해줄게.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짧게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아빠가 밀린 독서편지를 따라잡을 때까지는 짧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는
1925년 9월 27일 충청도 금산군 군북면이라는
동네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당시 면장이었고, 나중에는 형들도 면장을 했대. 일제시대 면장을 하면 보통 친일을 하는 나쁜 이들로 생각할 텐데, 그들은
면 사람들을 위해 재산을 내놓고 세금도 대신 내주는 착한 사람들이었대. 고는 고창보고를 다니다가 서울
중앙고보로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 6.10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는 구나. 나중에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조전공산당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연맹에 가입을
해서, 본격적인 공산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어. 이런
활동으로 징역을 갔다 왔고, 김삼룡 이재유 등과 함께 아빠가 앞서 이야기한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해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이끌었단다. 하지만 이 일로 또 징역을 가는 등 해방할 때까지 모두 합해 10년 넘게 징역살이를 했다는구나.
광복 후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깃발을
들었지만, 광복 직후에는 여러 사상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현상도 남조선로동당이라는 정상을 만들어 박헌영과 함께 이끌었단다. 하지만 미군정이 공산주의 정당을 불법으로 정했고, 그래서 박헌영과
함께 북한으로 갔단다. 하지만 그쪽도 이현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아갔지. 이현상이 생각하기에 남조선노동당이 정통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는
다시 남한으로 와서 비밀리에 남조선노동당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이 터졌어. 지금은 역사적으로 여순사건이 정의로운
민중항쟁이라고 평가되지만, 당시에는 나라에서 반란으로 정의 내렸단다.
(여순 사건은 아빠가 얼마 전에 이야기해준 김용옥님의 <우린 아무도 몰랐다> 독서 편지를 참고해 주시고…) 이현상은 이것이 너무 성급하게
우발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했어. 성공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지.
하지만 그들을 버릴 수는 없어서 그는 여순사건의 주동자들로부터 지휘권을 인수받아 그들을 이끌게 되었단다. 무장유격전의 시작이었지.
지리산 산중에 자리를 잡으면서 남조선노동당의
비밀 조직을 이끌었어. 이승만 정부는 이현상이 이끄는 빨치산들을 없애기 위해 군경토벌대를 보내 대대적인
공세를 끊임없이 벌였고, 이현상의 병력도 공세 때마다 큰 타격을 입어 시간이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었단다. 더 이상 지리산에서 임무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현상은 남아 있는 부대원을 이끌고 북으로 가기 했단다. 그때가 1950년 6월이었는데, 이현상은 북에서 남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
…
북상 도중 전쟁 소식을 들었단다. 북한이 일으킨 이 전쟁은 삽시간에 남한 전역을 점령하면서 낙동강 유역까지 전선을 끌어내렸단다. 이현상은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과 함께 전쟁에 참여를 했고, 이현상이
이끄는 부대는 낙동강은 넘어 미군의 군수물자를 파괴하는 등 성과를 냈어. 하지만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등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후퇴하게 되었어. 그 해 이승엽과 재회를 하게 되었고 남한 유격대 총지휘권을
받게 되었고, 이현상은 다시 산중에서 게릴라를 하게 되었고, 그는
그의 부대를 남부군이라고 이름 지었단다. 그렇게 남부군이 탄생했지.
전쟁이 일진일퇴를 보이다가 장기전으로
들어섰어. 전쟁에 지친 미국과 북한은 휴전 협정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미 이현상과 남부군은 북으로부터 고립되기 시작되었단다. 가끔 북에서 지령이 내려오긴
했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했던가, 이현상과
남부군에 대한 지원은 점점 줄어들었어. 그에 반해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이현상을 없애려고 온힘을 기울였단다. 이승만은 이현상의 토벌 없이 지리산의 안정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정도였어.
뿐만 아니라 먹는 것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고, 겨울에는 지리산의 모진 추위와도 싸워야 했어. 이래저래
시간이 지나면서 남부군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단다. 길고 지루했던 휴전 협정이 1953년 7월 27일
체결되었고, 이젠 남과 북은 서로 오갈 수 없는 철조망이 세워지게 되었어. 거기에 북한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남조선로동당의 지도부에 돌렸고, 그로
인해 이승엽은 미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했고, 박헌영도 구속되었어. 이현상에게는 희망이 없었지. 이현상은 결국 경찰에 의해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뜨거운 피를 가진 이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 그는 나라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뚜렷한
주장을 가지고 계속 선택을 했고 그 선택으로 그의 삶을 만들어갔단다. 하지만, 그의 선택과 그가 속한 나라의 선택이 달라지면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된 것 같구나.
…
이현상 그는 진정한 혁명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에게 이익이 없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면 그는 행동을 했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분노하고, 목숨까지 걸었으니까 말이야. 결코 선택하기 쉽지 않은 삶을 그는 선택을 했고, 뜨겁게 불살랐던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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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1)
역사는 자신의 존재에 의거하지 않은 지식인 출신 혁명가들의 나약함과 우유부단에 관한 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과 함께, 출신성분이 혁명가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기초 자료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보여준다. 자기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없더라도 타인에 대한 애정과 정의감만으로 기득권을 버리고 변혁운동에 뛰어들어 아낌없이
죽어간 사례들이다. 자신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분개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은 생존의 본능이지만, 타인의 고통에 분노하고 목숨까지 걸어 싸우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지식인이거나 노동자이거나 아무 상관없이,
타인데 대해 얼마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성품의 문제였다. 드물지만, 이런 이타적인 인간형들은 진정한 혁명가로서의 자질과 존경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현상도 그런 유형의 하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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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 한국전쟁이 끝난 지 두 달 후인 1953년 9월 18일 오전 11시경
지리산 주 능선 반야봉 남쪽 빗점계곡에서 한 사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책의 끝 문장 : 김대중 대통령 방문 당시 평양의 만수대의사당을 안내한 여성은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이었다.
세속적인 욕심에 무심한 것은 역사를 바꿔온 대부분의 혁명가들이 가진 근본적인 성품이기도 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경쟁을 역사의 동력으로 파악하는 역사가들은 혁명가들의 삶에도 이를 적용하고 싶어하여 세계의 혁명사를 당파 싸움으로 대치시키는 데 몰두한다. 그들은 혁명가들의 마음속에 희생과 용기, 이타주의의 고귀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혁명이 시대적으로 주류가 되었을 때 출세의 기회를 잡기 위해 앞 다투어 뛰어든 투기꾼들의 행태가 그들의 분석에 근거가 되고 합리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그들은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시간 순서대로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고 그 사이사이에 인간의 욕망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끼워넣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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