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

진보운동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 얘기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이야기할 때에는 항상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 같은 것을 받거든요.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고 그냥 약자, 민중, 이런 말들이 굉장히 추상적으로 들려요. (김종철) 선생님이 일리치 모임 시간에 말씀하셨던 이야기 중에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가, 전쟁을 할 때 하늘 위에서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은 지상의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폭탄을 퍼부을 수 있다는 거죠. 위로부터 보는 관점의 위험성을 말씀하신 거죠. 사람이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표적물로 추상화되어서 보일 때의 위험성을 경고하였어요. 선생님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인간을 보는 감수성을 갖고 계셨어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이념이나 자기 생각에 매몰되면 바로 그런 것을 놓치기가 쉬운 것 같아요.


(24)

또하나 선생님의 혜안이 돋보였던 것은, 우리가 학내 직선제를 민주화의 상징처럼 이야기하는데, 김종철 선생님은 직선제가 꼭 좋은 게 아니라고 하셨어요. 특히 대학이 이미 자본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데 직선제는 욕망을 키워나가는 것을 부추긴다고 보셨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보면 그 말씀도 맞았어요.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총장들의 면면을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형편없는 인물이 총장으로 많이 당선이 됐거든요. 구성원들이 돈 들어가는 일을 요구하고, 돈 잘 끌어오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총장이 되니까요.


(40)

그리고 창당(녹색당)하면서 제기했던 탈핵이라는 안건은 이제 다른 정치세력들도 많이 받아들였고, 기본소득도 그렇습니다. 이재명 지사를 좌담회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녹색당, <녹색평론>이 먼저 제기한 기본소득 이슈를 자기가 잘 써먹고 있다, 미안하고 감사하다고 하시더군요. 이렇게 저는 몇몇 의제들을 정치의제로 만든 데 녹색당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보는데요, 지금 다시 정체성을 분명하게 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성 평등이나 소수자 인권은 외국의 녹색당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의제이고, 한국의 녹색당도 기본으로 가져갈 가치입니다. 그러나 녹색당의 정체성을 한 줄로 말한다면, “생태위기의 시대를 맞아 문명의 전환을 이루기 위한 정치를 하는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녹색당만이 아니라 녹색가치를 지향하는 운동단체들도 그런 방향성을 잡고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54)

그런데 거기서 김종철 선생님이 진정한 평화는 자발적 가난을 통하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다는 평소의 지론을 설파하신 거죠. 경제성장과 강력한 무기체계가 뒷받침될 때만 평화가 성취된다는 일반론을 믿고 있는 다수 참석자들로서야 이 의외의 발언에 당혹하고 의아해했겠죠. 그 자리에 있던 꽤 유명한 어느 참석자가 선생님의 사상적 뿌리가 어디입니까하고 물어보더래요. 그래서 김종철 선생님이 우리 외할머니입니다.” 하고 답하셨다는 거잖아요. 저는 이 일화가 선생님의 사상이 선생님의 표현을 쓰면 비근대적농경사회의 토착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고 봅니다.


(65)

(김종철) 선생님이 진정 전하고 싶어 했던 말은 바로 이 희망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생태학적 사유와 실천에 부단한 최선을 다한다면, 마른 나뭇가지에 푸른 싹이 돋아나는 기적을 우리는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세계적 한국적 차원을 두루 고려한, 이 땅에서 찾기 드문 진정한 생태사상가였다. 나를 포함한 후학들이 이제는 선생님의 생태사상을 이어가야 할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삼가 머리 숙여 선생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72~73)

비겁한 마음이 폭력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쇠퇴는 죽음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을 증가시키고, 그 결과 안팎의 자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 간에도 폭력이 난폭하게 행사되는 것이 당연한 삶의 관행으로 굳어지게 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나 진정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훨씬 더 성숙한 것으로 바뀔 수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 <시의 마음과 생명 공동체> 김종철 선생님 강연 중에서


(121)

게다가 기후변화라는 건 점진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꾸준하게 점진적으로 변해서 악화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어느 날 갑자기 돌발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될 수 있습니다. 금년에 태풍이 몇 개 왔습니까. 그저께인가는 미국 뉴욕에 대설이 왔다죠. 스웨덴은 북극권인데 작년에 산불이 났잖아요. 지구사회 곳곳에서 혹심한 가뭄과 홍수, 태풍과 폭풍, 대규모 산불 등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기후재앙은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자카르타가 해수면에 잠겨서 수도를 옮긴다고 그러죠? 미국 플로리다에 마이애미라는 도시가 있잖아요. 부자들이 많이 사는 휴양지죠. 마이애미에서 부자들이 사는 지역은 전통적으로 저지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이 흑인들을 몰아내고 고지대로 이사를 가고 있다고 합니다.


(123)

저는 근대문명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근대문명이라는 게 결국은 자본주의 문명이고 산업문명이죠. 그리고 달리 이야기하면 석유문명입니다. 19세기에는 주로 석탄을 썼으니까 더 정확히 말하면 탄소문명입니다. 탄소문명 시대에서 생태문명 시대로 빨리 넘어가야 되고, 그래서 생태, 생명사상이 100년 전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무슨 일이든지 결국 사상이 뒷받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경제를 전환해야 되고 문명을 전환해야 되고, 우리 생활을 전환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무턱대고 열심히 한다고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철학과 비전이 있어야 해요. 우리의 행동을 뒷받침해주는 게 말하자면 사상적 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 후기의 동학사상으로 이어져오는 우리의 전통, 이것을 한마디로 생명사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이 생명사상이 지금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138)

이명박이 4대강을 파괴한 과정을 보세요. 그 밑의 공무원들, 건설업자들 등등 숱한 사람들이 그저 절차에 따라서 진행하다가 보니까 우리나라 아까운 생태계 보고(寶庫)가 작살이 난 거 아닙니까.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게 꼭 무슨 큰 사건이나 예외적인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래요. 현대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순응해서 살 뿐입니다. 자기가 자주적으로 판단해서 생각하고 할 공간이 전혀 없어요. 아렌트가 그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아이히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질문을 못 하는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없어요. 그렇게 멍청하게 있다가 보면 결과적으로 가공할 악행을 번하게 되는 구조, 그리고 그것을 강요하는 게 이 시스템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근대의 본질이다, 라고 이반 일리치는 환대를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185)

지구온난화를 1.5℃로 제한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몇 달, 몇 해가 결정적입니다.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이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기후위기를 무시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들-당신의 자손들에게 그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입니다. 현재 어린아이들이 안전한 환경 속에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곳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 우리들이 살아갈 시대의 현실입니다. 우리들은 정치지도자들에게 기후 비상사태에 대응할 것을 요청합니다.


(196)

코로나 시대 이전으로 우리 교육을 되돌릴 수 없다는 판단은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이 코로나와 같은 비상한 사태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무한 성장주의를 부추기고 인간과 지구의 생태위기를 방관한 우리 교육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이들을 인간자원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효용과 쓸모의 대상으로 전락시켜온 지난날의 교육은 반드시 다른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 전환은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사회가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환이 이루어지는 길에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시도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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