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청결함에 관해선 아빠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느 날 내가 아빠 등을 때수건으로 밀어주고 있을 때 아빠가 말했었다. 우리가 벗겨낸 이 때는 다 어디로 갈까? 너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니? 우리 몸을 깨끗이 하느라고 우린 또 뭘 더럽히고 있는 건지.

(53)

아빠가 미리 얘기해줬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제로 일이 닥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난 잠에서 깨자마자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잠옷 바지가 젖어 있었고 두 손도 온통 끈적끈적했다! 이불에도 묻어 있었다. 사실상 온 사방에 묻어 있었다는 게 정확한 말일 것이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바지를 벗으면서 난 아빠가 얘기해줬던 걸 떠올렸다. 그걸 사정(射精)이라고 해. 밤사이에 그 일이 일어나더라도 겁먹지 마라. 다시 오줌을 싸기 시작한 건 아니니까. 그건 새로운 미래가 시작된다는 신호야. 놀라지 말고 얼른 적응하는 편이 나아. 넌 앞으로 평생 정자를 만들어낼 테니까. 처음엔 뜻대로 조절이 안 될 거야.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쾌감을 느끼는가 싶다가 어, 어느새 끝나버리지! 그러다 점차 익숙해지면 절제할 줄도 알게 되고, 결국엔 최선의 요령을 깨우치게 될 게다.

(140)

눈물은 자아의 배설이다. 그 엄청난 양이란! 우리는 울면서 오줌 눌 때보다 훨씬 더 시원하게 자신을 비운다. 맑은 호수에 몸을 던지는 것보다도 더 깨끗이 자신을 청소한다. 그 정화의 과정이 모두 끝나고 나면 종착역에 정신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눈물로 표현된 정신은 비로소 몸과도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낸 몸도 오늘 밤엔 잠을 잘 것이다. 안도의 울음을 실컷 울었으니. 이제 끝났다.

(154)

건강염려증: 몸의 상태에 대해 과도하게 신경 쓰는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 자신이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망상. 정신과 몸이 서로에게 술책을 부리는 것. 어쨌든 처음 경험하는 느낌이라 일시적인 증상의 희생자일까?

(177)

몸은 사랑의 에너지 덕을 어느 정도로나 보는 걸까. 요즘은 모든 게, 정말 모든 게 다 잘 풀린다. 직장 일에서도 지치는 법이 없다.

(188-9)

손님들 앞에서 이 세상의 여덟번째 기적이라고 자랑하며 브뤼노를 흔들어대다가, 아기를 안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이다. 앞쪽으로 넘어지면서 바닥까지 굴렀다. 정확히 열한 계단. 난 본능적으로 브뤼노를 감쌌다. 계속 구르는 중에도 아기의 머리를 내 가슴팍에 붙이고, 팔꿈치와 이두박근과 등으로 보호했다. 난 아들을 덮고 있는 껍데기였다. 모두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우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손님들이 모두 달려들었다. 손등, 골반뼈, 무릎뼈, 발목, 등뼈, 어깨, 전부 다 계단 모서리에 부딪혔다. 하지만 난 구르는 와중에도, 가슴이 파이고 배가 움츠러드는 와중에도, 브뤼노가 내 품 안에서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난 본능적으로 인간 완충장치로 변신했던 것이다. 브뤼노가 매트리스 싸인 채 굴렀다 해도 더 안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난 유도를 해본 적도 없고 낙법을 배운 적도 없는데. 부성애의 놀라운 발현?

(190)

순전히 정에 겨워 아기를 어르는 것과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어르는 것 사이엔 이런 차이가 있다. 첫번째 경우, 아이는 자신이 사랑의 중심에 있다고 느낀다. 두번째 경우엔 아이를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픈 충동을 느낀다.

(224)

흠잡을 데 없는 똥. 딱 한 덩어리뿐이다. 완벽하게 매끈하고, 모양도 반듯하다. 차지면서도 끈끈하진 않고, 냄새는 나되 악취는 아니고, 단면이 깔끔하며 균질의 갈색을 띠고 있다. 딱 한 번 힘줘서 쑥 빠져나왔다. 휴지에도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니, 이거야말로 완벽한 장인의 솜씨다. 내 몸아, 참 잘해냈다.

(267)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위아래로 가볍게 흔든다.

: 계속 이야기해봐, 관심 있으니까.

시선은 어느 한 지점에 고정하고 손가락으로 식탁 위에서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한다.

: 그 얘긴 벌써 백 번도 더 했잖아요.

속으로 어렴풋이 미소를 지으며 시선은 테이블보에 고정되어 있다.

: 내가 말은 하지 않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요.

빈정거리는 미소

: 내가 맘만 먹으면 박살을 내줄 텐데.

눈의 역할

: 눈을 돌리는 건 자기 맘을 몰라줘서 답답하다는 의미, 눈을 크게 뜨는 건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 눈꺼풀이 축 처지면 지쳤다는 의미……

(281)

그에 따르면 이명은 아주 적응이 잘 되는 병이라고 한다. 아니, 더불어 사는 거라고 봐야지, 그가 말을 고쳤다. 그래도 어쨌든 고요함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 에티엔도 나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와 똑 같은 비유를 했다. 꼭 내 몸이 켜진 라디오에 연결돼 있는 것 같더라고. 스피커 신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게 정말 달갑진 않더군.

(303)

분만실에서 아기를 받을 때 그들은 둘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영원히 셋이다. 반투명한 작은 손가락들, 활짝 피어오른 뺨, 토실토실한 팔과 종아리, 통통한 배, 주름, 보조개, 아기 천사의 튼실한 궁둥이, 이 빵빵한 타이어 같은 생명체는 그들의 사랑의 결실인 것이다! 또 그 눈길은! 신생아들이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우릴 바라볼 때의 눈길은 어떤 말없는 신성(神性)에 속한 걸까? 이토록 검은 동공, 이토록 선명한 홍채를 가진 두 눈은 무엇을 향해 뜨고 있는 걸까? 누구를 향해 숨겨진 이면을 열어 보이는 걸까? : 앞으로 제기될 모든 질문을 향해. 채워지지 않는 이해의 욕구를 향해. 젊은 부모는 몸의 기운을 다 빼고 난 뒤 정신의 기운까지도 다 탕진할까 봐 두려워한다. 그들이 피곤해하는 건, 자기들의 일에 끝이 없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 그레구아르의 속눈썹이 닫힌다…… 그레구아르가 잠이 든다…… 아기를 침대에 눕히는 실비의 태도는 경건하리만치 조심스럽다. 이 전지전능한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처럼 보이는 놀라운 재주를 갖고 있다.

(339)

우리처럼 소심한 보통 사람들이 자기 능력으론 조금도 제어할 수 없는 기계들(비행기, 기차, , 자동차, 승강기,  롤러코스터)을 어떻게 맘 편하게 믿고 생명을 맡길 수 있는 건지! 사용자의 수가 워낙 많다는 사실이 우리의 걱정을 가라앉히는 건 아닐까? 다시 말해 인간의 지성을 믿는다는 얘기다. 그토록 많은 능력자가 힘을 모아 이 기계를 만들었고, 그토록 많은 비판적 지성이 매일매일 그것들에 자기 몸을 맡기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뭔가. 거기다 통계학적 논거까지 덧붙인다. 목을 러뜨릴 위험은 그런 기계 안에 들어가 있을 때보다 길을 건널 때 오히려 더 크다는 식으로. 또한 운명의 힘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운명을 기계의 우연에 맡겨야 한다고 해서 속상해할 것 없다. 악의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세포 대신에 차라리 순진한 기계가 우리 운명을 결정짓도록 놔두는 게 낫다.

(458)

내 몸과 나는 서로 상관없는 동거인으로서, 인생이라는 임대차 계약의 마지막 기간을 살아가고 있다. 양쪽 다 집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사는 것도 참 편안하고 좋다. 그러나 최근의 혈액검사 결과를 보며, 이젠 마지막으로 펜을 들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평생 자기 몸에 관해 일기를 써온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을 거부할 수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