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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이번에 읽은 책은 정민님의 <삶을 바꾼 만남>이라는 책이란다. 이 책을 구입한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이제서야 읽었구나.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이렇단다. 아빠가 오래 전에..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2013년에 아빠의 선배님이 정병설님의 <권력과 인간>이라는 책을 추천해주었어. 그래서 그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책은 “우리시대의 명강의” 시리즈 중에 한 권이었단다. 그 시리즈의 낯익은 이가 한 명 더 있었단다. 정민님이었어. 그 분의 책은 아빠가 좋아하는 정약용을 다룬 책이었단다.
이 책의 부제는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정약용이 유배를 가 있는 동안 알게 된
제자와의 인연을 다룬 이야기란다. 황상은 정약용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아들들과도 인연을 맺었어. 오랜만에 정약용에 관한 책을 읽어서 너무 좋았단다. 말이 18년이지, 큰 잘못도 없이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러나 그
유배생활 동안 학문에 더욱 힘썼단다. 그 많은 저술이 유배생활에서 나온 것이니, 그가 유배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저술도 많지 않았겠지. 뭘 해도
대단한 사람이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아빠는 줄곧 정약용에 감정이입을 해서 읽었단다. 가족과 헤어진 생활. 처음 유배 생활을 시작할 때는 몇 년만 할
거라 생각했을 텐데.
1.
정약용은 정조 사후 천주교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1801년 11월을 유배되어 전라남도 강진에 도착했단다. 총애하던 정조가 죽자마자 김씨 외척 세력이 정권을 잡고 줄곧 각을 세우던 정약용을 유배 보낸 것이 실제 이유였지. 그때 정약용의 나이는 마흔 살이었단다. 가장 교육이 중요할 나이의
아이들을 두고 멀리 떠나온, 교육열 강한 아버지였던 정약용은 편지를 통해 자식들을 훈육했단다. 그의 편지는 이미 다른 책들을 통해서 여러 번 봤는데, 자식들에게
엄한 아버지처럼 보았단다. 강진에 처음 왔을 때 정약용은 주막에 방 한 칸을 얻어 지냈단다. 그리고 그 방의 이름을 사의재로 지었는데 그 뜻은 아래와 같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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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사의재(四宜齋)는 내가 강진에 귀양 와서 사는 집이다. 생각은 담백해야 한다. 담백하지 않으면 서둘러 이를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장중해야 한다. 장중하지 않으면 빨리 단속해야 한다. 말은 과묵해야 한다. 과묵하지 않으면 바삐 멈춰야 한다. 동작은 무거워야 한다. 무겁지 않거든 재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라 하였다. 마땅하다(宜)는 것은 의롭다(義)는 뜻이다. 의로움으로 통제한다는 의미다. 나이가 들어감을 생각하다보니 뜻과 학업이 무너진 것이 슬퍼서 스스로 반성하길 바란 것이다. 이때는 가경8년(순조3, 1803) 겨울 11월 신축일 초열흘, 동짓날이니, 실로 갑자년이 시작하는 날이다. 이날 <주역>의
건괘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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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은 자신의 방에 이름을 붙여주곤
했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빠도 아빠의 방에 이름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이름을 찾지 못했구나. 음…
한번 지어봐야겠구나.
…
정약용은 유배 온 지 1년이 지나고 서당을 열었단다. 주변 마을의 아이들이 와서 공부를
했는데, 그곳에서 황상을 만나게 되었단다. 그 당시 황상의
나이는 열 다섯. 황상이 영재나 천재 같은 이가 아니라는 것을 정약용도 금방 알아차렸단다. 하지만 정약용은 황상의 성실함을 알고 더 신경을 써 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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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6)
내 생각을 말해줄까?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들이파면 구멍이
뚫리게 되지. 뚫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구멍이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꼭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얼마나 통쾌하냐?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 않아 힘들고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던 것이 반질반질 반반해져서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은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어기지 않고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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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장 정약용은 다른 훈장과 달랐단다. 당시 서당 교육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여 고치려고 했어. 서당이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천자문>이라는 책과 중국
역사서 <사략>과 <통감절요>에 대한 비판이었단다.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맞지 않는 교과서라는 거지. 앞뒤 뜻도 이어지지
않는 천자문과 남의 나라 역사서를 그렇게 열심히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면서 정약용은 직접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아학편>이라는 책이 남아 있단다. 그리고 아이들의 독서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단다. 그냥 책읽기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분석적으로 어느 시기의 독서가 중요하고 어떻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정약용이 오늘날 살았다면 유명한 블로거나 유튜버가 되었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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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3)
“아이가 글을 읽는 것은 대개9년이다. 여덟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가 그때다. 하지만 여덟 살부터 열한 살까지는 아는 것이 어리석어 책을 읽어도 맛을 모른다. 열대여섯 살쯤 되면 이미 음양에 대한 기호가 생겨 여러 가지 물욕으로 마음이 나뉜다. 실제로는 열두 살부터 열네 살까지 3년간 독서한다. 하지만 이 3년 중에도 여름에는 무더위로 괴롭고 봄가을로는 좋은
날이 많다. 아이들은 놀기를 좋아해서 모두 능히 독서만 할 수가 없다.
다만 9월부터 2월까지의 180일간이 독서하는 날이 된다. 3년을 합쳐 계산하면 540일이다. 여기에다 세시(歲時)의 놀이와 질병이나 우환으로 방해받는 날짜를 빼면 실제로 독서할 수 있는 대략
3백 일이다. 이 3백 일은 하루하루가 보배구슬
같고, 하나하나가 금옥과 다름없다. 하지만 조선의 어린이들은
모두 소미 선생의 <통감절요> 15책을 이 3백 일간의 양식으로 충당한다. 결국 평생의 독서가 이 책 한 질에
그치고 만나. 나머지 다른 책을 읽는다고는 해도 모두 대충대충 읽어 온전히 하지 못하니 족히 꼽을 것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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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서당의 목표도 결국 입시 준비였단다. 그러니까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것이었지. 정약용은 기출 문제를 엮어서
황상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만들어 주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하고 칭찬을 해주는 교육법을 보였단다. 음, 아빠가 배워야
할 점이구나. 아무튼 정약용은 한번 하면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는 이로구나.
2.
정약용이 유배 왔다는 소식에 정약용을
만나러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단다. 그런 이들 중에 마음에 맞는 이와 교류를 했단다. 그런 이들 중에 백련사 혜장 스님도 있었어. 정약용은 혜장 스님과
만나 주역 공부를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편지도 많이 주고 받았단다. 그렇게 그들은 나눈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견월집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구나. 당시 통신수단이 없었다 쳐도 정약용은 사람들과 참 많은 편지를 써서 교류를 했단다. 아빠도 예전에 너희들과 편지노트를 만들어 주고받았었는데, 요즘은
뜸하구나. 우리 뭐 하느라 그리 바쁜 거니?
….
시간이 흘러 흘러 황상 나이 18살이 되었고, 그는 결혼을 했단다. 신혼의 단꿈을 꾸는 것은 당연.. 그렇다 보니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되었는데, 정약용은 이를 심하게 꾸짖었단다. 심지어 아내와
당분간 떨어져 지내라고까지 했단다. 신혼 부부에게 각방을 쓰라고 하더니… 너무 무서운 선생님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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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 공부는 밥 먹듯이 해야 하는 법이다. 숨 쉬듯이 하고, 습관처럼
해야지. 내가 그렇게 두고두고 일렀거늘
- 그리하겠습니다. 다시는 마음을 풀지 않겠습니다.
- 한동안 고성사로 올라가 지내거라. 안과는 당분간 떨어져 공부만 해야 한다. 시를 짓거든 내게 내려보내고. 날마다 목표량을 정해놓고 읽고 쓰도록
해라. 중간에 맥을 놓으면 공부도 덩달아 맹탕이 된다. 새잡이가
되고 만다. 이 길로 올라가거라.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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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무서운 면모도 보였지만, 나중에 황상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진심 어린 축하를 해주었단다. 각방
쓰라고 했는데 아이까지 태어났으면 혼낼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ㅎㅎ
…
아들 정학연이 4년만에 두 번째 찾아왔단다. 이제 어린애의 티가 하나도 나지 않은
청년이 된 아들… 반가움이 절로 났지만, 정약용은 한시가
급했단다. 그 동안 아들에게 가르쳐주지 못한 것을 많이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었어. 강진에 온지 다음날부터 곧바로 공부를 시작했어. 그 공부는 학연이
머물고 있는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단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나. 그때
공부는 문답식 교육이었는데, 그냥 말로 끝난 것이 아니고, 다
기록하여 글로 남겼다고 하구나. 읽을수록 대단하다는 말밖에…
정학연이 강진에 몇 달 머물면서 황상과
만나게 되었단다. 그들이 노는 것은 수준이 다르단다. 백련사
혜장 스님까지 끼어 정약용, 정학연, 황상 이렇게 네 명이
뭐하고 놀았냐면, 詩짓기 시합을 했다고 하는구나. 아빠 같은
사람은 머리에 쥐가 날 텐데, 그들은 댓구를 맞추며 서로 적절한 시를 즉석에서 만들어냈단다. 그리고 정학연과 황상은 혜장 스님의 안내를 받아 대둔산 유람을 하면서 더욱 친분을 쌓았단다. 그런데 그들은 유람이 그냥 유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역시
글로 남겼다고 하는구나. 글쓰기는 정말 쉽지 않을 것인데, 이들은
모든 경험을 글로 남기는구나. 아빠도 본받아 그러고 싶지만 결심을 하지 않으련다.
….
정약용은 머물던 주막집에서 제자의 집으로
옮겼는데, 아무래도 그 자리가 불편하여 다시 외가의 먼 친척의 집에 정착하였단다. 그 집이 그 유명한 다산초당이었단다. 몇 년 전 남도에 놀러 간
일이 있는데, 일정상 다산초당을 가보지 못한 것이 아빠는 요즘도 가끔 후회되더구나. 다음에 오면 되지… 했는데, 빨리
가보고 싶구나. 정약용은 자기 만의 공간이 생긴 것에 기뻐하고 리모델링을 했단다. 집 안팎을 잘 가꾸었는데, 그 내용을 詩로 남겼단다. 이 책에 실렸는데, 산문도 아니고 시로 남겼다니…
…
유배 생활 8년째 둘째 아들 정학유가 찾아왔단다. 8년만에 만난 아들. 읽고 있던 아빠도 울컥했단다. 너희들과 지금 헤어져서 8년만에 만난다고 생각해보렴. 그런 만남을 정약용이 가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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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제목은 <4월 20일에 학포가 왔다. 서로 헤어진 지 이미 8년이 되었다>이다.
“생김새는 내 자식이 틀림없는데
수염 자라 흡사 딴사람 같네.
집 편지 가지고 오긴 했어도
정말로 진짜인가 긴가민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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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반가움은 잠시 이번에도 교육을
시작했단다. 쉬엄쉬엄 교육이 아닌 스타르타식 교육이었지.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랐던 아들… 그런 교육이 후에 <농가월령가>를 집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싶구나.
3.
이 책에서도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정약용
해배 이후의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1818년 드디어 해배. 40살에
시작한 유배 생활이 57살의 중늙은이가 되어 마치게 되다니… 참
이상한 감정이었을 것 같구나. 그런데 사실은 1810년에
이미 해배가 결정되었다고 하는구나. 아들 정학연이 조정에 계속 해배 요청을 했고, 그것이 1810년에 결정되었는데,
권력을 잡고 있던 김씨 외척들이 뜸을 들이다가 1818년에 이르러 집행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이로 인해 흑산도에서 유배를 하고 있던 형 약전은 보지도 못하고… 정약전은
유배 생활 도장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거든.
…
정약용은 서울 근처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단다. 그런데 그때 유배생활을 하면서 둔 소실과 여섯 살 딸 홍임도 같이 데리고 왔대. 성자 같던 정약용이 소실을 두었냐고? 당시는 조선시대라는 것 잊지
말아야 한단다. 그리고 정약용이 유배 생활할 때 중풍이 들었대. 그래서
그의 생활을 돌봐 줄 수 있도록 주위에서 여자를 소개해 준 것이라고 하는구나. 그렇게 같이 서울에 올라왔으나, 소실과 딸 홍임을 곧바로 쫓겨나고 말았대. 본가에서 그들을 인정해주지
않은 것이지. 정약용은 그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그
이후 소실과 딸 홍임은 다시 강진으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어떻게 살아갔는지 소식은 모른다고 하는구나. 그들의 삶이 소설의 좋은 소재로 보이는데, 어떤 소설가가 잘 이야기를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소설 제목은 ‘홍임’
…
정약용의 해배를 가족만큼 기다린 이들이
있었으니 그의 강진 제자들이었단다. 정약용이 서울에 있으니, 정약용의
줄을 이용하여 과거 급제를 해보려는 심사였단다. 하지만 정약용은 그런 위인이 아니란다. 그렇게 되면 강진 제자들과 갈등을 겪고, 나중에는 하나둘 모두 정약용을
떠나갔단다. 과거에 욕심이 없던
황상만 빼고 말이야. 황상은 옛 가르침에 따라 고향에서 농사 지내면서도 학문에 힘쓰고 詩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었단다. 정약용도 그런 황상이 그리워 황상에게 한번 올라오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단다. 그 편지를 쓴 것이 1828년이었는데 황상이 처음 서울에 올라온
것은 1836년이었단다.
반가운 재회. 1836년이면 정약용의 나이는 이미 칠십 대 중반이었단다. 노쇠하고
병약했지만 제자와 만남에 무척 행복했지. 정약용은 결혼 60주년을
뜻하는 회혼잔치를 앞두고 있었어. 그걸 기념하는 詩도 썼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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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407)
황상이 마재를 떠나던 2월 19일만 해도 다산의
용태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침나절에는 감회가 일었던지 결혼 60주년을
돌아보는 시도 한 수 지었다. <회근시>가 그것이다.
“눈 돌리는 사이에 예순 해가 지나가니
복사꽃 짙은 봄빛 신혼 때와 비슷하다.
살아 이별 죽어 이별 늙음만 재촉하고
짧은 근심 긴 기쁨에 임금 은혜 감격하네.
이 밤에 목란사(木蘭詞)는 가락이 더욱 좋고
그 옛날의 <하피첩>엔 먹 자국이 남았구나.
갈라졌다 되합쳐짐 내 형상 그대로라
합환 술잔 남겨두어 자손에게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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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상은 정약용을 집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향하던 중 정약용의 부음을 들었단다. 발길을 다시 돌려 정약용의 장례식에 참석을 했단다. 그렇게 정약용은 이 세상을 떠났단다. 황상은 이후 정학연 정학유
형제들과 교류를 했단다. 강진에서 그들을 만나기 위해 상경한 것도 여러 번이었어. 그리고 정학연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와 형제들도 만나 교류를 했어. 그렇게
돈독한 정을 쌓아갔단다. 하지만 그들도 세월을 비껴 갈 수 없는 노릇이었지. 평생 친구로 살던 정학연이 죽고 나서 황상이 시를 지었는데, 읽다
보니 숙연해지더구나. 세월이라는 것은, 시간이라는 것은 결국
이리 슬픈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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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544)
황상은 정학연의 죽음을 통곡하며 <곡정감역> 3수를
지었다. 셋째 수만 읽겠다.
“이재 완당 산천 공의 좌석에 함께하니
노둔한 말 천리마 터럭에 붙었다고 말들 했지.
만리장성 무너져서 몸은 위태로운데
늦봄이라 꽃 시들고 빗소리는 수런수런.
집 일으킨 큰 사업이 어이 부끄러우랴만
동각의 유편(遺編) 앞에 머리 자주 긁적였지.
시문 어이 일삼으리 휘파람만 그저 불며
남은 인생 다만 그저 술 마시며 울 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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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정학연,, 정학유, 황상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봤는데, 오늘날도 그들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수많이 글들이었단다. 어떤 것을 경험하고 그 느낌을 글로 남기는 것. 그것의 가치가 이렇게
높구나. 아빠가 배워야 할 일이란다. 옛사람들은 먹을 갈고
붓으로 힘들게 글을 써도 그리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지금은 컴퓨터로 두들기면 되는데…. 좀더 글쓰기에 부지런해져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 만남은 맛남이다.
책의 끝 문장 : 기대가 크다.
"생활을 꾀하는 방법은 밤낮으로 궁리해봐도 뽕나무 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구나. 이제야 제갈공명의 지혜로움이 과연 가장 윗길임을 알겠다. 과일을 파는 것은 본래 맑은 이름을 지키는 일이기는 해도 장사꾼에 가깝다. 뽕나무 같은 것으로 선비의 명성을 잃지도 않고 큰 장사꾼의 이익을 얻게 되니, 천하에 이 같은 일이 다시 있겠느냐. 남쪽 땅에 뽕나무를 365그루 심은 사람이 있다. 이것으로 해마다 돈 365꿰미를 얻는다. 1년 365일에 날마다 한 꿰미씩 써서 양식을 삼으니 평생 궁하지 않았다. 마침내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채 세상을 떴으니, 이 일을 가장 본떠 배워야 할 것이다. 그다음은 잠실(蠶室) 세 칸을 짓고 잠박(蠶箔)을 7층으로 만들어라. 모두 스물한 칸에 누에를 길러 부녀자들이 놀고먹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라. 올해 오디가 익었으니, 너는 소홀히 여기지 마라." - P131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처음에 종을 쳐서 시작하고, 끝에는 경(磬)을 울려 마친다. 순순하게 나가다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마침내 화합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악장이 이루어진다. 하늘은 1년을 한 악장으로 삼는다. 처음에는 싹 트고 번성하며 곱고도 어여뻐 온갖 꽃이 향기롭다. 마칠 때가 되면 곱게 물들이고 단장한 듯 색칠하여 붉은색과 노란색, 자줏빛과 초록빛을 띤다. 너울너울 어지러운 빛이 사람의 눈에 환하게 비친다. 그러고서는 거둬들여 이를 간직한다. 그 능함을 드러내고 그 묘함을 빛내려는 까닭이다. 만약 가을바람이 한차례 불어오자 쓸쓸해져서 다시 떨쳐 펴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텅 비어 떨어진다면, 그래도 이것으로 악장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산에 산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매번 단풍철을 만나면 문득 술을 갖추고 시를 지으며 하루를 즐겼다. 진실로 또한 한 곡이 끝나는 연주에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 P161
"깊은 산속에 살며 거친 옷에 짚신을 신고 맑은 못가에서 발을 씻고 고송에 기대어 휘파람을 분다. 집에는 좋은 거문고와 오래된 경쇠(맑은 소리를 내는 악기의 종류)를 놓아두고, 바둑판 하나와 책을 한 다락쯤 갖추어 둔다. 마당에는 백학 한 쌍을 기르고, 기이한 꽃과 나무, 수명을 늘이고 기운을 북돋우는 약초를 심는다. 이따금 산승이나 우객(羽客, 도사)과 서로 왕래하며 소요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세월이 가고 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을 통틀어 이르는 말)가 잘 다스려지는지 어지러운지에 대해서도 듣지 않는다. 이런 것을 두고 청복(淸福)이라고 한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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