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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 서울편 2 - 유주학선 무주학불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두 번째 이야기를 읽었단다. 서울편은 모두 4권을 계획하고
계신데 현재는 2권까지 나왔단다. 얼마 전에 1권을 읽고 나서 2권도 읽고 싶어서 서둘러 찾아 읽었단다. 그냥 스쳐 지나간 서울의 곳곳에 서려 있는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해주시는데, 참
재미있었단다. 유홍준님께서 예전부터 강조한 것처럼 알면 보인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공감하게 하는 내용들이었어. 이 읽은 내용들을 머릿속에 잘 간직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구나. 이제
코로나19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조금만 더 참고, 완전 사라지고 나면 한번 서울나들이를 해보자꾸나. 2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유명한 지리학 박사가 서울을 평가한 것을 읽어보고 시작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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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겐테 박사는 서울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서울의 로케이션은 아주 독특하다. 사방에
뾰족하고 높고 힘찬 산들이 민가가 들어선 곳까지 뻗어 내려오면서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 서울의 모습이다. 이런
전망(view)을 가진 서울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아름답고도 꼽는 군주국 도시 명단에 들어가야
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울을 페르시아 수도 테헤란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비교해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서울에는 (…) 잘츠부르크처럼 웅장하고 엄숙한 기사의 성채가 없고, 테헤란의 (…) 위엄 넘치는 다만반드(Damavand) 산처럼 거대한 산도
없다. 그러나 서울보다 고도가 약 300미터 높을 뿐인 남산에서
내려다보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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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권의 이야기는 한양도성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단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아빠도 한양도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단다.
한양 도성이라는 것이 전쟁을 대비한 성곽인줄 알았어. 그런데 울타리의 개념이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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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만약에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축조했다면 석벽을 사다리꼴로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 파서 두르는 등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도성이 울타리이기 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 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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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도성은 태조 때부터 세종 때까지 지었다고 했어. 주로 농한기 때 백성들을 동원해서 지었고, 이후에는 간간히 복원공사를 했다는구나. 예전에 한양도성을 따라 걷는
순성 놀이라는 것이 있었대. 도성 순례라고도 했어. 그런데 1968년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했던 김신조 사건 이후 북악산의 출입이 한동안 금지되었단다. 약 40년이 지난 2007년이
되어서야 북악산이 다시 개방되었고, 한양도성도 다시 복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는구나. 백 퍼센트 복원은 아니지만, 다시 순성 놀이를 할 만큼의 복원이
되었다고 하는구나.
…
조선을 만들면서 어떻게 이런 명당을 수도로 정할 생각을 했을까. 원래 계룡산 자락에 수도를
지으려고 했었대. 9개월 동안 공사도 진행되었는데, 풍수가
안 좋다는 신하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중단이 되었다는구나. 두 번째로 검토된 곳은 무악산 아래 신촌
일대였다고 하는구나. 그곳도 안 좋다고 해서, 태조가 처음부터
눈 여겨 보았던 북악산 아래로 정해졌다고 하는구나. 다 태조의 빅 픽쳐였던 것 같기도 하고… 서울에는 등산하기 좋은 산들이 많단다. 아빠도 서울에 있는 산에
올라가보곤 했었는데, 산에 올라가서 서울 시내를 바라다 보면 풍수지리에 전혀 지식이 없는 아빠의 눈에도
경복궁의 자리가 아늑하니 자리가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단다. 북악산은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기회 되면 한번 가보고 싶구나.
2.
두 번째 이야기는 자문밖 이야기란다. 자문밖이 어디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 자문은 자하문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자하문은
사소문 중에 하나인 창의문의 다른 이름이란다. 자문밖에는 아름다운 골짜기들이 많아서, 조선시대의 왕족을 비롯하여 상류층들이 풍류를 즐기는 곳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그때 만들어진 지명들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 자문밖의
중심은 세검정이고, 장의사라는 절, 한지를 만들던 조지소, 영조가 만들었다고 하는 세검정 정자, 연산군이 만든 누각 탕춘대
등이 있다고 하는구나. 이곳의 아름다움을 잘 요약해서 적은 글이 있어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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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인조반정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연산군 때 “탕춘대 절벽 밑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지었다.”고 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성종 때 문신인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도성 밖에 놀 만한 곳으로는 장의사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 시냇물이 삼각산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오고 골짜기 안에는 여제단(厲祭壇)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무이정사(武夷精舍, 무계정사를 말한 듯함)의 옛터가 있는데 길 앞에는 돌을 수십 길이나
쌓아올린 수각이 있다. 또 절 앞 수십 보 앞에는 차일암(遮日巖)이 있는데, 바위가 절벽을 이루어 시내를 베고 있는 것과 같으며 그
바위 위에는 장막을 칠 만한 우묵한 곳이 있는데 바위는 층층으로 포개져 계단과 같다. 흐르는 물소리가
맑은 하늘 아래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해 귀가 따갑다. 물이 맑고 돌이 희어서 선경(仙境)이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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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암동에는 여러 위인들의 별장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석파정이 유명하대. 흥선대원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곳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노련한 정치가이기 전에 난초도 잘 그리고, 시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고 책도 많이 읽었다고 하는구나. 지은이 유홍준님은 흥선대원군이 술에 관해 남긴 한마디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 서울편2>의 부제로 정했단다. 그 문장이 참 멋있어서, 외워두고 싶은 문장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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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유주학선 무주학불(有酒學仙 無酒學佛)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석파정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북악산 아래에는 추사가 지내던 백석동천
별서가 있다. 이제 백석동천으로 발을 옮기자니 사제지간에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왠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별서의 팔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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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별서에 머물던 사람 중에 현진건이라는 유명한 소설가도 있는데, 이 분이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소식을 신문에 실을 때 일장기를 없앤 장본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단다. 현진건은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는데, 이 일로 구속 당하게 된 이후에는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구나. 안타깝게도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3년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3.
덕수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궁의 옛이름은 경운궁이었단다. 태조의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죽고
난 다음 묘를 현재 덕수궁 근처에 모셨고, 정릉이라고 불렀어. 이
동네의 이름이 정동인데, 정릉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정릉이 이곳이 아니거든… 나중에 지금의 성북구 위치로 이전을 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태조는 아내 신덕왕후를 생각하는 마음에 정릉 근처에 흥천사라는 절을 지었대.
나중에 릉은 성 밖으로 이장을 했지만, 절은 그대로 남아 있었대. 이 절은 연산군과 중종 때 화재로 전소되었고, 선조 때 정릉원찰이라는
절로 다시 지었고, 정조 때 돈암동으로 옮겨 이름도 신흥사로 바꾸었다가 나중에 다시 흥천사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원래 흥천사 자리 근처에 세조가 의경세자를 잃은 세자비(인수대비)에게 지어 준 집이 있었어. 그런데 세자비의 둘째 아들 성종이 다시
왕이 되어 궁으로 들어오게 되고, 세자비의 첫째 아들 월산대군이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단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에서 돌아와서 이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지내게 되면서 경운궁이라는 이름이 붙었어. 선조가 머물던 곳은 ‘옛 왕이 머물던 곳”이라는 뜻으로 석어당이라고 불렀어. 광해군이 정식 궁으로 지으려고
했으나 반정으로 중단되었고,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아관파천 후 다시 돌아올 때 경운궁으로 환궁을 했단다. 그래서 조선의 마지막 법궁이 되었는데,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온
이유는 서양 열강의 대사관들이 주변이 많아서, 일본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약소국의 황제가 겪어야 하는 아픔이구나.
고종이 경운궁에 자리를 잡으면서, 서양식 건물들을 지었단다.
그래서 덕수궁에 가보면 서양식 건물들이 있는 것이란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황제가 되어 창덕궁으로 가면서 아버지께 덕에 의지하고 장수하시라고 덕수궁이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후 경운궁이라는 이름보다 덕수궁으로 부르게 되었단다. 2000년대 들어서 한때 이름을 다시 경운궁으로
하자는 민원이 있던 적도 있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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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년 2월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1895)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에 상황(上皇)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德) 자, 목숨
수(壽) 자, 덕수(德壽)라는 이름을 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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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화재로 나서 다시 복원을 할 때는
본전인 중화전을 원래 2층이었는데 단층으로 복원했다는구나. 돈이
없어서 말이야. 아, 슬프구나. 그래서 지금 덕수궁 중화전은 1층으로 남있다고 했어. 덕수궁의 문은 대한문이라고 하는데 원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는데,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꿨다고 하는구나. 아빠는 그동안 그 대한문이 대한민국의 ‘대한(大韓)’인줄 알고 있었는데, ‘대한(大漢)’이더구나. 왜 중국의
한나라 漢을 썼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大漢이라는 것은 ‘큰 하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구나. 그래도 이왕 이름 바꾸는 것,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大韓으로 해도
좋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 대한문이 원래는 현재보다 더 앞쪽에 있었는데, 도로를 넓히면서 담장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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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284)
그런가 하면 대한문의
한(漢) 자를 중국의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중국을 숭상하는
뜻이 있다는 주장, 혹은 조선도 중국처럼 큰 나라라는 뜻이라는 설도 나왔다. 반대로 이 글자를 놈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이토 히로부미가 ‘큰 놈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으로 바꾸도록 강요했다는 주장도 생겼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낭설이다. 1907년에 편찬된 <경운궁 중건도감 의궤>에 실려 있는 이근명(李根命)의 <대한문 상량문>에 그 내력이 소상히 밝혀져 있는바, 대한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하늘과 함께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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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권의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단다. 성균관의 ‘성균’이라는
말의 어원은 음을 고르게 조율하는 것을 뜻한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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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성균’이란 음악에서 ‘음을 고르게 조율하는 것’을 뜻하며
<주례(周禮)>의 <대사악(大司樂)>에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성균의 법을 관장하여 국가의 학정(學政)을 다스리고 나라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한다.”
그리고 주소(注疏, 각주)에서는 그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성(成)이란 그 행동의 이지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균(均)이란 습속의 치우침을 균형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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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이 강학하는 명륜당을 비롯하여 대성전을 이야기해주고, 조선시대의 교육체제와 문묘
제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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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
성균관이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향사공간인 대성전(大成殿)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교(敎)와
학(學)이 분리되지 않아 유학(儒學)이면서 동시에 유교(儒敎)임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 때문에 불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성현을
모시고 예를 올리는 종교공간을 갖고 있는데 이를 문묘(文廟)라
한다. 불교에 사찰이 있듯이 유교엔 문묘가 있고, 사찰에
대웅전이 있듯이 문묘엔 대성전이 있고, 사찰에 관음전, 지장전이
있어 보살을 모시듯이 문묘엔 동무(東廡), 서무(西廡)가 있어 역대 성현들을 모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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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지만, 아빠에게 가장 감명을 준 것은 정조 대왕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이었단다. 그것은 비단 유생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모든 이들이 깊이 새기면 좋은 말씀이었단다. 오늘을 살고 있는 너희들과
아빠에게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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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
“아! 제생들아! 그대들은 나의 이 말로 하여 혹 느슨하게 생각하지들 말고 한 치 한 푼이라도 오르고 또 올라 마치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이 항상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듯이 하라. 그리하면 자만하고 싶어도 자만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야 할
것이 학업이고 무궁무진한 것이 덕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바라는 것은 제생들이 그렇게 계속
노력하여 무궁한 발전을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제생들이여! 감히
노력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정조의 ‘100리 길을 갈 때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나는 그간 80리만 가도 다 간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아
조금 뜨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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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기억력이 좋지 않아 조금씩 메모해 둔 것을 토대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보다 너희들이
나중에 커서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작년에 너희들과 덕수궁을 간 적이
있었잖아. 그때는 인근에 전시회에 갔다가 들른 것이라서 한 바퀴 휙 돌고 나온 것이 전부였는데, 이 책을 읽고 났더니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드는구나. 이 책을 읽고
덕수궁에 갔다면 너희들에게 좀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뭐, 다음에 또 가면 되지… 그때는 이 책을 들고 가야겠구나. 그러면 참 좋은 우리들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될 것 같구나.
PS:
책의 첫 문장 : 서울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책의 끝 문장 : 그런 영광과 사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성종 19년(1488)에 명나라에서 온 동월이라는 사신은 <조선부>에서 서북쪽에서 들어오며 한양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
"임진강 나루를 건너 파주에 이르러 한성을 바라보니 저 높이 서기(瑞氣)가 어리었다. 벽제관을 지나 홍제원에 당도하니 여기가 조선의 서울인데 동편으로 우뚝하다. 높은 삼각산에 받쳐 있고 울창한 푸른 소나무 그늘에 덮여 있다. 북쪽은 천 길로 이어져 내려서 그 기세는 진정 천군(千軍)을 누를 만하고 서쪽을 바라보니 한 관문(關門)이 있는데 오직 말 한 필 드나들 만하다. 산은 성 밖을 둘렀는데 날쌘 봉황이 날아가며 번뜩이는 것 같고 소나무 아래에 흰모래는 마치 쌓인 눈에 햇볕이 내리쬐는 듯하다." - P44
석파(이하응)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 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讀己見書 如遇故士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 만나듯 하고 이미 본 때를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 P151
현진권은 자신이 역사소설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 <문장> 1939년 12월호에 <역사소설문제>를 기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을 위한 소설이 아니오. 소설을 위한 사실인 이상 그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띄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담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둥 도피적이라는 둥 하는 비난의 화살은 저절로 그 과녁을 잃을 것입니다." - P168
먼 옛날로 돌아가서 600여 년 전, 수도 한양의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을 설계한 삼봉(三峯) 정도전은 동네마다 이름을 지으면서 성균관 일대는 ‘가르침을 숭상한다’는 의미로 숭교방(崇敎坊)이라고 했다. 오늘날 대학로가 있는 성균관 옆 동네가 동숭동(東崇洞)인 것은 숭교방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 P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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