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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랜만에 도올 김용옥님의 책을 읽었단다. 도올 선생님은 고전 강의를 재미있고 신랄하게(?) 해서 많은 사람에게 유명해진 사람이란다.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도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지식인이자 철학자란다. 도올 선생님의 강의를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오래 전에(거의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불교 강의를 감명 있게 본 적이
있단다. 그 이후 도올 선생님의 책들을 여럿 찾아 읽은 적이 있단다.
한동안 도올 선생님의 책들을 읽지 못했는데, <우린 너무 몰랐다>라는 책의 평이 좋아서 읽어보았단다.
역사 이야기더구나. 그것도 현대사에 관한 역사 이야기. 도올
선생님이 이런 현대사에 대한 책을 쓴 적이 있던가. 알아보니 도올 선생님이 해방 후 제주4.3사건과 여순민중항쟁에 대한 강의를 했었고, 그것을 기반을 책을
쓰신 것이더구나. 아빠가 책을 난 다음에 유튜브를 통해 그 강의를 찾아 보기도 했지만,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도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구나. 분명
책을 읽는 것인데, 음성지원이 되는 듯한 신기한 경험. 재미있으면서도
슬프고 억울하고 답답했단다.
제주4.3사건과 여수민중항쟁은 조정래 선생님의 <태백산맥>을 비롯하여 여러 책을 통해 접해서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도올
선생님이 시원하게 정리해주신 그런 기분이었단다. 도올 선생님은 역사 강의도 참 잘하시는구나.
1.
제주4.3사건과 여순민중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1945년
해방 이후의 이야기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해주고, 도올 선생님이 현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셨단다.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나레이션도 하고 출현도 한, EBS 다큐멘터리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에 대한 뒷이야기도 해주었어. 아빠도 십여 년 전에 그 다큐를
몇 편 봤던 기억이 있단다. 그리고 이 책에 직지심경과 고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단다. 읽을 때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서 좋았는데, 다시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니, 이 책에 왜 고려시대와 직지심경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었는지 모르겠구나. 승리한 자들의 역사 왜곡을 이야기하면서 고려 역사에 대한 왜곡을 이야기를 했는데, 이 책의 주제라고 생각하는 제주4.3사건과 여순민중항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구나. 한 가지 연관성은 둘 다 역사 왜곡에 의해 후세에 잘못 알려졌다는 점. 그것 치고는 고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단다. (그래서 나쁘다는
건 아니고, 좋긴 했는데 연관성이 무엇이었는지…)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은 고려에 관한 역사서를 썼는데, 조선 건국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고려를 너무 깔아내려 기술하였다고 하는구나. 도올
선생님은 정도전에 관한 책도 쓰신 분이었지만, 이런 역사 왜곡은 정도전의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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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나는 개인적으로 정도전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 직계 장손과도 친하게 지냈고, 그에
관해 책도 썼고, 강연도 많이 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처럼 자격 있는 혁명가를 찾기도 힘들다. 그는 맑스나 레닌과 같은 진짜 혁명가이다. 이론과 실제를 다 갖춘, 혁명을 위하여 자기의 삶을 불사른 멋진
사나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전체대의를 위해 생각을 해볼 때, 그가
저지른 오류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오류는 고려대제국의 실태와 그 가치를 근원적으로
훼멸시킨 것에 관한 것이다. <고려국사>는 용서할
수 없는, 왜곡의 사서이다. 그것이 정도전 개인의 오류로
끝났으면 다행이겠지만, 향후 조선민족의 역사 인식 전체에 너무도 끔찍한 악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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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자, 이제 본격적으로 해방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전에도
아빠가 해방, 그러니까 광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번 갑작스러운 해방이 우리나라에게 결코 좋은
조건이라고 한 적이 있었잖아. 그 점을 도올 선생님도 지적을 했어.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과 갑자기 맞이하게 된 해방. 다행이 해방을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이가 있었으니, 여운형이었단다.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줄여서 건준을 통해 해방 후 나라가 나아갈 길을 준비하고 있었어. 해방이
되자마자 여운형의 건준을 중심으로 체계를 잡아가려고 했지. 하지만, 일본을
굴복시킨 미국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시키고 우리나라 땅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서울에 일본 깃발을 내리고, 미국 깃발을 올렸다고
하니 말이야.
주한미군군정 군정 총독으로 하지라는 사람이 왔는데, 이 사람은 우리나라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하는구나. 그와 별개로 해방과 함께 전국에 인민위원회라는 자치기구가 생겨나기 시작했어. 오늘날까지 인민이라고 하면 북한에서 국민 대신 쓰는 말이라서 공산주의와 연관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금기어처럼 되어버렸지만, 인민이라는 말은 아주
오래 전 고전에도 나오는, 보통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단다. 그러니까
인민위원회라는 말이 보통 사람들이 만든 위원회로 문제되는 조직은 아니었어.
…
하지만, 해방 후 정세는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어. 남한에는 미국 말을 잘 듣는 사람, 북한에는 소련 말을 잘 듣는
사람이 권력을 잡아가고 있었단다. 아주 교묘하고 악랄하게 말이야. 남한에는
미국에서 박사까지 딴 뼛속까지 친미파인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구애를 했어. 그리고 이승만, 맥아더, 하지
이렇게 셋이 도쿄에서 3자회담까지 했단다. 이 모임 이후
맥아더는 이승만을 추켜 세우기 시작했고, 남한에 귀국한 이승만은 일인자가 되어가기 시작했고, 자신의 길을 방해하는 이는 몰래 죽여버렸단다. 도올 선생님은 이승만을
거룩한 사기꾼이라고 이야기하더구나.
…
북한에서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은 젊은 김일성이 권력구도에 앞서 갔단다. 사실 소련이 한반도
문제에 끼일 여지는 없을 수도 있었어. 그런데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이 소련에게 참전요청을 했고, 소련은 눈치를 보다가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지고 나서 참전을
했대. 그리고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난 다음, 한반도 문제에
간섭을 한 것이지. 소련도 참 영악한 면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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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우리는 ‘해방’이라는 원점의 성격으로부터 다시 문제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해방을 맞이하는 건준이라고 하는 슬기로운 주체세력이 있었고 그것은 전국의 인민위원회 조식의 구심점이 되었지만, 해방을 가능케 한 물리적 주동세력은 미국과 소련이라고 하는, 세계사의
무대를 분할하는 양대 신흥세력이었다는 것은 이미 갈파한 바와 같아. 해방의 주체가 우리민족이 아닌, 미국과 소련이었다고 한다면 이 해방정국 공백의 새로운 모델링의 결말은 이미 명약관화하다. 그것은 미국에 붙어 미국말을 잘 듣는 놈이 이남을 먹을 것이요, 소련에
붙어 소련말을 잘 듣는 놈이 이북을 먹을 것이다. 이 두 놈은 모두 토착세력이 아닐 것이고 소련과 미국에서
자기세력을 키웠거나, 소련과 미국의 지도자들에 특별한 총애를 받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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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었지만, 어떻게 나라꼴은 더 안 좋은 쪽으로 가는지 모르겠구나. 패전은 일본이 했는데, 왜 우리나라가 두 쪽으로 갈려져야 하는지… 그것을 돌이킬 수 없어, 왜 오늘날까지 오고 말았는지… 이 시절의 역사를 읽을 때마다 안타까움이 그지 없구나. 도올 선생님은
맥아더의 큰 실수 중에 하나로 천황을 존속시킨 것이라고 이야기하더구나. 아빠도 동의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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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동아시아역사에 대하여
맥아더가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인류사의 근원적 진보에 공헌할 수 있는 결정적 찬스를 놓친 죄악에
가까운 오류는 전후에 일본의 천황제를 존속시킨 것이다.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것이 미국의 일본지배를 쉽게
만들고, 동아시아에 있어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히로히토는 1945년 9월 27일 맥아더의 SCAP 헤드쿼터를 두 발로 찾아가 목숨을 구걸했다. 그리고 미국의 이해관계에 전적으로 부속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것은
미국이 나치정권의 독일국가를 근원적으로 해체시킨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의 전후처리였다. 일본국가가 근원적
변화가 없이 존속하도록 하면서 몇 명의 전범만 코스메틱한 효과로 처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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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해방 후 정세를 간단히 이야기를 하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하고, 1945년 9월 9일 미군정을 시작했으니, 우리나라의 해방은 단 25일뿐이었던 것이란다.
3.
그러면 왜 임시정부요인들은 서둘러 귀국하지 않았을까. 시대감각과 정치감각이 떨어졌다고 도올
선생님은 평가했단다. 임시정부요인들과 여운형의 건준은 미군정을 인정하지 않았대. 이미 남한은 미군정의 손에 넘어갔는데 말이야. 여운형은 미군정과
별개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창설했지만,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인민위원회를
불법으로 규정했어.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형국. 거기에 여운형까지
암살당했으니 그야말로 우리나라는 혼란의 시기였단다.
해방 후 또 하나의 중요한 이슈가 신탁통치에 관한 것이었단다. 동아일보의 가짜 뉴스와 우파
세력의 정쟁적 이용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신탁통치를 찬성하면 나쁜 놈, 반대하면 좋은 놈이란 프레임이
만들어졌다고 하는구나.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그러나
신탁통치의 내용을 제대로 보고, 그대로만 이루어진다면 나라의 기능이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었대. 좌익은 이 신탁에 대한 내용을 잘 알아보고 나서 찬탁을 한 거라는구나. 우익
쪽에서도 신탁에 대한 내용을 정확히 이해한 송진우 같은 분은 신탁 통치를 찬성했대… 그런데 그 또한
암살을 당했다는구나. 우익은 신탁에 대한 내용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정치적으로만 이용해서 반탁을 하였다는구나. 친일 세력을 기반을 한 한민당뿐만 아니라 임정도
반탁의 입장이었어.
…
4.
자, 이제 제주4.3사건을 알아보자꾸나. 제주의 옛 이름은 탐라. 신라시대 외세의 침입을 막고자 지은 황룡사구층탑에도
탐라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 이야기는 옛날에는 한 나라였다는 소리야..
그러다가 고려 고종 때 처음으로 한반도 대륙 질서 속에 편입이 되었고, 이후 제주목사들이
관리를 했는데, 하나같이 대부분 날강도였다고 하는구나. 임금한테
바쳐야 할 공물도 많았고 말이야. 그것이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 이어졌대.
제주에도 해방 후에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서 그들을 중심으로 자치가 잘 이루어지고 있었어. 1947년
북국민학교에서 3.1운동 28주년 기념식에 3만명 가까이 모였대. 이 기념식은 인민위원회가 주도를 했어. 이 기념식은 단순히 3.1운동만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었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온전한 통일을 기념하는 시위도 함께 했단다. 평화적인
시위였지. 하지만, 이 시위에 미군정 경찰이 투입되어 총격을
가해 제주도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어. 이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할 것을 요구했으나, 정당방위로 마무리했단다.
이것을 주도한 것이 경무국 국장 조병옥이었단다. 이후 제주도는 총파업에 들어갔단다. 당시 제주도 초대 도지사 박경훈은 도민들 편에 섰다가 해임당했어. 그리고
제주도 시위를 막기 위해 투입한 이들 중에 서북청년단이 있었단다. 북한에서 토지개혁 이후 땅을 빼앗기고
남한으로 이들로 공산당에 치를 떨던 이들이었는데, 완전 깡패나 다름없었어. 이들은 열렬한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조병옥과 장택상이 후원해졌어. 서북청년단이
제주에 투입하면서 대대적으로 제주도민을 탄압했단다. 이것이 1948년 4.3 제주민중항쟁까지 이어지게 되었어. 오랫동안 4.3 제주민중항쟁은 빨갱이의 짓이라는 둥 남로당이 개입했다는 둥 왜곡된 기록이 더 제주도민들을 아프게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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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3)
4.3은 결코 “무장봉기”가 아니다. 억눌린 민중이 소총 몇 자루 가지고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을
민중항쟁의 핵심적 사태로 인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중항쟁의 가냘픈 호소일
뿐이다. 그들을 결코 “무장대”라고 불러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무장대”가 되려면 무력을 계속해서 공급받을 수 있는 루트가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나, 월맹의 호치민과 같이 지속적으로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4.3사태 이후의 토벌이라는 것은 “무장 대 무장”의 전쟁이 아니라, 그냥
정부병력의 민간학살일 뿐이다. 4.3의 의미를 침소봉대할 수 없다. 산으로
피신 간 사람들은 무장투쟁을 위해 간 것이 아니라, 단지 학살을 피하기 위한 도피였을 뿐이다.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 또한 사가들이 오해하는 거대한
오류 중의 하나가 “무장대의 무장봉기”를 “남로당”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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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주도민의 시위를 진압하려는 이들이 9연대였고, 9연대장인
김익렬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이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단다. 하지만, 이승만과 조병옥의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그래서 김익렬을 해임시키고, 박진경이라는 사람을 9연대장에 앉히게 된단다. 그가 취임사에서 한 말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했어. “제주도민 30만명을 모두 죽여도
좋다.”
음, 이런 미친 사람이 있나. 그의 이런 말이 거짓이
아니었어. 그가 취임하고 나서 한달 만에 제주도민 오천 명이 학살당했대. 그리고 그 일로 대령 승진을 했다는구나.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었지. 하지만, 그래도 군대 내부에도 양심세력이 있었어. 박진경의 만행을 보다 못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등은 박진경을 죽였단다.
그리고 그들은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체포 당했어. 그들이 재판에서 한 말을 읽고 나서 어찌나
울컥하던지. 이런 분들이 계셨다니, 그동안 그들의 존재조차
몰랐다니.. 그분들의 이름을 꼭 기억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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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40)
박진경의 도민학살을 견디다
못해 그의 암살을 기획한 것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였다. 그리고 그 거사에 동조한 양회천 이등상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배경용
하사, 이정우 하사(입산 미체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의 이름도 같이 기억되어야 한다. 문상길 중위는 충청도 사람으로 육사 3시다. 제3중대장이었으며 독실한 기독교이었다. 그의 최후진술은 다음과 같다.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인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사람들로써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해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 때문에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후 모든 사람들도 저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적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적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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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은 계속된 탄압으로 7년 넘게 이어지다가 1954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단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왜곡된 역사는
계속되어, 제주4.3사건과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을 제대로
살 수가 없었어. 민주 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말과 2000년대 초에 들어서야 진실 규명이 시작되었고, 그들이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게 되었단다.
5.
간단히 이야기하면, 여순민중항쟁은1948년 10월 19일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을 말한단다. 앞서 제주4.3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제주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이라는 사람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가 밉보여서 해임되었다고
했잖아.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해임된 것이 아니라, 14연대장으로
좌천이 되었단다. 그런데 그 14연대가 있는 곳이 어디냐? 바로 여수였단다. 김익렬이 여수에 있는 14연대장으로 오면서 제주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준 거야. 그러니까 14연대에 있는 군인들은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었지.
그런데, 말이야. 어느날 명령이 떨어졌어. 제주도민들을 토벌하라고 14연대에 명령이 떨어진 거야. 제주도의 실상을 다 알고 있었는데, 그들을 죽이라고? 못하겠다고 했지. 14연대는 명령 거부를 했어. 양심에 따라 행동한 거지. 그러면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고, 그들은 산속으로 피했어.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이 얼마나 열 받았겠니..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토벌 명령을 내렸어. (아, 이승만 같은 사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다니… 우리나라가 무엇을
잘못을 했길래 이런 벌을 받는 것인지…)
토벌대가 여수에 왔을 때 14연대는 그곳을 떠나고 없었고 민간인들만 남아 있었어. 토벌대는 민간인들을 죄다 모으고 14연대를 도와주었던 민간인들을
색출했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지목을 당하면 총살을 당해야 했단다. 수천
명이 그렇게 죽었다고 했어. 이것이 여순반란이라고 잘못 이름 붙여진 여순민중항쟁의 진실이었던 것이란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여순반란이라고 알고 있어. 제주4.3사건은 진실규명이 많이 되었지만, 여순민중항쟁에 대한 진실규명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단다. 이 또한 우리 현대사의 아픔인데 말이야.
여순민중항쟁도 얼른 진실규명이 되어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었으면 좋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 요즈음 내가 가깝게 왕래하는 친구로서 박소동이라는 인물이 있다.
책의 끝 문장 : 남국이라고는 하나 시월도 이미 기울어 찬서리가 사정없이 내리는 밤, 꿇어 앉은 알무릎 밑에 모래알이 아프게 상안되면서{“상감”과 같은 뜻, 들이박힌다}, 사람들은
일헤반(7과 1/2) 동안의 서글픈 꿈에서 깨어, 경각을 모를 위태로운 자기 생명을 조마조마 어루만지는 것이었다.(<민주일보> 1948년 11월 3~5일)
내가 말하려는 하는 것은, 구례가 비록 우리 현대사에서는, 피아골 공비의 이미지와 겹치는 불운한 벽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고, 당대사를 다룬 걸작 역사서가 탄생할 만큼의 정보가 오가는 물류의 교차로였다는 것이다. 무지한 미군놈들이 함부로 총구를 들이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고을 한 고을마다 축적된 문명의 심도는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아메리카의 산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문명, 문화의 서기가, 풀 한 포기에도 자욱하다. 정유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고도 칠천량해전의 참상을 연민하며 백의종군 하겠다고 쓸쓸한 심사를 달래며 거쳐간 곳이 구례이며(구례에 지금도 백의종군로가 남아있다. 구례군민들의 지극한 간호와 위로로 이순신은 고문의 여독을 좀 풀 수 있었다), 해방 후 지방 건준조직이 최초로 결성된 곳도 구례다. - P27
우리가 중국의 속국인 듯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쿠데타사건 이후로 과도하게 조선왕조를 스스로 비하시키고, 제후국으로서의 모든 프로토콜을 엄수하게 된 이후의 사태이다. 조선왕조의 성립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성계는 고려제국에서 본다면 아웃사이더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군사쿠데타는 정통성이나 정당성을 확보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정도전이나 조준 같은 개국공신들의 인식체계를 통하여 고려말 사회를 "필망(必亡)"의 혼란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치를 잘 도와 새로운 세상을 도모했더라면, 친명이 그토록 비굴한 사대나 이념적 굴종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정권 이씨조선은 개국초기의 혼란상이나 정통성 부재의 현실, 그 모든 것을 철저히 명에 대한 굴종적 아이덴티티를 통하여 극복하려 했다. - P60
여순민중항쟁이야말로 세계사를 선도한 조선민중의 정의감의 발로였으며, 여순민중항쟁을 빌미로 6.25동란을 위시한 향후의 모든 세계사적 비극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났고, 우익반공파시즘의 가치체계가 설칠 수 있었는가 하며, 또 반면 우리 민중의 심오한 내성의 양심 속에서 인류사에 새로운 희망을 던질 수 있는 민주의 촛불이 켜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어마어마한 세계사적 사건을 해방 정북의 복잡하고 중층적인 인식체계로부터 접근해야만 합니다. 나는 이 접근을 시도하기 전에 여러분과 함께 다음과 진실을 외쳐야만 하겠습니다. 여순은 민중항쟁이다! - P103
여러분들은 해방정국에서 "좆됐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나의 말을 기억할 것이다. 이들은 좆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8월 15일부터 움츠러들었고 소리 없이 지냈다. 그런데 움츠러든 사람들은 누에의 굴신작용처럼 반드시 펼 날을 기약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촛불혁명 때문에 움츠러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좆됐다파들은 대체로 가문이 좋고 지체가 높고 지식이 많았고, 영어를 잘했고 서구유학파들이고 기독교도들이 많았다. 이들은 건준에 가담하지 않았고 "건준+인민위원회" 세상의 형국을 불쾌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희소식이 날아왔다. 와! 미군이 온다! 드디어 미국이 입성한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야! 이제 움츠리고만 있을 수 없다. 기지개를 펴자! 이들은 본시 서양파들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입성, 미국이 조선의 최대의 권좌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죽어가는 물고기에게 물을 부어 연못을 만들어주는 것과 똑같았다. - P173
이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이야말로 1946년 전국적인 10월봉기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제주 4*3과 여순민중항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남로당의 정치적 공작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남로당은 그러한 대중동원조직체계나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몇몇 지식인들이나 지식인 반열에 들고 싶어하는 허영끼 있는 인간들의 픽션에 불과했다. 민중에게 절실한 것은 오직 "쌀’이지 공산이념이 아니었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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