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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통권 171호 - 2020년 3월~4월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0년 3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또 선거철이 되었구나. 온 세계에 코로나19가 창궐하여
선거가 정상적으로 치뤄질지 모르겠지만, 총선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중요한 선거 중에 하나란다. 그렇게 뽑은 국회의원들 중에 많은 수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대의
민주주의제도에서 없앨 수도 없는 노릇. 그런데 대의 민주주의제도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모순덩어리였던
선거제도. 우여곡절 끝에 비례대표 연동제 도입으로 손질을 보았지만, 이를
악용한 비례대표만을 위한 위성 정당의 출현. 이 불법 정당을 선관위가 허용해주는 바람이 선거판은 개판이
되고 말았단다. 비례대표 연동제라는 의도가 무엇인지 뻔히 아는 마당에,
선관위가 위성 정당의 제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선관위가 자신의 역할을 내팽개쳤다고 아빠는 생각한단다.
최악의 정당이 그런 위성정당을 만들어 반칙을 쓸 때, 다른 정당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그것 또한 쉽지 않은 결정이란다. 그들을 따라 하는 것은 선거제도
개혁을 역행하는 것이고, 그들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은 최악의 무리에게 국회의원 자리를 헌납하는 것이고… 결국 다른 정당들은 당원들의 의견을 묻거나 최고회의의 결정으로 각자 방향을 잡았단다. 그러면서 당내 갈등, 당간 갈등이 심화되기도 했어. 아빠가 응원한 정당들 또한 이런 갈등에서 피해가지 못하고 많은 상처들을 입었단다.
그래도 다시 정비를 해야 한다. 선거라는 것은 최선을 뽑는 것이 아니라 최악이 안 뽑히게 하는
것이 중요하거든. 코로나19로 인해 선거투표율이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이번 선거로 인해 이기적인 무리들이 국회에서 사라졌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아빠가 생각하는 국회의원 선거는 말이야. 지역구를 모두 없애고 100% 비례대표로 뽑는 거야. 정당 지지율 그대로 국회의원 수를
할당 받는 거지. 그래야 그나마 대의민주주의제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구나. 법 만드는 사람들이 굳이 지역구를 기반을 할 필요가 있냐 말이야. 지역구의
정책은 지자체에 맡기면 되는 것이고 말이야. 아빠의 말이 길어졌구나.
….
녹색평론 171호는 선거철을 맞이하여 선거에 관한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있단다. 선거는 이미 엘리트들의 싸움이라고 했어. 국민들을 위한 선거라는
말은 그저 포장된 말뿐이라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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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렇다면 선거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기득권층 내부의 싸움, 즉 사회적으로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엘리트들’끼리의 권력 쟁탈 게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기득권층의 영구적 권력 향유를 보장하는 합법적 메커니즘’인 것이다. 사실, 선거(election)라는 말 자체가 원래 엘리트(elite)라는 말과
어원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일찍이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만약에 선거로 진정한 개혁이
가능하다면, 선거는 벌써 오래전에 (지배층에 의해) 불법화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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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모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선출직의 의회를 통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데, 그
의회의 뿌리를 보면 민주주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하는구나. 국민들의 수가 많다 보니 직접 민주주의를
할 수 없으니, 그것에 대안으로 나온 것이 대의 민주주의이고, 그
대의 민주주의의 상징이 바로 의회라고 생각들 하고 있지만, 이 의회라는 것이 중세에 처음 출현 할 때는
엘리트 독점 기구였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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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의회는 중세 초기의 혼란이
가라앉고 점차 봉건적 질서가 안정되던 시기의 유럽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제도이지만, 그 기능은
왕과 귀족들의 회의의 장으로서 민주주의의 기구 따위는 전혀 아니었다. 영국의 경우 엘프레드대왕의 앵글로-색슨 왕국 시절부터 ‘위탄(witan)’이라는
기구가 있었지만, 이는 ‘지혜로운 자들의 모임’이라는 그 말의 의미대로 전쟁이나 징세 등과 같은 국가 대사를 놓고서 왕과 귀족들이 숙의하고 합의하는 장이었다. 이후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바이킹들을 이끌고 윌리엄 1세가 영국을
정복한 이후 그나마 위탄도 폐지되고, 전권을 쥔 정복왕이 법률을 정할 적에 자문을 행하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회의체 정도만 남게 된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 회의체에 귀족과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영국 각 지역의
기사들 및 시민들(burgess)도 참여하게 되면서 의회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고, 14세기가 되면 이른바 ‘모범 의회’와 같은 틀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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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정당의 본질은 무엇인가? 의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왜 정당이 필요한가? 굳이 정당 없이 일반 국민들 중에 무작위로 뽑아서 의회를 만들 수도 있거든.
똑똑하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의회의 대표가 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이 소위 똑똑하거나 성공했다고 하는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정당이라는 것들을 만들어서 의회를 독차지하고 있어.
이 정상이라는 것은 2차세계대전 이후에 두드러졌다고 하는구나. 그 이후 정치에서는 좋든 싫든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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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차대전이 끝난 뒤 이렇게 마비되어버린 의회민주주의를 되살린 핵심적인
받침대가 바로 정당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정당이란 뜻과 이익을 함께 하는 도당에 불과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그 전과는 다른 각종 대중정당들-대표적으로 노동자들의 사회민주당-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들이 완전히 의회 내의 제도 정당으로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이 정당들의 의회 바깥에서 사회 전체를 양분하는 노동과 자본이라는 양대 세력을 각각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고, 각각의 입장에서 산업사회 전체를 어떻게 개조하고 운영할 것인지의 구체적인 방안과
또 그것을 실현할 인물들 그리고 홍보하고 정당화시키는 조직 동원의 장치까지 구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당정치의 안정으로 인해 의회는 산업사회의 통치 주체로서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당들은 그 자체로
‘준비된’ 집권세력이었다.
선거는 그러한 집권세력 몇 가지 중에서 선택을 하는 행위가 되었으며, 의회는 그러한 집권
정당의 준비된 통치가 야당의 견제 속에서 관철되는 장으로 성격이 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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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당 중심의 의회 민주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단다. 국민들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기 일쑤이지. 그래서 많은 나라에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들을 하려고 하지만, 정작 의회 민주주의를 차지하고 있는 정당들은 자신들의 밥그릇 생각에 바꿀 생각을 별로 안 갖고 있는 것이 문제란다. 그들을 바꾸기 위한 방법은 국민들이 목소리가 커져야 하지만, 국민들도
자기들 앞가림하느라 정치에 점점 관심들이 적어지고 있는 실정이란다. 과연 이 민주주의는 어떻게 변해갈까. 아니면 어떻게 하면 잘못된 길에 들어선 민주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국민
무서운 줄 모르는 민주주의를 말이야
1.
작년쯤인가 말도 안 되는 책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등장했단다. 우리나라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이 쓴 노골적인 친일 서적이 베스트셀러에 등장하다니… 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바로 이영훈이라는 사람이 공저인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란다. 그런데 이런 무리들이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아. 우리나라 보수언론이라고 하는 일부 언론들의 행태를 보면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는 것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일부 언론을 일본 우익의 말을 그대로 복사하고
있거든.
이 책에 대해 비판한 글이 이번 녹색평론에 실렸단다. 녹색평론이 <반일 종족주의>의 일부 내용이 나와 어쩔 수 없이 읽었는데, 정말이지 똥 밟은 기분이 들었단다. 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이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서, 어느날 화를 막내고 싶을 때나 읽으면 적당한 책이 아닐까 싶구나. <반일 종족주의>란 책을 쓴 지은이들은 결국 일본 극우세력이
한 이야기들을 번역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들이 그렇게 좋으면 일본에 이민 가서
살지… 우리 국민들을 물들이려고 노력하지 말고 말이야. 일본과
우리나라의 극우 세력들은 병든 자들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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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중증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은 과연 어느 쪽인가. ‘만세일계’의 ‘현인신’을 ‘천황’의 이름으로 받들어 모시는 ‘신도’를
사실상의 국교로 삼고 그 신자들이 구성하는 ‘일본회의’라는
초우익 단체가 사실상 지배하는 ‘신국(神國)’, ‘신주(神洲)’라는
일본의 주술적 모모타로 후예 우익세력, 그리고 그들과 공명하는 이 땅의 우익이 의기투합해 ‘도깨비’ 사냥에 나서는 것, 그리하여
좋았던 그 시절을 탈환하자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야만적 종족주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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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녹색평론에서는 2020 도쿄올림픽은 방사능 올림픽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단다. 지난 호(170호)를
읽고 너희들에게 쓴 독서편지에서 아빠가 코로나19때문에 올림픽이 취소될 수도 있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올림픽이 결국 연기가 되었구나. 내년에 열린다고 하는데, 도쿄올림픽은 방사능 때문에 내년에도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이번 171호에서는 올림픽과 자본주의가 결탁된 이야기가 나온단다. 올림픽 정신은 이미 자본주의에 물들어 잔뜩 오염되어 있단다. 그래서
올림픽을 없애자고 하는 이들도 있어. 올림픽은 선수들을 위한 곳이 아닌 IOC 위원들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 있었단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행사는 결국 더러운 돈에 오염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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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하지만 IOC 위원들을 보라. 그들에게는
900달러라는 수당이 매일 지급되고, 5성급 호텔에서의 숙박과 같은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3주 동안이면 2만 달러나 된다.
선수들이 인생을 걸고 획득한 메달 이상의 금액이 주어진다. 선수들이 어떻게 취급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시합을 보면서 코를 고는 자들이 생애를 걸고 단련한 선수들을 제쳐 놓고 900달러라는 일당을 받는다. 이러한 정보가 널리 알려진다면 선수들이
단결하여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역전극이 벌어진다. 올림픽이
변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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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동엽이라는 시인은 이름만 아는 시인이란다.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앞서 활동했던 시인일 것이라는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어. 그의 대표시인 <껍데기는
가라>도 제목만 들어봤어. 그저 유명 연예인과 이름이
같다는 생각만 있었지. 이번 녹색평론에 한 꼭지를 들어 신동엽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그는 1930년에 태어나시고
1969년에 돌아가셨단다. 무척 짧은 삶을 사셨구나. 이
책에 보니 김수영 시인과 비교를 많이들 했다고 하더구나. 김수영 시인은 1921년에 태어나시고 1968년에 돌아가셨으니 두 분 또한 시대에
저항한 공통점 이외에 단명한 공통점도 있구나. 그래서 더운 안타깝구나.
이 책을 통해 잠깐 알게 된 신동엽 시인은 저항시인이자 생태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독재
시대를 살던 여러 사람들이 시대를 저항하는 것은 행동하는 지식인들의 양심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 당시 생태를 이야기하는 지식인은 많지 않았대. 그 중에 신동엽 시인이 있었고 말이야. 이 책을 통해 짧게 신동엽 시인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나중에 그의
작품도 읽어보고 신동엽 시인에 대한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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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봄, 여름, 가을이 있고 유년 장년 노년이 있듯이 인종에게도 태허(太虛) 다음 봄의 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여름의 무성이 있었을 것이고, 가을의 귀의가 있을 것이다. – 신동엽, <시인 정신론>
마치 가을 들판의 농부들처럼
저녁 빛 속에서 다시 갈 길을 찾자 하고 외치는 것 같다. 바로 여기에서 질문되어야 할 것이 그가 농경적
상상력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는 현대문명이 야기한 ‘존재의 망각’ 현상의 원인을 농경문화의 종결이 가져다주는 대치 체험의
상실로 본다. 그로 인해 발생한 가장 뼈아픈 결손은 영성의 소멸일 것이다. 인간이 농업을 붙들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대지와의 연대감이 살아 있었다.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교통이 불편하고 네트워크가 열악한 시골에서
사는 것을 현대인들은 고립된 존재로 생각하기 쉬우나 농부는 안 안에 앉아서도 기러기가 나는 것을 알고, 외양간의
가축들과도 우정을 나누며, 들판의 곡식과 대화도 한다. 그
외딴곳 한 모퉁이에 서서 다음 날 펼쳐질 날씨를 귀신같이 아는 것을 영성적 소통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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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녹색평론이 최근에 연재하는 것 중에 <내 인생의 책>
코너가 있단다. 이번 호에서는 정원정님이라는 수필가의 글을 실었단다. 1929년생이니시까 90세가 넘으신 분이야. 얼마 남지 않은 분께서 자신의 삶에서 책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야기해주셨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 보았단다. 아빠도 나중에 삶을 마감할 때 삶을 뒤돌아보면 어떤 책들이
기억에 남을까. 정원정님께서는 거실에 많이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하는구나. 자신이 저 세상으로 가면 저 책들은 어떻게 할까. 문득 우리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도 보았단다. 아빠도 벌써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아빠의
책 욕심에 잔뜩 사들이고, 또 책에 대한 집착으로 버리지 못하고…. 그래서
쌓여 있는 책들… 나중에 생각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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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이제는 나의 거실 한쪽
벽면의 책장에도 적지 않은 책이 무질서하게 꽂혀 있다. 어느 날 잠깐 책으로 눈이 갔다. 느닷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읽다 만 책, 읽었던 책, 미처 못 읽고 놓아둔 책, 저들을 어찌할거나? 저 아까운 책들을 놓고 저세상으로 가게 되면… 저 속에 알천이 담겨 있는데, 미처 못 읽은 책, 언젠가는 꼭 읽고 싶었는데, 순간 애간장을 저미는 듯 가슴에 뜨거운
김이 훑고 지나갔다.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내게는
귀중본 같은 소유물인데. 여러 차례 폐기하고 알짜배기만 남았는데… 얼추
호명해보니 리영희, 법정, 권정생, 장준하, 한하운, 최명희, 조정래, 이청준, 이문구, 김종필, 빅터 프랭클, 헨리
데이비드 소로, 프리모 레비, 헬렌 니어링,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정갈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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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그런 분은 그렇다 쳐도
나야 문학의 우아한 멋도 깊이도 배워본 것 없지만, 책을 버리면서는 얼른 버리지 못하고 현관 밖에 일단
내놓고서 며칠을 지나는 사이 미련스럽게 다시 매만져보게 된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아까운 생각에
골라서 몇 권을 다시 들여놓는 버릇이 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책은
그런 것이었다. 책 속에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세계가 있다. 희망과
위안으로 나를 여물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책에서 생각을 키웠고, 가보지
못한 아름다운 저 너머 세계를 느껴보는 것도 책에서였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책 속세는 향기를 품은 어머니의 살 내음 같은 것이 있다. 젊은
날 허둥댈 때 그 내음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잠재워보았다.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소곤거림도 책에서
수시로 들었다. 이 세상을 떠난 먼 나라로 갈 때 권정생의 책 한 권 품속에 안고 갈 수는 없을까. 죽음 뒤의 삶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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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이야기했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온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단다. 아빠의 바램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이야. 코로나19로 인해 온 세상은 멈춰 버렸어.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좀 잠잠해졌지만, 지구 전체로 봤을 때는 언제
이것이 끝날지 보이질 않는구나. 이 정체 모를 바이러스의 천적이 빨리 나타나서, 다시 예전의 일상을 되찾았으면 좋겠구나. 너희들도 신나게 학교에도
가고 말이야. 다음 녹색평론 172호를 읽고 독서편지를 쓸
때는 마스크를 벗고 극장 같은 곳도 마음대로 갈 수 있기를…
PS:
책의 첫 문장 : 서구적인 민주주의란 것에 대해서 나는 좀 회의적이야.
책의 끝 문장 : 그것은 바로 인간은 물론이고 자연까지도 도덕의 대상으로 포함시키는 ‘지구
도덕’을 실천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 문화 풍토에서는 매우 낯선 개념, 즉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샌더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이변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최근 민주당 예비경선에서 샌더스가 우위를 점하고는 있지만, 전 대통령 오바마와 클린턴 부부를 포함한 민주당 주류파와 <뉴욕타임즈>를 위시한 ‘진보파’ 언론들의 샌더스의 대한 거부감은 갈수록 노골적으로 되고 있다.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이 무엇이건, 그들이 샌더스를 반대하는 이유는 극히 단순하다. 즉, 민주, 공화 양당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엘리트로서 온갖 특권을 누려온 그들은 사상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사회주의자’ 샌더스와는 결코 동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선거제도하에서 샌더스와 같은 혁신적인 비전을 가진 급진파가 정치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거의 모든 나라의 엄중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 P7
‘중세’에 들어와 아랍인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만들고 세력을 규합한 뒤 가장 먼저 공략에 나선 상대가 이란이었다. 보통 이란을 아랍국으로 착각하지만 아랍과 이란은 뿌리도 언어도 다르다. 비슷한 점이라면 같은 이슬람을 믿는다는 점,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 정도다. 이란은 이란이고 아랍은 아랍이다. 실제 아랍국들은 이란을 경외 혹은 백안시한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 미국은 물론이고 사우디 같은 아랍국들도 모두 아랍 형제 이라크를 지원했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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