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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장기려
이기환 엮고 지음 / 한걸음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읽은 책은 장기려라는 훌륭한 분에 대한 이야기란다. 아빠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장기려라는
분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 예전에 TV 프로그램에서 아빠가
좋아하는 유시민님께서 장기려라는 훌륭한 의사를 소개해주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본 적이 있었어. 그 TV 프로그램은 실제로는 보지 못했고, 기사만 봤어.. 유시민님이 훌륭한 분이라고 소개를 했다면, 정말 훌륭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 분에 대해 한번 책이 있으면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읽게 된 책이 바로 <성산 장기려>라는 책이란다. 오래된 책이더구나. 그리고 어린이용으로도 장기려 선생님에 대한 책이 있어서 구입했는데, 너희들은
아직 읽지 않았지?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1.
장기려 선생님은 음력 1911년 7월 15일 평안북도 용천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단다. 할머니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어. 그리고 평생 기독교 신자로 사셨어. 장기려 선생님도 10대였던 고보 시절 방황하기도 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경성의전에 합격을 했다고 하는구나. 경성의전이라고
하면 오늘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란다. 장기려 선생님은 졸업 후 외과를 선택했고, 공부 때문에 늦어진 결혼도 하게 되었어.
장기려 선생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스승님은 백인재 교수님이라고 하는구나. 장기려 선생님이
여러 일화를 들려주면서, 소설가로 유명한 춘원 이광수를 치료한 이야기야. 춘원 이광수는 장기려 선생님이 환자를 다루는 것을 보고, 그는 성자
아니면 바보라고 했다는구나. 이미 장기려 선생님은 젊은 시절부터 의사 본연에만 충실했지, 의사로 돈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던 거야. 이광수는 장기려 선생님을
모델로 한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정작 장기려 선생님은 본인이 아니라고 했다는구나. 겸손함의 이유일 수도 있지만, 친일파로 변절한 이광수와 엮이는 것이
꺼림칙한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
장기려 선생님은 박사 취득을 하고 평양 기홀 병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어. 고향에서도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병원장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다른 의사들과
갈등이 많았대. 단지 장기려 선생님이 세브란스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이야. 평양 기홀 병원은 대부분 세브란스 출신인데, 경성의전 출신인 장기려
선생님이 와서 병원장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두 달 만에 그만 두고 외과 과장을 맡으면 진료에 전념하셨대. 그리고 194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설상절제 수술에 성공을 했다는
구나.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 아주 어려운 수술이었대. 아직 광복이 되기 전이니 그가 그 어려운 시절 이런 의료기술을 터득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했던 것이겠니.
2.
일제 시대이다 보니 이유도 없이 투옥되는 일이 있었는데, 장기려 선생님도 짧은 기간이지만 투옥되기도
했대. 그 투옥 기간에 몸이 안 좋아져서 묘향산에서 요양을 하기도 했대. 요양을 하다가 우리나라 해방 소식을 듣게 되었어. 자신도 해방 조국에서
무엇인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겠다고 생각했어. 그런 중에 조만식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동참해
달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어. 하지만, 조만식이 1946년 숙청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지.
장기려 선생님은 당시 흔치 않은 의학 박사였기 때문에, 여기저기 제안이 왔단다. 김일성 의대로부터 초빙을 받아 외과의로 일하게 되었어. 하지만 공산주의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점에 불편해 하셨어. 시간이 지나고 비극적인 한국전쟁이 일어났단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우리나라는 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에 놓였어. 국군의
평양 점령으로 장기려 선생님은 국군 병원에서 일했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그쪽에 더 낫다고 생각했어.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이어지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장기려 선생님의 식구들은 피난을 가기로 했단다. 중공군 공격이 평양까지 밀어닥쳤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병원에 있던 장기려 선생님은 첫째 아들 가용과 함께 집으로
향했어. 하지만, 이미 집은 모두 떠나고 늙으신 부모님만
계셨단다. 부모님들은 집을 지키겠다고 했어. 장기려 선생님도
이 피난길이 길어야 두어 달이라고 생각했어. 그런 마음으로 피난길에 올랐단다.
국군이 장기려 선생님을 배려하여 트럭으로 이동할 수 있었는데, 첫째 아들 가용과 함께 트럭을
타고 피난길을 떠났어. 장기려 선생님은 몹시 불편해 하셨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걸어가는데, 자신만 차를 타고 말이야. 그렇게
차를 타고 가다가 아내와 아이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어. 그 자리에서 차를 세울 없었어. 자신의 식구들만 차에 태우는 것은 그의 성격상 할 수 없는 일뿐만 아니라. 그리고
차를 세우면 많은 피난민들이 차에 타려고 해서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어. 그리고 이 피난길이 길어야
두어 달이라고 생각했고,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때 그렇게 헤어진 식구들은 결국 삶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정말
슬프구나. 전쟁이 이렇게 나쁜 것이란다. 그런데 말이야. 사실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대. 북에 남은 장기려 선생님의 남은
아이들 다섯 명 모두가 나중에 커서 의료에 관련된 일들을 하셨어. 그래서 북한을 대표로 해서 외국에
나가도 했어.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만나게 되어 서로 남북에서 살고 있는 식구들의 소식을 알게 되었대. 어렵게 편지도 주고 받았고, 사진도 주고 받을 수 있었어. 그리고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이 되면서,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가
있었고, 장기려 선생님도 제안이 왔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장기려 선생님은 자신만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어. 그리고 며칠 만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시면서, 북쪽이나 남쪽에서 가족들과 계속 살게 해주면 만나겠다고 하셨대. 그리고 장기려 선생님은 조만간 통일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하셨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통일이 되면 만날 생각을 하셨대. 그렇게 결국 북에 있는 식구들과는 영영 만나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건너건너 얻은 늙은 아내의 사진을 평생 간직했다고 하는구나. 사연
하나하나가 구구절절 눈물을 핑 돌게 하는구나.
3.
다시 그 피난길 이야기를 해볼게. 장기려 선생님은 장남 가용만 데리고 부산까지 왔단다. 북에서 왔으니 공산주의자로 의심을 받기도 했어. 심지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는구나. 감옥에서 나와서는 천막을 치고 병원 일을 시작하셨어. 미국
유학생 전영창이라는 분께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와서 도와주었고, 장기려 선생님의 후배이신 전종휘라는
분께서 도와주어 병원을 운영했단다. 병원 이름은 복음 병원이라고 했어.
그들은 의료비를 받지 않고 UN의 지원을 받아 운영을 했어. 전쟁통에 지원이 얼마나 되겠니, 늘 돈이 쪼달렸단다. 월급도 의사나 병원장이라고 많이 받지 않고 가족수대로 월급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병원을 운영을 했어. 이제 지원금도 끊기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의료비를
받기 시작했대.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어. 의료비가
없다고 치료를 안 할 수도 없고, 치료를 해도 낼 돈도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지 않았지. 병원에서는 병원 운영을 해야 하니, 최소한의 돈을 받아야 한다고
했어. 그럼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어. 그런 사람들에게
돈을 주거나 몰래 도망가라고 이야기했다는구나. 그리곤 밤에 아무도 모르게 환자를 도망가게 도와주었다고
하는구나. 병원 운영에 늘 돈이 부족했는데, 다행히 그들을
도와주겠다는 대기업들이 나타나면서 근근이 운영할 수 있게 되었어. 이렇듯 그에 대한 미담은 끊임이 없었단다. 부산의 의료 발전을 위해 노력도 했는데, 그의 노력으로 부산대학교에
외과를 창설하기도 했어.
…
1960년대에는 의료보험이 없었는데, 장기려 선생님은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인 청십자 의료보험을 창설하였고, 이
청십자 의료보험은 나중에 국민건강보험의 토대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장기려 선생님의 희생과 봉사 정신은
나라밖까지 알려져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을 하셨어.
…
장기려 선생님은 평생 의사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사셨고, 기독교의 깊은 신앙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고 이 세상을 뜰 때 가진 것 하나 없이 그가 믿는 하느님 곁으로 돌아가신
것 같구나. 비록 이승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헤어진 아내와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계시면 좋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 나른한 오후였다.
책의 끝 문장 : 이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