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저는 <삼국유사>에도
그리스 신화, 로마 신화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정말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우리가 시험을 위한 공부로 <삼국유사>를 접했기 때문에 몰랐을 뿐이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를 비교하며 차이점을 표로 그리면서 외우느라 정작 그 이야기에는 소홀했던
겁니다. 기전체의 관찬 사서, 기사본말체의 사찬 사서 등
형식적인 내용을 공부하느라 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놓친 것이죠.
(39-40)
역사는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는 공부입니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의 긴
시간 안에 엄청나게 많은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어요. 그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절로 가슴이 뜁니다. 가슴 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고민과 선택과 행동에 깊이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좀 더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고민, 역사의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아무리 힘든 세상에서도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법을 배우게 될 테죠. 그게 바로 역사의 힘입니다.
(71)
그가 조정에서 물러난 뒤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추측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요.
자신의 생가에 걸어 놓은 현판이죠.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쓰인 현판인데, 얼핏 들으면 ‘이제 좀 여유를 갖고 편하게 살겠다는 뜻인가?”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실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글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이 글귀는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경계하라는 의미예요.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데 무엇 하나라도 트집을 잡아보려는 무리가
눈에 불을 켜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방을 경계하고 신중하게 하루를 보내라는 의미로 그런 글자를
써둔 거예요. 정약용은 매일 현판을 쳐다보면서 ‘오늘 하루도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해야지’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79)
마지막으로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당부했던 말을 전하며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104)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을 배우죠. 역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의 흥망성쇠를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끔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천하를 호령하던
인물이 쓸쓸하고 비참하게 죽는가 하면, 사방으로 위세를 떨치던 대제국이 한순간에 지도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하니까요. 역사에서 이런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합니다.
(164-5)
누군가와 처음 만나서 이야깃거리가 없을 때 역사를 화제에 올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처음 관계를 맺을 때 상대와
나 사이에 연결 고리를 찾으려고 많이 노력하잖아요. 그래서 출신 학교를 묻고, 지역을 묻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역사적 사실로 다가가는 게 훨씬 더 그럴듯해 보이지 않겠어요? 역사는 꽤 유용한 소통의 도구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서 상대와
나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된다면 역사에서 답을 찾아보세요. 분명 같은 경험이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연결 고리가 있을 겁니다.
(207-8)
박상진이 판사를 꿈꾼 사람이라면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예요. 판사라는
꿈을 드디어 이룬 셈인데 그걸 내던지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하지만 박상진의 꿈은 판사가 아니었어요.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늘 다하고만
사는 평범한 이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판사가 된 것입니다. 이게 그의 꿈이었어요.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판사라는 직업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진짜 꿈이었으니까요. 그 꿈을 향해 나아간 것뿐입니다.
(235)
이원익은 스물두 살에 과거에 급제해서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네 임금 밑에서 무려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던
인물입니다. 한 번 되기도 힘든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했다니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을까 싶지요? 그런데 그는 오두막에서 일반 백성들과 다름없이 살았습니다. 영의정은커녕
양반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난했어요.
(258)
역사를 공부하면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맥락이 잡힙니다. 역사에서
인간의 자유는 늘 이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역사의 수레바퀴예요. 역사를 통해 우리는 사회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문제란 별로 없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화의 움직임도 알고 보면 역사에서
그 문제의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좀 더 폭넓게 사회 문제를 이해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순간, 문제의 핵심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원동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또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292)
이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것입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나아졌듯이 미래는 더 밝을 거라고, ‘나’보다 ‘우리’의 힘을 믿으며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면 된다고. 역사를 통해 혼란 속에서도 세상과 사람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다시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건 역사지만 결국은 사람을, 인생을 공부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