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내가 말하려는 하는 것은, 구례가 비록 우리 현대사에서는, 피아골 공비의 이미지와 겹치는 불운한 벽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고, 당대사를 다룬 걸작 역사서가 탄생할
만큼의 정보가 오가는 물류의 교차로였다는 것이다. 무지한 미군놈들이 함부로 총구를 들이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고을 한 고을마다 축적된 문명의 심도는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아메리카의 산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문명, 문화의 서기가, 풀 한 포기에도 자욱하다. 정유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고도 칠천량해전의 참상을 연민하며 백의종군 하겠다고 쓸쓸한 심사를 달래며 거쳐간 곳이 구례이며(구례에
지금도 백의종군로가 남아있다. 구례군민들의 지극한 간호와 위로로 이순신은 고문의 여독을 좀 풀 수 있었다), 해방 후 지방 건준조직이 최초로 결성된 곳도 구례다.
(60)
우리가 중국의 속국인 듯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쿠데타사건 이후로 과도하게 조선왕조를
스스로 비하시키고, 제후국으로서의 모든 프로토콜을 엄수하게 된 이후의 사태이다. 조선왕조의 성립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성계는
고려제국에서 본다면 아웃사이더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군사쿠데타는 정통성이나 정당성을 확보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정도전이나 조준 같은 개국공신들의 인식체계를 통하여 고려말 사회를 “필망(必亡)”의 혼란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치를 잘 도와 새로운 세상을 도모했더라면, 친명이 그토록 비굴한 사대나
이념적 굴종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정권 이씨조선은 개국초기의 혼란상이나 정통성 부재의
현실, 그 모든 것을 철저히 명에 대한 굴종적 아이덴티티를 통하여 극복하려 했다.
(69)
1236년에 시작하여 1251년까지, 그러니까 16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 기적 같은 대장경사업을 단지
몽골의 변화를 불심으로 극복하겠다는 종교적 신념의 한 금자탑으로 보는 터무니없는 오류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생각해보라! 6.25전쟁 때 북쪽에서 엄청난 탱크군단이 밀려오는데 그것을 대장경판각으로 물리친다! 도대체 이게 상식적으로 될 성부른 말인가? 제3차의 대장경조조는 제1차와 제2차의
대장경조조와의 연속선상에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몽골별의 화환(禍患)은 세계적인 대문화사업의 계기를 마련한 것일 뿐, 표면적 레토릭이
어떠한 상징적 수법을 쓰고 있든지간에 그것은 고려라는 대제국의 역량이 문화적 사업과 전쟁사업을 분리시켜 진행시킬 수 있을 만큼의 거대한 포텐셜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택도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16년간의
제3차 고려대장경의 조조는 그 자체로써 전쟁대비사업보다도 더 막대한 재력과 인력을 소모해야만 하는 것이다.
(74)
나는 개인적으로 정도전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 직계 장손과도 친하게
지냈고, 그에 관해 책도 썼고, 강연도 많이 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처럼 자격 있는 혁명가를 찾기도 힘들다.
그는 맑스나 레닌과 같은 진짜 혁명가이다. 이론과 실제를 다 갖춘, 혁명을 위하여 자기의 삶을 불사른 멋진 사나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전체대의를 위해 생각을 해볼 때, 그가 저지른 오류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오류는 고려대제국의 실태와 그 가치를 근원적으로 훼멸시킨 것에 관한 것이다. <고려국사>는 용서할 수 없는, 왜곡의 사서이다. 그것이 정도전 개인의 오류로 끝났으면 다행이겠지만, 향후 조선민족의
역사 인식 전체에 너무도 끔찍한 악영향을 미쳤다.
(90)
“원 지사에 대한 제주도민의 사랑은 무척 깊습니다. 그렇다면 그 깊은 만큼 원 지사는 깊이 제주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진정 제주도 사람이 무엇인지, 그 아이덴티티에 대한 깊은 감각이 없습니다. 제주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가치있게 사는 것인가에 관한 심오한 반추가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중앙정계로의 진출뿐이고, 그 관심을 집중하기 위하여
제주도를 천박한 개발모델의 전위로 만드는 것이죠. 그는 제주도민의 깊은 기대와 사랑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위대한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꼭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사로서
정말 제주도를 위대하게 만들 때만이 혹 결과적으로 대선의 기회도 올 수 있는 것이지, 대통령 되기 위해
산다는 놈 치고 제대로 된 놈 있습니까? 제주사랑이 무엇인지, 제주역사가
무엇인지, 제주비젼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 문명이 있으면
반문명도 있어야 하고, 유위(有爲)가 있으면 무위(無爲)도
있어야 한다는 것, 선생님의 책을 젊은 날에 읽었다고 한다면, 선생님께서
그런 것 좀 원희룡에게 가르쳐 주세요. 조금만 정신 차리면 훌륭한 인물이 될 텐데 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아요. 제주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대치할 만한 스타도 없고 참 딱하게 생각하고 있지요.”
애정 어린 깊이 있는 제주도사람 양 교수의 크리티칼 멘트였다.
(103)
여순민중항쟁이야말로 세계사를 선도한 조선민중의 정의감의 발로였으며, 여순민중항쟁을
빌미로 6.25동란을 위시한 향후의 모든 세계사적 비극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났고, 우익반공파시즘의 가치체계가 설칠 수 있었는가 하며, 또 반면 우리
민중의 심오한 내성의 양심 속에서 인류사에 새로운 희망을 던질 수 있는 민주의 촛불이 켜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어마어마한 세계사적 사건을 해방 정북의 복잡하고 중층적인 인식체계로부터 접근해야만 합니다. 나는 이 접근을 시도하기 전에 여러분과 함께 다음과 진실을 외쳐야만 하겠습니다. 여순은 민중항쟁이다!
(132)
우리는 ‘해방’이라는 원점의
성격으로부터 다시 문제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해방을 맞이하는 건준이라고 하는 슬기로운 주체세력이 있었고
그것은 전국의 인민위원회 조식의 구심점이 되었지만, 해방을 가능케 한 물리적 주동세력은 미국과 소련이라고
하는, 세계사의 무대를 분할하는 양대 신흥세력이었다는 것은 이미 갈파한 바와 같아. 해방의 주체가 우리민족이 아닌, 미국과 소련이었다고 한다면 이 해방정국
공백의 새로운 모델링의 결말은 이미 명약관화하다. 그것은 미국에 붙어 미국말을 잘 듣는 놈이 이남을
먹을 것이요, 소련에 붙어 소련말을 잘 듣는 놈이 이북을 먹을 것이다.
이 두 놈은 모두 토착세력이 아닐 것이고 소련과 미국에서 자기세력을 키웠거나, 소련과 미국의
지도자들에 특별한 총애를 받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141)
동아시아역사에 대하여 맥아더가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인류사의 근원적
진보에 공헌할 수 있는 결정적 찬스를 놓친 죄악에 가까운 오류는 전후에 일본의 천황제를 존속시킨 것이다.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것이 미국의 일본지배를 쉽게 만들고, 동아시아에 있어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히로히토는 1945년 9월 27일 맥아더의 SCAP 헤드쿼터를
두 발로 찾아가 목숨을 구걸했다. 그리고 미국의 이해관계에 전적으로 부속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것은 미국이 나치정권의 독일국가를 근원적으로 해체시킨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의 전후처리였다. 일본국가가 근원적 변화가 없이 존속하도록 하면서 몇 명의 전범만 코스메틱한 효과로 처형한 것이다.
(173)
여러분들은 해방정국에서 “좆됐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나의 말을 기억할 것이다. 이들은 좆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8월 15일부터 움츠러들었고 소리 없이 지냈다. 그런데 움츠러든 사람들은 누에의 굴신작용처럼 반드시 펼 날을 기약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촛불혁명 때문에 움츠러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좆됐다파들은
대체로 가문이 좋고 지체가 높고 지식이 많았고, 영어를 잘했고 서구유학파들이고 기독교도들이 많았다. 이들은 건준에 가담하지 않았고 “건준+인민위원회” 세상의 형국을 불쾌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희소식이 날아왔다. 와! 미군이 온다! 드디어 미국이 입성한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야! 이제 움츠리고만 있을 수 없다. 기지개를 펴자! 이들은 본시 서양파들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입성, 미국이 조선의 최대의
권좌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죽어가는 물고기에게 물을 부어 연못을 만들어주는 것과 똑같았다.
(232-3)
4*3은 결코 “무장봉기”가 아니다. 억눌린 민중이 소총 몇 자루 가지고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을
민중항쟁의 핵심적 사태로 인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중항쟁의 가냘픈 호소일
뿐이다. 그들을 결코 “무장대”라고 불러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무장대”가 되려면 무력을 계속해서 공급받을 수 있는 루트가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나, 월맹의 호치민과 같이 지속적으로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4*3사태 이후의 토벌이라는 것은 “무장 대 무장”의 전쟁이 아니라, 그냥
정부병력의 민간학살일 뿐이다. 4*3의 의미를 침소봉대할 수 없다. 산으로
피신 간 사람들은 무장투쟁을 위해 간 것이 아니라, 단지 학살을 피하기 위한 도피였을 뿐이다.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 또한 사가들이 오해하는 거대한
오류 중의 하나가 “무장대의 무장봉기”를 “남로당”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239-40)
박진경의 도민학살을 견디다 못해 그의 암살을 기획한 것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였다. 그리고 그 거사에 동조한 양회천 이등상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배경용 하사, 이정우
하사(입산 미체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의 이름도 같이 기억되어야 한다. 문상길 중위는 충청도
사람으로 육사 3시다. 제3중대장이었으며
독실한 기독교이었다. 그의 최후진술은 다음과 같다.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인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사람들로써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해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 때문에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후 모든 사람들도 저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적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적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294)
이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이야말로 1946년 전국적인 10월봉기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제주 4*3과 여순민중항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남로당의 정치적 공작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남로당은
그러한 대중동원조직체계나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몇몇 지식인들이나 지식인 반열에 들고 싶어하는
허영끼 있는 인간들의 픽션에 불과했다. 민중에게 절실한 것은 오직 “쌀’이지 공산이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