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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평전 ㅣ 역사 인물 찾기 20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은 그리 많지 않단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이 많아. 그런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조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그의 업적을 인정해주는 사람들도 계시단다. 고맙게도 말이지… 그런데, 공산주의 깃발을 들고 있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로 인해 공산주의에 발을 조금이라도 들여놓았던 이들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단다. 이번에 읽은 김산이라는
독립운동가도 그런 축에 들었던 사람이야.
김산이라는 독립운동가는 어쩌면 헬렌
포스터 스노가 아니었다면 더욱 알려지지 않았을 거야. 헬렌 포스터 스노가 그와 인터뷰를 하고, 그에 관한 책을 출간해서 그의 존재가 잊혀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거니까 말이야. 헬렌 포스터 스노가 님 웨일즈라는 필명으로 남긴 <아리랑>. 아빠도 예전이 이 책을 읽어보았단다. 그 책 하나만으로도
매력적인 남자 김산에 대해 알 수 있지만, 그에 관한 책을 이번에 한 번 더 읽었단다. 아빠가 김산이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꼈던 이유도 있지만, 지은이가
이원규라는 분인 것도 한 몫 했단다.
이원규님의 책들을 몇 권 읽었는데, 다 재미있게 읽었거든. 소설도 쓰시고,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평전도 쓰시는 분인데, 평전을 마치 소설처럼
쓰신단다. 지은이의 상상력도 가미된 평전. 그래서 더욱 읽기도
편하고, 재미도 있었거든. 이번에 읽은 <김산 평전>도 그런 방식으로 쓰셨어. 제목에 평전을 달아 놓았지만, 김산의 삶에 대한 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해. 심지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김산과 인연을 맺은 어떤 여인에 대해서는 가상의 이름으로 정해서
이야기를 풀어갔단다. 누군가는 평전에 작가의 상상력을 추가하면 어쩌냐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아빠는 좋았단다.
….
1.
김산은 본명이 아니야. 김산은 그의 여러 가명 중에 하나였단다. 그의 호적에는 장지학이라는
이름이 올라가 있어서 그게 본명일 것 같지만, 그는 삶의 대부분은 장지락이라는 이름을 썼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김산의 본명을 장지락으로 알고 있단다. 김산, 장지락 모두 이름이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 책에는 그를 부를
때 장지락으로 주로 이야기해서 아빠도 너희들에게 이야기할 때 김산보다는 장지락으로 이야기할게.
…
장지락은 1905년. 을사늑약이라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해에 평안도 용천이라는
곳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단다. 어린 시절부터 수재라는 소리를 들었대.
(머리 좋은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큰형과는 사이가 좋지 않고, 둘째 형과 사이가 좋았대. 구둣방으로 성공한 둘째 형의 든든한 후원으로
숭실 중학에 입학할 수도 있었고, 3.1운동 후에는 둘째 형의 도움으로 도쿄로 유학을 가기도 했단다. 3.1운동이 1919년에 일어났으니, 당시 장지락의 나이 고작 15살이었는데, 홀로 일본 유학을 가다니…
더 놀라운 것은 도쿄에서 모스크바 러시아
혁명에 대해 알게 되고, 모스크바행을 결심했다는 거야. 그래서
계획보다 일찍 일본 유학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몰래 모스크바로 향했단다. 그의 나의 아직 십대이던
시절이야. 그런데 그의 계획대로 편안하게 모스크바를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그는 하얼빈에서 길이 막혔어. 하얼빈.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겼했던 곳. 어쩌면 그곳에서 장지락은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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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장지락은 그곳을 떠나
하얼빈 역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격살한 자리에 서 있었다. 러시아군 의장대원들 틈으로 의연히 걸어 들어가, 막 기차에서 내리는
조국 침략의 원흉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안중근. 그는 그 순간의 광경을 상상하다가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유치장에서 숭실학교 고급 학년 선배들이 속삭인 말들이 고스란히 되살아왔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서간도에 있다는 신흥무관학교로 가자. 가서 일본과 싸울 방책을 배우자. 일단 그렇게 마음을 굳히자 그것은
오랫동안 염원해온 것처럼 강렬해졌다. 그는 그 학교가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는 1백50원쯤 남은
일본 돈을 중국 돈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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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얼빈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있는 서간도
통화현까지의 700여리 길… 얼어 죽을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가는 길에 삼현보의 안동식 장로의 도움을 받았어. 안동식 장로의
집에서 머물면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어. 그곳에서 안동식
장로의 딸 미삼과 정이 들기도 했단다. 신흥무관학교에 도착한 장지락.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나이는 18살. 장지락은 15살. 하지만 700여리
길을 홀로 걸어온 그의 의지를 들은 학교측은 그의 입학을 허락하였고, 그는 과정을 잘 마쳐서 최연소
졸업이라는 기록을 세웠단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안동식
장로의 교회에서 선생님을 잠시 하고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요원들과 인연을 맺었단다. 안창호와 만나 흥사단에
가입을 했어. 그리고 약산 김원봉과도 만나 의열단 비밀 요원이 되었어.
이때 평생의 동지가 되는 오성륜 등을 만났단다.
2.
잠시 고향에 돌아왔다가 둘째 형의 조언을
듣고 북경에 있는 협화의학원에 입학했단다. 그의 나이 18세였어. 장지락은 북경 협화의학원에서 의학을 공부했단다. 그것에서 김성숙을
만나면서 공산주의도 접했단다. 민족주의 기반을 둔 공산주의자라고나 할까. 북경에서 김성숙과 공산주의 활동을 했어. 조산공산당 북경 지부를
설립하기도 했단다.
..
김성숙이 광동으로 먼저 떠나고 장지락도
학업을 중단하고 광동으로 떠났단다. 그곳에서 국민당의 정부의 배려로 국립광동대학 의학과 본과로 다시
편입했어. 그러나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 장지락에게
계획이 있잖아. 독립. 독립을 위해서라면 그가 모든 것을
했어. 어떤 이는 사상이 맞지 않으면 함께 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장지락은 오직 조선 독립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사상도 그 어떤 분파도 가리지 않았고 누구든 만났단다.
놀라운 것은 그의 나이 아직 이십 대
초반이었어. 그는 의학을 포기하고 법학으로 전과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고, 중국 정부의 협조를 한 것도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던 거야. 중국의
국공합작이 장개석의 쿠데타로 끝난 이후에는 중국공산당의 봉기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상황이 좋지 않게
되었지. 광동을 떠나 해륙풍 소비에트에 도착하게 되었어. 그곳에서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죽음의 위기도 넘겼지만, 그만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단다. 상해로 돌아와서 말라리아 치료를 하면서 몸을 추스렸단다.
건강을 되찾고 나서는, 북경과 상해 등을 오가며 중국 공산당의 활동을 하다가 북경에서 공안에게 체포 당했고, 이후 일본 대사관에 인도되었고, 다시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되었단다. 그 곳에서 40여일 고문 취조를 당했는데, 그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는 폐결핵이 걸리고 건강이 악화되었어.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어. 고향에 와서 요양을 좀 하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어.
공산당에서는 그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가
무혐의로 풀려났다는 것을 들어 변절했을 것이라고 했어. 그런 모략을 한 이는 같은 동포 한위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위건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려고 할 때 비슷한 이유로 장지락이 거절 의사를 보인 적이
있는데 그가 똑같이 되갚음을 한 것이었어. 그때부터 한위건과 앙숙 관계가 이어졌는데, 한위건도 사실 일본의 프락치는 아니었다고 하는구나. 나중에는 병든
장지락에게 약을 몰래 전달해 주기도 했지만, 끝내 서로 오해를 풀지는 못했다고 했어. 한위건도 당시 일본경찰서에 풀려 나온 장지락을 의심하기는 했지만 후에 장지락을 평가할 때 나쁘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어. 한위건 역시 조선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안타깝게 삶을 마감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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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
그 뒤 만주에 중앙당
밀사로 파견되어 중국공산당과 조선인 공산당 조직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탁월한 공적을 세웠소. 만주에서
온 동지들은 말해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파르티잔 투쟁이 장지락의 공작 덕분이라고. 우리 조국의 역사가 어찌 될지 모르지만 그의 공로는 아마 굵은 글자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뛰어난 선동가이자
비밀조직의 명수이지만 명문대학을 다닌 공산주의 이론가이기도 해요. 정말 그는 그렇소. 많은 책을 읽은데다 일본에 한 해 동안 머물렀다는데 일본어도 능통해 사상서를 번역하기도 했소. 아무튼 그는 두 번이나 내 진정성을 의심하며 입당을 거부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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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 병과 폐결핵 등 잇단 중병을
겪어서 장지락의 건강은 그리 좋지 않았단다. 한위건의 모략으로 중국공산당에 복귀하지 못하고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어. 그러다가 또 공안국에 체포되어 또 일본 측에 넘겨지고 또 고국으로 압송되었다가
석방되어 고향집에 머무르기도 했단다. 다시 출국 금지령을 어기고 북경으로 향했단다.
3.
북경에 갔지만 이번에도 공산당으로부터
외면을 당했어. 그는 그곳에서 그 전부터 알고 지나면 동지 조아평과 결혼을 하고 가정교사와 번역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어. 얼마나 답답했겠니, 억울한 누명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는 상해로 가서 김성숙과 재회하게 된단다. 그것에서 김성숙과 함께 소금을 비유한 선언문을 쓰는데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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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우리는 더는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를 잃어버릴 처지가 못
된다. 우리는 쫓겨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세력에 가담하는 하나의 세력으로서 중국에 가세해야만 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장래의 행동을 위하여 조선인의 운동을 건설하고 준비하는
방향으로 재빨리 우리의 정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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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성숙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했어. 김성숙과 함께 중국 공산당이 움직임 따라 같이 이동했어. 그렇게
연안까지 오게 되었단다. 연안에 있는 항일군정대학에서 선생님으로 일했어. 이곳에서 그는 도서관에 책을 많이 빌려 보았는데, 책의 대출증마다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본 헬렌 포스터 스노와 인연을 맺게 된단다.
헬렌 포스터 스노는 장지락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장지락도 조선에 대해 서양에 알릴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응하게 되었단다. 2개월 간 22차례에 걸친 인터뷰..
헬렌 포스터 스노는 장지락과의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나중에 자신의 필명 님 웨일즈와 장지락의 필명 김산의 공동 저자로 책을 내게
된단다. 하지만, 장지락은 아쉽게 책이 출간된 것을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게 돼. 그것도 너무 억울하게 말이야. 중국
공산당이 트로츠키파를 제거하는 대숙청이 있었는데, 그 숙청의 여파로 장지락이 일본의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고 말았단다. 그의 나이 34세, 1938년의 일이었어. 그가 꿈에 그리던 조선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정말 슬프구나.
…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중국공산당은
그를 복권했고,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라는
훈장을 추서했다고 하는구나. 사람의 육신은 한 생으로 끝나더라도 영혼은 어딘가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래야 장지락의 영혼도 끝내 조국은 광복되었고,
자신의 억울함도 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 말이야.
…
PS:
책의 첫 문장: 을사년(1905년) 5월 12일, 음력으로는 3월 12일로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과 여름의 중간쯤 되는 날이었다.
책의 끝 문장: 당적이 박탈되고 1975년의 추도대회와 거기서 공산당의 이름으로
낭독된 조사(弔辭)까지 취소되었다.
지락은 씹고 있던 비둘기 고기를 얼른 삼켰다.
"권력이나 권위는 인간 사회에 필요 없는 거다, 그런 게 없어도 인간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상이지요. 다시 말하면 국가라는 이름을 걸고 자행하는 모든 전쟁, 모든 억압을 규탄하는 거지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려면 개인이 자아를 확립해야 하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금욕과 자기 억제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통치자는 민중을 법과 규율로 구속하고 그 질서 안에 가둬야 한다고 확신하지요. 그것에 반대해 아나키스트는 국가가 없고 법률이나 규율이 없어도 인간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여기지요." - P130
"그렇습니다. 희생의 철학은 제쳐놓고 톨스토이의 공산주의에 대해 말해보지요. <공산당선언>은 공산주의가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천한 인간들이 갖게 마련인 가진 자들에 대한 질투의 산물이 아니라 정의의 산물,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의 산물이라고 했지요. 혁명의 목적에는 독재가 필요하지만 공산주의 출발 자체가 인도주의에 있다는 것이지요." - P287
"그대가 아픈 상처를 안고 산다는 건 장소 동지한테서 들어서 알고 있어. 내가 그대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혁명을 위하여, 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야. 그대와 나는 오로지 당이 준 과업이나 혁명을 위해 만날 수 있어." - P360
호송경관이 말했다.
"나는 사나이가 자기 조국을 위해 일신을 던진다는 사실을 존중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보통의 죄수처럼 다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조선인이라면 당신처럼 투쟁할 자신이 없으니까요. 나는 대사관에서 담당 주임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은 의학 공부를 했으며, 시와 소설을 썼다고. 당신이 지은 시를 주면 영광으로 알고 받겠습니다. 그리고 중국 감옥에서 겪은 일도 이야기해주십시오." - P414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산, 그 산을 닮은 초가집의 지붕, 맑은 물에 씻은 듯 싱싱한 나무들, 반짝이는 조약돌이 깔린 냇가에서 흰 옷을 빨아 너는 여인들, 남자들의 여유와 여인들의 수줍음, 그런 게 좋았습니다. 조선은 그렇게 순수하고 자연스러운데 일본은 인공의 흔적이 많았지요. 조선이 조용한 나라라면 일본은 소리의 나라이지요. 토막토막 끊어지는 일본어, 게다짝 소리, 과장된 겸손으로 몇 번이나 허리를 굽히는 인사법, 모든 게 인공적이지요."
- 헬렌의 말 중에서.. - P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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