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읽다’라는 동사에는 명령형이
먹혀들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랑하다’라든가 ‘꿈꾸다’ 같은
동사처럼, ‘읽다’는 명령형으로 쓰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줄기차게 시도해볼 수는 있다. “사랑해라!” “꿈을 가져라!”라든가, “책
좀 읽어라, 제발!” “너,
이 자식, 책 읽으라고 했잖아!”라고.
“네 방에 들어가서 책 좀 읽어!”
효과는?
전혀 없다.
(22)
그런데 이제 어느샌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제 방에 틀어박혀, 읽지
않는 책을 마주하고 있다.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은 아이의 열망이 아이와 펼쳐진 책 사이에 희뿌연 막이
되어 행간이 흩뜨린다. 아이는 방문을 닫아건 채 문을 등지고 창 쪽을 향해 앉아 있다. 48페이지. 여기까지 읽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차마 헤아려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책 전체는 정확하게 466페이지다. 그러니까 거의 500페이지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500페이지! 대화라도 좀 섞여 있으면 좋으련만! 어림없는 소리다! 페이지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여백을 두고 좁쌀만
한 글자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새카맣게 행을 이루며 빼곡히 이어진다. 어쩌다 한번씩 가물에 콩 나듯 드문드문
대화가 섞일 뿐이다. 한 인물이 상대방에게 건네는 말을 가리키는 따옴표(“ ”)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라도 되는 양 반갑기 그지없다. 하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대꾸가 없다. 그러고는 다시 12페이지가
이어진다.
(24)
“보름이라고요? 400페이지(사실은 500페이지다)나
되는 책을 보름 만에 다 읽으라고요? 말도 안 돼요, 선생님!”
선생님에게 타협이란 없다.
정말 골 때리는 책이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는 영겁의 돌덩이, 지겨움 그 자체다. 그게 책이다.
그냥 ‘책’ 말이다. 아이는 논술 과제를 쓸 때 책을 ‘책’이라고밖에 달리 뭐라 이름 붙일 수가 없다. 이 책이든 저 책이든
아이에게는 그저 그렇고 그런 책일 뿐이다.
(25)
더군다나 책이 지니는 무게란 한결같이 사람을 아래쪽으로 잡아당기는 성향이 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 쉽게 무너질 가벼운 결심을 하고 –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몇 페이지도 못 읽고, 아이는 익히 알고 있는 그 끔찍한 무게에 짓눌리기 시작한다. 책의
무게, 지루함의 무게, 아무리 기를 써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버거움의 무게에.
(35-36)
마냥 늑장을 부리다가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마지못해 저녁 식탁에 얼굴을 들이민 아이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 사춘기 특유의 무게를 잡고 앉아서, 한마디 사과는커녕 식구들 간의
대화에 끼려는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는 식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후닥닥 일어선다.
(50)
독서의 즐거움이 사라져간다고 해서(다들 우리의 아들딸이, 요즘 젊은 아이들이 책읽기를 싫어한다고들 하니까), 아주 까마득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다.
그 즐거움은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다.
(67)
“아이는 냉철하기 그지없는 훌륭한 독자입니다.”
아이는 누구나 훌륭한 독자가 될 자질을 타고난다. 그리고 주위의 어른들이
몇 가지 지침만 잊지 않는다면 아이는 언제까지고 훌륭한 독자로 남을 것이다. 우선은 어른들이 자신의
능력만을 내세우려 들기보다는, 아이에게 열정을 불어넣어 줘야 한다. 무조건
암기와 복습만을 강요할 게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북돋워 줘야 할 것이다. 모퉁이에 서서 아이가 도착하기만 기다릴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볼 일이다. 어떻게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들기보다는, 기꺼이 아이에게 저녁 시간을 내어줘야 한다. 미래를 담보로 아이에게
으름장을 놓기보다는 아이의 현재가 한껏 펼쳐질 수 있도록 마음 써야 한다. 한때는 아이의 더없는 즐거움이었던
일이 결코 마지못해서 하는 고역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아이가 그 즐거움을 맘껏 누릴 수
있도록 기다리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적어도 아이 스스로가 그 즐거움을 의무로 삼고자 할 때까지는 말이다.
(94)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싶다. 생각을 추스르고 교사는 다시 아이들의
과제물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한낱 과제물 채점자에 지나지 않는 교사의 고독감을 그 누가 알겠는가?)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어느새 눈에 익은 낱말이 태반이다. 그렇고 그런 논지가 계속 반복되는 상황이다. 울컥 짜증이 치민다. 마치 반 아이들이 모두가 그에게 무슨 경전이라도 읊어대고 있는 듯하다.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어야 한다!라고, 눈에 들어오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전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뻔히 드러내고 있는데도, 읽어야 한다니……! 그것은 끝없이 반복될 뿐인 공허한 교육적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103)
우선 이제까지의 정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제까지 우리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 즉 이제껏 우리는 마치 세상과
등지듯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과 대립하기 위해 책을 읽어왔다. 그래서 때론 우리가 현실 도피자처럼 여겨지고
현실마저 우리가 탐닉하는 독서의 ‘매력’에 가려져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망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탈주자인 것이다.
(140)
결국 아이들은 두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두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 아이들은 (탄복할 정도로!) 세련되고 ‘쿨’한데, 학교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끊임없이 아이들을 괴롭히고 혹사시킨다. 아이들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언젠가 어른이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끝없는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151)
그렇다고 무슨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장족의
발전을 이루기까지 교사가 한 일이라곤 거의 없다. 책읽기의 즐거움이란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다만 읽어도 모를까 봐 지레 겁을 먹었던 (그야말로 오랜 고질병과도
같은) 그 말 못 할 두려움으로 인해 줄곧 사춘기 아이들의 기억 저편에 묻혀 있었을 뿐이다.
(174)
미국 고등학생들에게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크나큰 골칫거리라는 말을 해주자, 얼마 전에 그 책을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은 벌링턴과 바이크족이 가장 놀라워했다. 단지 <호밀밭의
파수꾼>이 교과 과정에 포함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 미국의 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샐린저를 강매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동안에,
한쪽 구석에서는 텍사스의 어떤 바이크족이 에마 보바리에게 푹 빠져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177)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학교의 문학 교육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관건은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력 못지않게 전략을 구사하는 능력을 훈련시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열등생’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의 아이일
경우가 허다하다. 단지 전술적인 대처 능력이 부족할 뿐이다. 자신이
어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아이는 곧 학교 교육과 교양을 혼동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거부당한 학생은 자신이 도서나 교양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만다. ‘읽는다’는 것은 자기와는 전혀 다른 부류가 다른 선민들이나 하는 고상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아이는 평생 책과 담을 쌓고 지내게 된다.
(178-179)
초등학생이건 고등학생이건 적어도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늘 작품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숙제가 아이들을 따라다닌다. 그런 식의 과제는 아이들을 질리게 만들어 급기야 책과 벗할 기회마저도 빼앗기기 십상이다. 20세기 말인 지금도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주인처럼 군림하는
설명에 가려, 정작 설명하는 대상은 뒷전으로 밀려 보이지도 않는다.
(189)
독서에 관한 한, 우리 독자들은 스스로 모든 권리를 허용한다. 우리가 이른바 독서 지도를 한다면서 청소년들에게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던 권리를 비롯해서 말이다.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뛰며 읽을 권리
3)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 보바리슴을 누릴 권리
7)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 내어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202)
한 권의 소설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던져버릴 만한 이유는 3만 6,000가지쯤 있다. 이를테면 전에 어디선가 읽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다지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작가가 주장하는 바에
전혀 동조할 수가 없어서, 혹은 닭살이 돋을 만큼 문체가 역겨워서, 더
이상 읽어나갈 이유를 찾지 못할 만큼 문체가 진부해서라는 등……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여기서 굳이 나머지 3만
5,995가지 이유까지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225)
인간을 살아 있기 때문에 집을 짓는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쓴다. 인간은 무리 짓는 습성이 있기에 모여서 산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자리도,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독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어떠한 명쾌한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삶과 인간 사이에 촘촘한 그물망 하나를 은밀히 공모하여 얽어놓을 뿐이다.
그 작고 은밀한 얼개는 삶의 비극적인 부조리를 드러내면서도 살아간다는 것의 역설적인 행복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만큼이나 불가사의하다. 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 책과의 내밀한 관계에 대해 보고서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