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간혹 비행기를 타고 조국의 강토를 하늘에서 굽어보면 그림같이 신기한 밭이랑 논이랑의 무늬진 아름다움과 순한 버섯처럼
산기슭에 오종종 돋아난 의좋은 초가지붕의 정다움이 가슴을 뭉클하게 해줄 때가 있다. 그리 험하지도 연약하지도
않은 산과 산들이 그다지 메마르지도 기름지지도 못한 들을 가슴에 안고, 그리 슬플 것도 복될 것도 없는
덤덤한 살림살이를 이어가는 하늘이 맑은 고장.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 강산에서 먼 조상 때부터 내내
조국의 흙이 되어가면서 순박하게 살아왔다.
(37)
뒷동산의 잘 생긴 바위 한 덩어리, 등 넘어가는 오솔길 한 갈래, 축동의 노목 한 그루에도 정령과 생명이 스며 있다는 생각, 즉 자연도
인간 못지않은 존귀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우리 민족은 믿고 있었다. 이것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사고이다. 어떤 의미로는 현대의 뛰어난 경륜을 지닌 지성보다도 한 걸음 앞선, 자연
보존의 존귀한 가치관과 신념을 지녔던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49)
또 어떤 일본인 학자가 서울에 다녀와서 교토에서 저희들끼리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옆에서 들은 일이 있다.
“서울 박물관에 가서 나는 일본의 고대 문물이 얼마나 초라한 것이고
또 시골뜨기인지를 실감했다. 신라 장신구들이 보여주는 찬란한 황금빛의 황홀함이나 비취곡옥들이 지니고
있는 신비롭고도 지체 높은 아름다움에 우선 양적으로 압도되었고, 질적으로 과연 큰집이라는 느낌이 깊었다. 여러분들도 서울에 한번 다녀오면 종래의 생각을 고치게 될 것이다.”
(54-55)
옛날 안동 하회마을에는 고려 중엽까지는 허씨 문중이 모여 살았고 그 후에는 안씨가 모여 살았으며 조선 초부터는
유씨 문중이 모여 살아왔다고 한다. 그때 허씨 문중에서 허 도령이라는 멋진 청년이 있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하회탈을 만들라는 신탁을 받았다. 허 도령은 목욕재계하고 별실에 금줄을 쳐놓은 다음 탈을 만들기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허 도령에게는 그를 사모하는 고운 마을 처녀가 있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감에 이 처녀는 허 도령의 안부와 그리운 정을 참지 못해서 금기를 어기고 창구멍을 뚫어서 그의
모습을 엿보았다. 가면의 완성을 서두르던 허 도령은 마지막 이매탈의 턱을 맞추지 못한 채 바로 그 순간에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처녀의 연정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 연인을 죽였고 열두 개 하회탈 중의 마지막
이매탈은 오늘날에도 턱이 없는 채로 전해온다고 한다.
(71)
조선 5백 년의 도자사상에는 이 분청사기와 아울러 백자, 청화백자가 또 하나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쌓고 있었다. 원래 중국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청화백자의 풍조에서 자극된 것이지만 한국 민족은 흰빛을 그리도 좋아했다. 흰빛으로
빚어진 어수룩하게 둥근 뭇 항아리의 군상들, 때때로 목화송이 같이 따스하고 때로는 백옥같이 갓맑은 살결의
감촉. 조선시대 백자의 흰빛은 그 아름다움에 참으로 변화가 많다. 우리의
미술 중에서 무엇이 가장 한국적이냐 할 때 나는 서슴지 않고 조선시대 박자기를 들고 싶다. 세계 어느
민족의 사기그릇 가운데 이렇게 스스롭지 않은 애정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그릇이 또 있을까. 세상에는
조선백자 취미를 흔히 병적 취미라고 흉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조선자기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건강하고
또 착실한 아름다움이다. 민중이 실용하는 그릇이요, 기교나
허식을 멀리 벗어난 숫보기의 아름다움이다. 젊을 때는 애틋한 애인같이 그리고 나이 들어서는 잘생긴 며느리처럼
순박한 아름다움에 바치는 마음의 즐거움, 이것은 병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낭만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까.
(79-80)
추한 것이 진정 아름다운 것들을 짓밟는 행패 속에 얼마 안 남은 우리 주택 건축사의 결정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하나 그 아름다운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물론 세계의 각 지역 간에 문화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오늘날 현대 한국인의 생활에서 오로지 주택문화만은 고격을 고수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판 없이
남의 것만을 새롭고 곱게 보려는 풍조는 우리 민족처럼 틀이 잡힌 문화전통을 가진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97)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청자 비색의 아름다움과 곡선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위에 또 하나 상감의 아름다움이 곁들여진다. 이 청자 상감의 기법은 오로지 고려 도공들만이 보인 창의였다. 벽옥같이
푸르고 갓맑은 살갗 위에 검고 희게 수놓인 상감의 아롱진 무늬들이 마치 흘러간 고려 문화의 꽃 그림자처럼 차가운 청자 살갗 위에서 파시시 숨을
쉬고 있다. 얼마나 많은 백학이, 그리고 얼마나 많은 흰
구름장이 고려 도공들의 망막을 스치고 지나갔을까. 학, 그리고
또 학, 학은 고려 사람들의 마음속 하늘을 나는 하나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165)
그림을 감상하는 데 너무 관념적인 태도는 금물인 줄 알지만 동양의 산수화란 항상 작가 자신을 그 풍경 속에 집어넣고
그 속에서 거닐면서 그려지는 것인 까닭에, 멀리서 바라보는 경치로서 그려지는 서양 풍경화의 감상법과
그 처지가 매우 다름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작가 정신 자신이
바로 긴 지팡이를 끌고 이 창해를 뒤돌아보며 유연하게 그림 속에서 소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바로 이 그림을 그릴 때 정선의 마음 자세가
그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73-174)
‘한국의 미’라고도 부를
수 있고 또 ‘한국의 멋’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미묘한
단원 그림의 흥겨움은 어찌 보면 대범하고 어찌 보면 거친 것 같으며, 또 때로는 싱거운 데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싱거움은 마치 맑고 담담한 샘물 맛처럼 못 잊을 한국미의 한 토막이 된다고
믿는다. 또 거칠고 대범한 맛은 잔재주를 못 부리는 때 벗은 마음씨의 발로이며, 말하자면 벗은 한국 멋의 한 토막이 아닌가 한다.
(178-180)
세상에는 단원을 단지 퐁속화가의 한 사람으로, 또는 신선화를 잘하는
화원의 한 사람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단원의 숨은 산수화 대작들을 많이 보고
또 그가 지녔던 18~19세기 화단사적인 위치를 훑어보면 그러한 인식은 대개 고쳐질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중국 산수화의 본보기를 되그리는 것을 일삼던 당시의 화단 풍조 속에서 산수화를 뚜렷하게 국풍화하여 비로소
풍토 감각이 짙은 한국 산수화의 한 정형을 세웠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풍속화 작품의 주제는
거의 서민사회 전반에 걸치는 민생을 다룬 작품들이 많았으며, 이것은 같은 시대 혜원의 풍속화와 더불어
매우 주목할 만한 사회사적인 의의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186-187)
한국미가 지니느 장점의 하나는 구수함이요 또 은근스러움이며 때로는 익살스러움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이러한 서민적인 대상 속에서 숨김도 과장도 없이 풍겨나는 일종의 흥겨움을 지칭하는 것이다. 고려자기나 조선자기 또는 불상조각이나 건축 등 각 분야의 작품에서 이러한 아름다움의 요소를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발견된다면, 이것은 대부분이 서민 자신들을 위하여 자신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작품에서 농후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왕실의 권위나 종교의 권위를 돋우기 위한 작품 같은 것에는 그 상대방의 주문에
따라 위엄과 기교가 앞서야 되고, 따라서 한국 사람들의 본바탕 생활문화나 생활감정을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서민감정의 자유가 보장돼 있지 못했던 것이다.
(203)
혜원은 원래 산수화에 조촐한 솜씨를 보인 작가였다. 말하자면 그 풍속화는
산수화가로 하나의 여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간송미술관에 있는 산추병풍채나 일품산수들을 보면 한층 그러한
실감을 느끼게 될뿐더러 우리가 혜원 대접을 올바로 못하고 있었구나 싶어지기도 한다. 혜원이 풍속화에서
보여준 작가적인 역량, 즉 인물 풍속의 배경처리라든가 화면 포치의 원숙함이라든가 만만치 않은 필력 등은
이미 그러한 산수화의 기량에서 보여준 격조의 높이를 반영했음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화가 혜원은 뛰어난
풍속화가로서도 고금에 없는 외벌 인물일뿐더러 산수화가로서도 격이 높은 사람이었다.
(267)
한국의 고찰 특히 산지 가람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융성했던 고대, 중세
불교의 여운이 중건된 근세의 석조 건물들 사이에 혼재되어서 주위의 자연 속에 조화된 일종의 스산하고도 안온한, 한국
특유의 정서와 장관을 이루어주는 동(道)에 있다.
이것은 언뜻 보면 잡연스러운 듯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높은 격조를 지닌 질서 아닌 은근한 질서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268)
건축의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멀리서 바라보는 운치의 멋이요, 하나는 그 속에 몸을 담고 느끼는 즐거움이다. 한국 건축, 특히 정자 건축의 경우 한국 사람들처럼 자연 속에 건물이
들어설 제자리를 멋있게 잡을 줄 아는 민족은 드물다고들 말한다. 즉 어떤 자연의 일각에 딱 세워서 자연
풍광을 한층 빛나게 하고 자연과 건축을 일심동체로 만들어 마치 자연 속에 점정하는 신기한 효과를 낼 줄 안다고 말이다. 평양 대동강의 을밀대나 부벽루가 그것이요, 의주의 통군정이나 창덕궁의
부용정, 수원의 방화수류정이나 화홍문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322)
이러한 고려시대의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뛰어난 고려의 자개상자, 자개함들이
지금 일본의 국립박물관, 도쿠가와미술관, 다이마데라, 미국의 보스턴미술관, 독일의 쾰른동양박물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동양박물과 등 외국에만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한국 사람 누구에게나 야릇한 심경을 금할 수가
없게 한다. 고려시대에 중상서라는 국영 국예품제작소, 또는
세함조성도감 같은 나전칠기의 대량 생산기구까지 두고 만들어낸 고려의 많은 자개그릇들이 오히려 국내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뜻있는 한국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씩 생각해보아야만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404)
명상적인 조용한 빛깔과 은은하고도 지체 있는 청자의 질감이 고려시대 상형청자의 아름다움에 고요와 신비의 생명감을
불어넣어주었다고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대개 공예 조각이란 예술의 경지에까지 미치지 어려운 경우가 많고, 따라서 지나친 잔재주와 아첨이 깃들인 속물이 되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고려의 상형청자 작품들을 보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모두 늣늣하게 때를 벗었다는 느낌을 깊게 받게 된다. 더구나 다루기 어려운 청자연적이나 문진 같은 작은 문방구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조형이 자칫 복잡해질 듯싶지만
도리어 간명하고 순진하며 물체가 지닌 습성과 아름다움의 기미를 너무나 잘 살렸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