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2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2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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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2 년 전에 재미있게 읽은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는 책이 있었어.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감이 오지 않지만, 설마 음악에 관한 내용이라고 제목만 봐서는 추측하기 어려울 거야. 그런데 그 책은 감칠맛나게 음악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었단다. 그래서 그 책을 읽고 나서 너희들 고모한테도 선물을 해주었던 기억이 있구나. 그 책의 두번째 이야기가 있었어. 아빠는 이제서야 그 두번째 이야기를 읽어 보았단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 너희들이 이 책 제목을 보고, 그 맛있는 전복에 관한 이야기냐고 물어보았잖아.. 하하.. 그 전복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야. 바다에 사는 전복이 아니라 뒤집어 엎는다는 뜻의 전복이란다. 음악의 역사에서 새로운 음악으로 기존의 음악 세계를 확 바꿔 놓은 음악에 관한 이야기라고 짧게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첫번째 이야기의 강렬함 만큼에는 미치지 않았지만, 두번째 이야기도 역시 지은이 강헌 특유의 입담으로 재미있는 음악의 에피소드를 알게 되어 좋았단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새로운 음악과 뮤지컬 영화도 알게 되어 좋았단다. 요즘은 제목만 알면 바로 검색창에 두들기면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까, 책을 읽다가 듣고 싶은 음악이 생기면 바도 찾아서 들으면서 책을 읽곤 했단다. , 그러면 어떤 전복과 반전이 있었는지 이야기해볼까?

 

1.

러시아 5인조의 이야기가 맨 처음 등장하는구나. 러시아 5인조는 예전에 읽은 풍월당 박종호님의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이들인데, 이 책에서 만나니 반갑더구나. 러시아 5인조는 민족주의 음악가들로 유명한데, 그런 러시아 5인조 같은 이들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조선 음악가 동맹.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단체이고, 이 단체에 소속한 음악가들 역시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한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별로 없을 거야. 그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1945년 해당 당시의 설명이 필요하다면서,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 특히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단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역사.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는 아픈 역사. 그런 혼란 속에서 하나의 나라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여운형, 김구 등 민족주의자들이 암살당하고…. 음악계에서도 친일파였던 인사들이 다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는구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현제명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고려교향악협회라는 음악 단체를 만들었대. 20~30대 젊은 음악가들은 현제명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롤레타리아 음악을 하고자 하는 조선 음악가 동맹을 만들었단다. 대부분 젊은 음악가였는데, 안기영과 같은, 좀 나이가 있는 음악가도 있었어. 안기영은 당시 흔치 않은 미국유학파였는데, 귀국 후 그는 민족 음악을 했다고 했어. 민요를 채집하여 악보로 만들기도 했어. 그와 나이와 비슷하고 마찬가지로 유학파였던 홍난파와 전혀 다른 음악의 길을 갔다면서 지은이는 두 명의 음악가를 비교해 주었단다. 지은이 강헌의 글을 읽어보면 홍난파보다 안기영을 더 높이 평가하는 듯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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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안기영은 작곡가였지만 동시에 미성의 테너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똑 같은 물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는 말처럼 이 사람도 분명 처음에는 서양음악에 꽂혀 유학을 갔을 텐데도 홍난파와 매우 다른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홍난파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하고 완전히 반해서 우리 걸 다 부정하고는 저 음악의 세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홍난파는 서구도 아닌 일본에 가서 베토벤과 슈베르트와 모차르트를 보고 기꺼이 그 문화의 포로가 되었는데, 이에 비해 안기영은, 보니까 좋긴 하네. 그래도 역시 우린 우리 걸 해야 해하는 생각을 다지며 자신만의 음악철학을 정립하게 된다. 이 미세한 차이가 홍난파와 안기영이라는, 똑같은 서양음악 유학파의 운명을 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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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영은 작곡뿐만 아니라 테너로도 활동을 했대. 그리고 한국 최초의 뮤지컬 <견우직녀>도 만들었고, 이어 <콩쥐팥쥐> <견우직녀>의 후속작인 <은하수>도 만들었는데, <은하수>라는 작품이 반도가극단을 통해서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하는구나. 그야말로 멀티플레이어 음악가였구나. 안기영은 조선 음악가 동맹 부위원장을 맞았고, 1947 8월 활동 금지를 당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월북을 했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하는구나. 안타깝구나.

조선 음악가 동맹에 또 한 명의 천재 음악가 김순남이 있었어. 1917년생인 그는 일본에서 유학을 했고, 해방 후 조선 음악가 동맹에 가입했지만 좌익활동금지 조치로 숨어 지내게 되었단다. 그러면서 <인민항쟁가>를 작곡했는데 좌익 단체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인기를 얻었대. 한때 북한 국가를 대신하기도 했다는구나. 그가 음악 활동의 탄압을 받게 된 것은 현제명이 조선 음악가 동맹의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했기 때문이었어.

그런데 미군청정 문화참사관(미국 사람인데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구나.)이 우연히 김순남의 악보를 보게 되었고 반했다고 하는구나. 숨어 지내는 그를 찾아내라고 했고, 그의 부하가 김순남을 찾아냈대. 미군청정 문화참사관은 직접 그를 만나서, 그에게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 보내주겠다고 했어. 하지만 김순남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에게 미군차를 빌려달라고 했고, 그 미군차를 타고 월북을 했다는구나. , 이런 것도 기개라고 해야 하나.

북에서는 그를 대환영했고, 중요인사로 등용되었고, 그는 각종 음악을 작곡했어. 남에서는 숨어만 지냈는데 북에서는 그렇게 반겼으니 얼마나 신나서 음악을 했겠니. 거기에 모스크바로 음악 유학을 보내주기까지 했어. 그런데 갑자기 1953년 소환 명령이 떨어졌어. 1953년 북한은 서슬 퍼런 숙청이 있던 시기였는데 음악계 인사도 예외는 아니었지. 김순남 역시 남로당파였으니까다른 유학생들은 귀국하면 숙청당할 것을 알고 망명을 했는데, 김순남은 호기롭게 귀국을 했단다. 숙청당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법정 재판을 통해서 작곡금지령이 떨어지고 함경북도로 유배를 갔어. 처형 안 당한 것이 다행일 정도였지. 그 이후 그 천재 음악가의 삶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당시 김순남처럼 남에서 쫓겨 북으로 갔다가 북에서 숙청을 당한 이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도 그들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대우를 받지 못하였단다. 역사에서 그들의 기록은 한 줄도 없었어. 김순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참 안타까운 천재음악가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2.

시대를 쭉 뛰어넘어 이번에는 1980년대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이때 등장하는 이들은 아빠도 어렸을 때 들어본 가수들이구나. 1980년대 우리나라 가수 중 단 한 명을 뽑으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 똑 같은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구나.

조용필. 아직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진정한 가왕. 조용필은 1970년대에도 활동을 했지만, 유신정권에 (어떤 이유인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찍혀서 대마초 사건 이후 가장 오랫동안 활동 금지를 당한 가수들 중에 한 명이었대. 박정희 정권에 사라지고 나서야 사면을 받았다고 하는구나. 당시 본인은 힘들었겠지만, 당시 활동 금지 기간에 음악연습을 더 많이 하여 실력이 엄청 향상되었다고 하는구나. 만약 그 기간이 없었다면 1980년대 우리가 알고 있던 조용필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이야기했어.

사면 이후 첫번째 앨범이 <창 밖의 여자>를 타이틀로 한 앨범인데 그야말로 싹쓸이를 했다는구나. 조용필은 첫 싱어송라이터라는 타이틀이 있었고, 그는 일인자였지만, 안주하지 않았고 동료 음악인들에게도 투자를 했대. 그와 함께 하는 밴드위대한 탄생에게 투자를 했고, 그 밴드를 운영하다 보니 부자도 못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당시 저작권에 대한 법적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어서 그의 저작권료가 고스란히 앨범제작사로 들어가고 있었대.

그렇게 조용필에 우리나라에서 활개를 치고 있을 때, 미국과 전세계에서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이가 평정하고 있었어 1980년대 들어서면서 MTV 출현과 Digital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CD의 출현. 이것과 발맞춰 비디오를 지향하는 화려한 춤 솜씨의 마이클 잭슨의 등장. 1982년 발매된 <스릴러> 앨범은 어마무시한 히트를 기록하게 된단다. 아빠도 그 앨범에 들어 있는 노래를 여럿 알고 있으니까앞서 이야기했듯 MTV를 타겟으로 뮤직비디오도 만들어 대박이라고 하는데, 아빠는 <스릴러> 뮤직비디오는 못 봤었어. 또는 봤지만 기억을 못하거나그래서 이번에 유투브를 통해서 봤는데 10분이 넘어가는 단편 공포 영화를 보는 듯했단다.

1980년대는 조용필과 마이클 잭슨이 이끌어가는 주류 음악뿐만 아니라 비주류 음악도 같이 공존을 했다고 하면서, 비주류 음악 세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단다. 외국에서는 펑크와 얼터너티브 락으로 이어졌고, 이들의 대표주자에는 아빠에게도 익숙한 U2, R.E.M, Nirvana 등이 소개되었단다. 그리고 우리나라 1980년대 비주류 음악에서는 학생들 중심의 운동가요 출신 가수들의 성장을 이야기했어. 아빠에게도 익숙한,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김광석, 안치환 등등그리고 락밴드도 크게 성행했던 것이 1980년대라고 했단다. 들국화를 필두로 많은 밴드들이 성행했던 1980년대다양한 음악이 공존했던 1980년대였어. 몇 년 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80년대의 음악을 다시 자주 들었을 때가 있는데, 여전히 촌스럽지 않고 기분 좋아지게 하는 음악이더구나. 아빠는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소개된 1980년대 음악을 찾아 들어보면서 책을 읽었단다. 80년대 추억들이 소환되었단다. 음악의 힘은 대단해.

 

 

3.

20세기 클래식 음악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단다. 그나마 신()빈악파가 선전을 했지만, 쇠락의 길을 막을 수 없었어. 신빈악파 전에 빈악파가 있었어. 빈을 중심으로 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로 이름만 들어도 쟁쟁했던 이들이지. 그에 비해 신()빈악파는 쇤베르크, 안톤베베른, 알반베르크 등으로 쇤베르크를 제외하면 이름조차 낯선 이들이구나.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음악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니었어. 쇤베르크의 이야기 속에 그들이 추구했던 음악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단다.

쇤베르크가 이야기하기를, 지금까지가 평범한 시대였다면 우리 시대의 음악은 아주 달라야 한다고 했어. 그는 지금까지의 조성 체계를 족쇄로 생각하고 이를 파괴하는 무조성 체계의 음악을 추구했단다. 그렇다 보니 그의 음악은 일반인에게 난해했어. 일반 사람들이 그들의 음악에 친숙해지기는 쉽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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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들어서 디지털 음악이 유행하고, 음악을 쉽게 다운로드해서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클래식 산업은 크게 쇠락했다고 하는데, 지휘자로 잘 알려진 카라얀도 한 몫 했다고 하는구나. 그가 뭘 했냐고? 카라얀이 클래식 산업을 주도해서 베를린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와 2000장의 음반을 녹음을 했다는구나. 오호, 그러면 클래식 음악을 크게 성행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녹음한 2000장의 음반이 모두 옛 고전 음악만 연주했고, 당대의 클래식음악은 녹음을 하지 않았대. 그렇다 보니 당대의 작곡가들은 어찌 보면 모차르트, 베토벤 등과 경쟁을 해야 했던 거야. 그렇게 20세기에는 클래식음악은 새로운 음악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어.

오페라도 마찬가지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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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이제 뮤지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아빠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뮤지컬의 환경은 척박했단다.. 하지만 최근에는 뮤지컬은 많이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문화가 되었어. 너희들도 너희들을 위한 뮤지컬을 여러 편 봤었잖아. 그 뮤지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데, 그 뮤지컬의 탄생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오페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1600년 첫 오페라 <에우리디케>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했다고 하는구나. 아빠는 오페라가 교향곡보다 늦게 출현한 줄 알았는데, 오페라가 먼저였다고 하는구나. 오페라의 분위기를 먼저 알려주려고 시작을 하면서 연주곡인 오페라의 서곡라는 것이 있는데, 이 서곡이 발전하여 교향곡이 되었대.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한 오페라는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고, 규모도 커지고 프랑스에서는 발레까지 접목한 형태가 나타났다고 했어.

오랫동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우리가 요즘도 즐겨는 듣는 아리아들과 서곡들을 비롯해 많은 음악들이 태어났단다.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에서 기존 오페라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오페라코미크라는 장르가 생겨났고,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오페레타가 출현했다고 했어. 오페라에 비해 화려한 춤이 가미되었고 좀더 가볍다고 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아무튼 이런 오페라에서 조금씩 변형된 오페라코미크와 오페레타가 뮤지컬의 뿌리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구나.

오페레타는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를 통해서 자크 오펜바흐라는 사람을 통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했어. 오펜바흐의 유명한 오페레타로 <지옥의 오르페우스>이 있단다. 이 오페레타에 삽입된 캉캉 춤곡이 유명한데, 들어보면 누구나 들어본 음악일 거야.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슬픈 사랑은 너무 극적이어서 오페라에서 많이 다루었다고 하는데,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르페우스>에서는 조롱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는구나. 오르페우스가 사실 에우리디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데스가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던 것을 어긴 것도 사실은 일부러 그랬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대. 아빠는 <지옥의 오르페우스>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고, 한번 기회가 있으면 한번 보고 싶더구나.

지은이 강헌은 이 오페레타 이외에 슈트라우스2세의 <박쥐>라는 작품을 꼭 보라고 권했어. 실황으로 보면 좋겠지만, 영상을 찾아서 보라고 했어. 얼마나 재미있길래 보라고 하는지 꼭 보고 싶더구나.

이렇게 유행한 오페레타가 대서양 건너 미국에도 진출했어. 그리고 점점 진화를 거듭해서, 1927 <쇼보트>뮤지컬 플레이라고 하는 장르로 큰 성공을 거두었어. 드디어 장르 이름에뮤지컬이라는 용어가 들어갔구나. 하지만 이어진 대공황으로 뮤지컬의 성공은 단절이 될 위기에 처했어. 이 때 출현한 것이 뮤지컬 영화였단다.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들어가는 뮤지컬 영화가 뮤지컬을 대신했던 거야. 그 첫번째 뮤지컬 영화가 <42번가>였다고 했어.

이 영화는 나중에 뮤지컬로도 재현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단다. 이렇게 뮤지컬보다 영화로 먼저 만들어져서 나중에 다시 뮤지컬로 성공한 작품들이 꽤 있다고 했어. 그 중에 또 대표적인 것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아빠가 뮤지컬을 많이 보지 않았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들어봤어. 아무튼 요지는 그 전에 오페라의 불모지와 다름 없던 미국과 영국에서 오페라에서 진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뮤지컬이 크게 성공했다는 것이야.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영국의 웨스트엔드를 중심으로 뮤지컬은 크게 발전했다고 하는구나. 브로드웨이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사실 웨스트엔드도 뮤지컬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은 몰랐어. , 아빠가 뮤지컬에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 1980년대 뮤지컬 빅4라고 부르는 <캣츠>, <레미제라블>, <팬텀 오브 오페라>, <미스 사이공>가 웨스트엔드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는구나. 이 뮤지컬들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공연되고 있어..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말이야. 그런데 이 4편 모두 캐머린 매킨토시라는 사람이 제작을 했대. ,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뮤지컬계의 스탠 리가 아닌가 싶구나.

우리나라의 뮤지컬의 역사는 어떨까. 앞서 조선 음악가 동맹을 이야기하면서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 안기영이라는 이가 창작 뮤지컬을 만들었다고 했잖아. <견우직녀>, <콩쥐팥쥐>, <은하수>를 만들었다고하지만 분단과 전쟁으로 뮤지컬은 맥이 끊겼다고 했어. 오히려 북한에서 피바다 가극단가 공연한 5대혁명가극이 유명해졌다고 했어. 유럽 순회 공연을 가질 정도였다는 구나. 이에 자극을 받은 남한에서 가극단예그린을 만들어 <살짜기 옵서예>라는 작품을 만들었지만, 워낙 뮤지컬이 비용이 들어가다 보니 국가의 지원이 끊어지자 더 이상 할 수 없었어.

그러다가 1990년대 서서히 뮤지컬의 시장이 넓어졌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많은 뮤지컬 가수들이 등장하고 뮤지컬의 제작도 많아졌다고 했어. 그 붐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고 말이야. 하지만 아직 창작 뮤지컬은 너무 적다고 하는구나. 대부분이 외국 뮤지컬의 판권을 사와서 제작된다는 것이지.. 유능한 인재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제대로 된 창작 뮤지컬만 나오면 더 발전할 수 있다고 했어.

암튼 뮤지컬은 가장 늦게 등장했지만 가장 강력한 음악 장르가 되었고, 오페라를 역사 속으로 모셨다고 하는구나. 뮤지컬 킬 더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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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345)

하지만 가장 늦게 등장했음에도 뮤지컬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장르 혹은 상품이 되었으며 이 생명력은 앞으로도 굉장히 오래 이어질 것 같다. 그렇게 예상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록 출발은 늦었으나 그 앞의 수많은 인류 예술사의 최선의 성과를 포섭하고 축적해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이야말로 어쩌면 인류 예술사에 나타난 가장 순조로운 반전의 명예혁명 같은 것이 아닐까? 뮤지컬은 오페라를 학살하는 대신 조용히 유폐시켰고 오페라가 누려왔던 모든 것을 새 시대에 걸맞게 자신의 영역에 구축한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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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전복과 반전의 순간 두번째 이야기란다. 음악과 음악가들 사이에 숨어 있는 에피소드들은 재미있는 것이 많은 것 같아. 그런 이야기를 알게 된 다음에 음악을 들으면 그 전과 달리 색다르게 들리기도 하더구나. 지은이 강헌님께서는 세번째 이야기를 출간해주셨으면 좋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 한국과 서구의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나에게 가장 극적인 흥미를 자아내는 대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책의 끝 문장 : 뮤지컬은 오페라를 학살하는 대신 조용히 유폐시켰고 오페라가 누려왔던 모든 것을 새 시대에 걸맞게 자신의 영역에 구축한 장르다.


(78)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음악가동맹’은 음악에서 기교나 기술보다는 민중과 함께하는 호흡을 중시했다. 그래서 치열한 역사를 쓰는 데 필요한 혁명가도 다수 작곡했지만 아름다운 우리말로 쓰인 시로 노래나 가곡도 많이 만들었다. 조선음악가동맹이 특히 사랑한 시인은 김소월이었다. 소월의 시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의 울림을 안고 있다고 판단했고 최상의 음악적 언어로 표현해낼 수만 있다면 그게 바로 민족음악일 것이라 생각했다. 김순남이 쓴 걸작 가곡 가운데 김소월의 시에 붙인 <산유화>가 있다. 다행히도 이 곡은 조수미가 부른 노래로 녹음이 되어 떳떳이 들을 수 있다.

(142)

나는 <빗 잇>의 맨 마지막 절 가사가 섬뜩하다. 이 노래가 나온 때는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11~2004)의 시대였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도탄으로 몰아넣게 되는 신자유주의의 악령이 슬슬 어두운 구름을 드리우기 시작하던 때다. 그런데 <빗 잇>은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외친다.

"지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어. 난 당신이 화려하고 강력한 투쟁력을, 싸움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옳고 그른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 그냥 꺼져. 그냥 꺼지라고."

(254)

다만 중요한 사실은 서양음악사가 바로 쇤베르크에 이르러, 카라얀이 마지막으로 완전히 말아먹기 전에, 이미 90년 전에 사실상 내면적 종말을 고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게 하나 있다. 쇤베르크와 그 지지자들이 몸부림치면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는 것, 그 점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술사가 수많은 사례를 통해 동시대에는 공감되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이 수백 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어느새 너무나 당연하게 열광과 환호를 받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비밥도 그랬다. 비밥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왜 좋냐고 물으면 "그냥 좋던데요." 한다. 그 좋은 비밥 음악, 이유 없이 그냥 좋은 비밥 음악 중에 너무나 많은 곡이 놀랍게도 쇤베르크의 무조성주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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