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모어는 유토피아 개념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위험하다고 이해했다. 철학자이자
선도적인 유토피아 전문가 라이먼 타워 사전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인간은 유토피아의 존재를 열정적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아울러 자기 신념에 깃든 부조리를 꿰뚫어보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유머나 풍자와 마찬가지로 유토피아는 정신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젖힌다. 사람이든
사회든 점차 나이 들어가며 현상에 익숙해지므로 자유는 감옥으로 진실은 거짓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현대
신조나 더욱 안타깝게는 믿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신념 탓에 우리는 여전히 주변을 매일 에워싸고 있는 근시안적 사고와 불공정성을 보지 못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째서 우리는 1980년대 이후 어느 대보다 부유해졌는데도 점점 더 열심히 일하고 있을까? 어째서
빈곤을 완전히 퇴치하고도 남을 만큼 부유한데도 인구 수백만만 영이 여전히 빈곤에 허덕일까? 어째서 개인소득의 60% 이상을 자신이 어쩌다 태어나게 됐을 뿐인 국가가 좌지우지할까?
(28)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하는 것은 거의 허울뿐인 “자유주의” 이념이다. 오늘날은 “너
자신이 돼라”와 “네 일을 하라”가 중요하다. 자유는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이상일지 모르나 공허해지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도덕적 고찰은 두려움의 대상이므로 공공 토론에서 일종의 금기가 되었다. 결국 공공의 장은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온정주의적이다. 거리마다 진탕 마시고 떠들고, 빌리고, 사고, 힘써
일하고, 스트레스에 짓눌리고, 부정을 저지르라고 유혹하는
덫이 널려 있다. 사상 표현의 자유에 대해 스스로 무엇이라 말하든 우리의 가치는 황금시간대에 광고를
내보낼 수 있는 재력을 갖춘 기업에 과대선전하는 가치에 가깝다. 광고 산업이 우리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의 일부가 어느 정당이나 종교 교파에서 비롯된다면 우리는 반기를 들 것이다. 하지만 대상이 시장이므로
“중립”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30)
세상은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청년이 정신과 진료를 받고, 경력 초기에 몸과 마음이 탈진하고,
항우울제를 상용한다. 사회는 실업과 불만, 우울증
같은 집단적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개인 탓이라고 거듭 비난한다. 성공이 선택이라면 실패도 선택이다. 일자리를 잃었는가? 더욱 열심히 일했어야 했다. 몸이 아픈가? 건강한 생활방식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불행한가? 약을 복용하라.
(72~73)
하지만 돈은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열쇠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맞다. 하지만 한 국가를 전체로 보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기대수명이 자동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는 시기는 일인당 국내총생산이 연간 약 5,000달러까지일 때다. 하지만 일단 충분한 양의 음식, 비가 새지 않는 주택, 깨끗한 식수가 확보되고 난 후라면 경제 성장은
더 이상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때부터 행복 정도를 훨씬 정확하게 가리키는 지표는 불평등하다.
(124)
진보를 측정하는 기준에 따른 문제는 시대마다 다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계는 더 이상 경제의 진짜 모습을 포착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시대마다 해당 시대에 맞는 진보를
가리키는 수치가 필요하다. 18세기에는 수확의 규모가 중요했다. 19세기에는
철도망의 반경, 공장 수, 탄광업의 생산량이 중요했다. 20세기 들어서는 국민국가의 경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산업의 대량 생산이 중요했다.
(149)
현대 지식 경제에서는 주당 40시간의 근로시간도 지나치게 많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신의 창의적인 능력을 계속 사용하는 사람은 평균적으로
하루 6시간 이상 생산성을 발휘할 수 없다. 창의적인 자질과
높은 교육수준을 갖춘 인재를 보유하고 있는 부유한 국가들이 주당 근로시간을 가장 많이 줄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22)
수십억 인구는 풍요의 땅에서 제품 가격의 작은 일부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팔도록 강요당한다. 모두 국경이 있기 때문이다. 국경은 세계 역사를 통틀어 최대 단독
차별 요인이다. 같은 국가의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 차이는 분리된 세계 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
차이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은 소득 상위 8% 부자가
전체 세계 소득의 절반을 차지하고, 상위 1% 부자가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최하위층 10억 명이 소비하는
금액은 세계 전체 소비액의 1%에 불과하지만 최상위층 10억
명의 소비액은 72%이다.
(236)
새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옛 아이디어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269)
따라서 이 책에서 제안한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모두에게 마지막으로 두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 첫째, 당신과 같은 사람이 바깥에 더욱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정말 많다. 내가 만났던 수없이 많은 독자들은
이 책에 소개한 개념을 전적으로 믿으며 세상이 부패하고 탐욕스럽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주위를 돌아보고 조직을 결성하라고 촉구했다. 세상에는 진심으로 좋은 의도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둘째, 낯이 두꺼워져라. 무엇이
중요한지 아무도 당신에게 명령하지 못하게 하라.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이어야 하고, 불가능에 도전해야 한다. 이 점을 기억하라.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동성 결혼을 요구했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미치광이라는 낙인이 찍혔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역사가 증명할 때까지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