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한참을 기다려 예약 도서로 빌려왔다.
도서관 신간을 보려고 신청하고 기다리고 받아오는 긴 시간에 지친다.
한참이 지난 후 받았을 땐 책을 읽고 싶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지고...
그래도 평소 좋아하는 번역가인 홍한별 님의 책이라 힘을 내어 읽어보려 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하얀 석고상을 그리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아니, 그 선생님은 말 같은 것을 하는 분이 아니어서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에 석고상을 들고 와 교탁위에 올려놓았다. 미술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한숨을 토하듯 ‘아그리파‘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게 갓 태어난 것처럼 순결하고 눈부신 하얀 머리의 이름이었다. 선생님이 말없이 내어준 과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새하얀 형체를 종이 위에 그림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 P9
그날의 준비물인 스케치북과 4B 연필만을 가지고, 흰 도화지와 시커먼 연필을 가지고 어떻게 하얀 것을 그리라는 걸까. 막막했지만 흰 종이에 더듬더듬 선을 그어 형상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을 댈수록 석고상 그림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흰색을 그린다는 불가능한 과제. 수업 종이 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포함한 예순 명의 아이들이 전부 시커먼 형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 P9
수업 종이 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포함한 예순 명의 아이들이 전부 시커먼 형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저마다의 좌절감을 담은 그림 예순 장. 흰 석고상을 그린 검은 그림은 번역 불가능성의 증거다. 이게 이렇게 생겼는데, 눈에 뚜렷이 보이는데, 왜 종이에 그대로 그려지지 않나. 이게 이런 뜻인데, 너무나 빤한데, 왜 글로 옮겨지지 않나.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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