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소리야, 밥, 이제 퇴근하고 집에 가면 휑해. 애들이ㅡ젠장, 애들이 전부였어. 그리고 애들 친구들도ㅡ있던 집이 이젠 적막해. 그래서 무서워, 보비,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돼. 이번에 여기 오기 전에도 그랬어. 죽음을 생각하면 내가 나 자신을 애도하는 느낌이야. 아, 보비, 젠장, 상황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아." 밥이 형의 어깨를 잡았다. "지미. 그러니까 무서워지려 그래. 형 지금 취했어. 당장은 수전과 잭 문제를 해결해야 해. 형은 괜찮을 거야." 짐이 밥에게서 떨어져 다시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넌 사람들한테 언제나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괜찮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가 눈을 떠서 밥을 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미련하고 불쌍한 새끼." "그쯤 해둬." 밥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출렁 거렸다. - P394
짐이 다시 눈을 떴다. 눈동자는 색깔이 없는 것 같았고 작게 벌어진 틈 속에서 푸른색이 희미하게 반짝일 뿐이었다. "보비." 거의 속삭이는 소리처럼 들렸다. 짐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거짓말쟁이야." 그가 손으로 얼굴을 닦을 때 바람이 호텔 모퉁이를 돌아 거세게 불어왔다. 아래쪽에 있는 관목들이 쏴아쏴아 부대끼며 휘어졌다. - P394
"밥, 내가 죽였어." 바람이 휘몰아쳐 밥의 코트 소매가 캔버스 돛처럼 펄럭였다. 밥은 가슴께에서 팔짱을 끼고 구두코를 발코니 맨 아래 난간에 대고 꾹 눌렀다. "어떻게 죽였어? 평화 집회에서 연설을 해서 죽였어? 열심히 지켜주다가 죽였어?" "잭 말고." 밥은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발이 아주 크게 느껴졌다. "그러면 누구?" "우리 아버지." - P395
그 말은 일상 대화를 하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또한 그들이 같이 주기도문을 암송하기를 짐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밥은 잠시 멍했다. 그가 형을 돌아보았다. "아니야, 형이 그런 게 아니야. 기어 옆에 앉았던사람은 나야,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지." "네가 아니었어." 이제 짐의 얼굴은 젖어서 아주 늙고 쭈글쭈글해 보였다. "넌 뒤에 앉아 있었어. 수지도. 너는 네 살이었어, 밥, 그러니까 하나도 기억이 안 날 거야. 나는 여덟 살이었어. 아홉 살이 코 앞이었지. 기억이란 걸 할 나이야." - P395
짐은 여전히 벽에기댄 채로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좌석은 파란색이었어. 앞좌석에 앉겠다고 너랑 내가 싸웠지. 진입로를 내려가기 전에 아버지가 좋아, 이번엔 지미가 앞에 앉는다. 쌍둥이는 뒤에, 하고 말했어. 나는 운전석으로 넘어갔어. 운전석에 앉으면 안 된다는 말을 수백 번 들었는데도 말이야. 운전하는 시늉을 했어. 클러치를 밟았어." 짐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게 고개를 저었다. "차가 굴러내려갔지." "형 취했어." 밥이 말했다. "엄마가 집에서 나오기도 전에 내가 널 앞자리에 앉혔어. 경찰이 도착하기 한참 전에, 난 뒷좌석에 올라탔어. 여덟 살이었어. 아홉살을 코앞에 둔 나이. 나는 그때부터 그렇게 교활했던거야. 굉장하지 않아, 밥? 나는 그 영화 <나쁜 종자>에 나오는 애같았어." 밥이 말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꾸며내는 거야. 짐?" "꾸며내는 게 아니야." 짐이 천천히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난 취하지 않았어. 왜 취하지 않는지 모르겠어. 저 빌어먹을 걸 다 마셔버렸는데." "형이 한 말 안 믿어." 짐이 고단한 눈빛으로 불쌍하게 밥을 쳐다보았다. "물론 믿기지 않겠지. 힌지만 보비 버지스, 네가 그런 게 아니야." - P396
밥이 일어서서 냉장고로 걸어가 그 안을 살폈다. 맥주, 우유, 올리브 병이 있었다. 밥은 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학생들도 지금은 O.J.가 누군지 알 거야. 다시 수감됐잖아. 아니, 잠시 풀려났던가. 하지만 평생 교도소에서 썩게 될 거야." 그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형 친구 월리와 함께." "그래, 그래. 그건 사실이야." 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윌슨에 있는 학생은 아무도 관심이 없어."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겠지." 밥이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잠시 후 밥이 물었다. "월리한테서 연락은 왔었어?" 짐이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 혼자 해나가고 있어." "징역을 살 것 같아? 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어." 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 거야." - P435
슬픈 순간이었다. 살다보면 슬픈 순간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밥은 형이 맞춤 정장에 값비싼 커프스. 단추를 한 차림으로, 매일 하루가 끝나갈 무렵 법원 앞 계단에 서서 수많은 마이크에 대고 말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무죄 선고를 받아냈을 때의 그 환희를. 그리고 이제 그때의 그 피고는 이토록 긴 세월 끝에, 아마도, 어쩌면 징역을 살게 될 것이다. ... ... " - P535
"버스를 타. 짐." 밥이 형에게 버스표를 쏙 내밀었다. "가. 휴대폰은 계속 켜둘게. 어서" 짐이 앉았다. 수전이 짐의 팔꿈치 아래를 잡았고, 밥은 그의 반대쪽 팔을 잡았다. 세 사람은 일어섰다. 그들은 짐을 죄수처럼 양쪽에서 잡고문까지 데려갔다. 수전은 짐이 밖에서 기다리는 버스까지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갑자기 절망감이 가슴을 찌르고 들어오는것을 느꼈다 잭이 다시 그녀를 떠나려는 것처럼. 짐이 돌아보았다. "내 조카에게 안부 전해줘." 그가 말했다. "잭이 돌아와서 기쁘다는 말도 전해주고." 그가 버스에 올라타는 동안 그들은 서 있었다. 거무스름한 차창 유리로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버스가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앉아 있던 플라스틱 의자로 돌아왔다. 이윽고 밥이 말했다. "정말 커피 안 마셔?" 수전이 고개를 저었다. - P559
... ...하늘에는 달빛도, 별도 없었다. 이토록 어둡다는 것이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경이로운 마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는 가슴으로 마거릿을 생각했다. 그는 메인으로 돌아오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잠시 걱정이 되어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마다 두꺼운 스웨터를 입어야 하고, 걸을때는 부츠 신은 발에 쌓인 눈이 차이고, 추운 방으로 들어가야하는 이곳. 그는 여기서 달아났고, 짐도 달아났다.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삶이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인생은 그런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짐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ㅡ 어두운 하늘만큼 광대한 어떤 느낌이 휩쓸고 지나갔을 뿐. 그는 개를 불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수전의 소파에서 잠들면서 밥은 짐이 전화를 할까봐 휴대폰을 진동으로 바꾼 뒤 - 밤새도록 ㅡ손에 들고잤다. 하지만 휴대폰은 진동하지도, 불빛을 깜박이지도 않았고, 파리한 여명이 염치없이 블라인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그대로 있었다. - P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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