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내가 고래를 아무리 해부해보더라도 피상적인 것
이상은 알 수 없다. 고래에 대해서는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ㅡ허먼 멜빌, 『모비 딕』

텍스트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나? 그것을 꿰뚫지 않으면, 그것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번역은 불가능하다. 번역은 텍스트를 투명해질 정도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게 벽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고 해도,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텍스트 너머의 침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 P20

아니, 번역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투명하다는 말조차 사람들이 서로 다른 뜻으로 쓰는데(사실 나도 이 글에서 같은 말을 두 가지 이상 다른 뜻으로 썼다)? 그래서 번역에 관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은 용어와 개념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란 무엇이다, 번역은 어떠해야 한다는 논쟁은 특수한 상황과 개별 사례를 아우르지 못한 채 엉뚱한 곳에서 맴돌고 만다. - P20

나는 번역을 명료하게 정의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은 없으니, 비유를 통해 비스듬하게 다가가려 한다. 내가 이 책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흰 고래를 정의하려는 이슈메일의 시도 같은 것이 될지 모른다. 이슈메일이 그랬던 것처럼,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분석하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 쓴 글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번역을 어떻게 (같은 말로) 다르게 말하고 있느냐는 이야기이자,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다. - P21

이슈메일이 열거한 흰색의 의미만큼, 바벨과 연관된 의미들도 다 합하면 흰색이 될 만큼 한없이 다채롭다. 바벨은 이렇듯 다양한 의미를 띠며 종교, 문학, 정치, 기술, 언어 등 숱한 분야에서 우뚝 선 상징이 되었다. 바벨의 의미가 탑처럼 끝없이 쌓여 무한으로 뻗는다. 바벨은 은유적 잉여다. 의미가 겹치고 겹치면서, 기호는 한 가지 의미를 안정적이고 고정적으로 띨 수 없다. 의마가 벽돌처럼 하나하나 쌓였다가 스르르 무너져 내린다. 바벨은 흰 고래처럼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 P30

바벨탑 이전에는,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언어를 썼을 뿐 아니라 단어의 의미가 하나였다. 아담이 이름 붙인 대로 사물과 이름이 일대일로 대응했고 언어는 명징했다. 바벨의 등장과 함께 그런 명징함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바로 바벨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듯이.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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