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결정>
모두가 인위적으로 기억이 지워지는 세상 끝의 섬.
단어가 하나씩 사라지고 사물도 그것에 대한 기억도 모두 사라진다. 그것이 있었다는 기억조차도 사라진다.
리본, 방울, 에메랄드, 우표, 향수, 모자, 배, 새, ...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기억소멸도 동시에 일어난다. 비밀경찰이 들이닥쳐 그에 대한 글, 서류, 책 등등을 모두 압수해 가져간다.
모두가 기억상실을 겪는 세상이다.
하지만 기억을 잃지 않는 특수한 인간의 존재가 조금씩 드러나고 비밀경찰은 그들을 연행해 간다.
15 년 전, 어머니가 끌려가시고 비밀스런 죽음을 맞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살고 있는 나.
나는 글을 쓰는 작가이다.
가장 두려운 건 말이 사라진 세상이다...
아무도 가보진 않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옆얼굴을 보며 말했다. "응" 그가 대답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R씨는 안경테를 검지로 밀어올린 후 그대로 턱을 괴었다. "어려운 질문이군." "마음이 꽉 차서 비좁아지지는 않아요?" "아니 그럴 염려는 없어. 마음에는 정해진 공간이나 테두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무슨 형태든 받아들일 수 있고, 한없이 깊이 내려갈 수도 있지. 기억도 마찬가지야." "지금까지 섬에서 사라진 것들이 당신 마음속에는 전부 온전히남아 있는 거네요." "온전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기억은 그저 늘어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시간과 함께 변해가거든. 때로는 사라지기도 하고, 그래도 섬사람들이 겪는 소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겠지만." - P107
"어떻게 다른데요?" 나는 내 손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내 기억은 뿌리째 뽑혀나가지 않아.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여도 어딘가에 여운이 있지. 작은 씨앗 같은 거야. 어쩌다 비가 내리면 다시 떡잎이 돋지. 그리고 설령 기억이 없어지더라도 마음이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기도 해. 떨림, 고통, 기쁨, 눈물 같은 것을." R씨는 신중하게 표현을 골라 대답했다. 떠오른 단어의 감촉을 혀 위에서 하나씩 확인한 후 입 밖에 내는 듯한 말투였다. - P107
"그렇습니다. 이제 좀 저희의 방침을 이해하신 것 같군요." 남자는 미소 지으며 다리를 바꿔 꼬았다. 훈장의 술이 가슴팍에서 흔들렸다. "소멸을 순조롭고 완벽하게 적용하는 것, 불필요해진 기억을 신속히 없애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저희 업무입니다. 쓸모없는 기억을 언제까지고 끌어안고 있어봤자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엄지발가락이 괴사하면 당장 잘라내야 합니다. 내버려두면 발을 통째로 잃게 되죠. 그것과 똑같아요. 문제는 기억과 마음에는 형태가 없다는 점입니다. 각각의 인간이 혼자만의 비밀을 숨겨놓을수 있다는 거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는 셈이니 저희도 신중해야 합니다. 대단히 섬세한 작업이에요. 모습이 없는 비밀을 찾아내 분석하고, 선별하고, 처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쪽도 비밀을 가지고 스스로를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뭐 그런 거예요." 단숨에 여기까지 말한 후 남자는 왼손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 P1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