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26. 당시 한나라당 대선주자였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서울 견지동 사무실인 '안국포럼'에서 가진 송년 기자간담회에서 내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한천작우'(旱天作雨)를 꼽았다. 맹자의 '양혜왕'편에 등장하는 '한천작우'는 '한여름에 심하게 가물어서 싹이 마르면 하늘은 자연히 구름을 지어 비를 내린다.'는 뜻이다.   

 


이 전 시장은 "내년에는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어지러운 세상이 계속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하늘이 길을 열어준다.'는 뜻의 '한천작우'를 골랐다."고 덧붙였다. 이는 최근의 국정혼란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동시에 내년 대선 승리에 대한 의지를 밝힌 것으로 풀이되었다. 
가문 하늘에 비를 내렸는지 어쨋는지 여하튼간에 2007.12.19.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7.12.30.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의미의 `시화연풍(時和年豊)'을 2009년도 신년 사자성어로 정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는 이 `시화연풍'은 조선시대 임금이 등극할 때나 새해 어전회의에서 국정의 이상으로 내거는 문구로, '화합의 시대를 열고 해마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2008년 2월 대통령 취임식 식전행사의 주제도 ‘시화연풍’이었는데, 당시 식전행사에서 박범훈 중앙대 총장이 작곡한 ‘시화연풍 아리랑’이 연주되기도 했다. 주호영 당시 당선자 대변인이 들어보인 당선자가 직접 썼다는 A4용지 크기 시화연풍 휘호는 그 옛날 김영삼 전 대통령이 큰 화선지에 큰 붓으로 일필휘지 휘날리던 붓글씨와 비교하자면 대통령의 휘호로서는 조금 소박하다는 느낌이다. 2007년 5월에 쓴 한천작우와 비교해 볼때 같은 사람의 글씨인지 약간 의아스럽다.  

 

궁벽한 향촌의 미관말직이 언감생심 어필(御筆)의 진위에 대해 왈가부하는 것이 가당찮은 일인 줄은 알지만 자고로 궁금한 것이나 의문사항이 있으면 불치하문도 감수하는 것이 선비의 공부법. 허나 둘러봐도 어디 물어볼 곳도 누구 불러볼 사람도 없고, 푸른 기와 대궐의 연풍문, 시화문 앞에 납작 엎드려 직부상소라도 올리라고 하니 곽중에 어데 가서 도끼 한자루 구할 데가 또 없느니 대충 그런 줄 알고 넘어갈 수 밖에 도리가 없다.  

 

2009.2.15. 청와대는 청와대 민원실이라 불리던 40년 된 낡은 단층건물 ‘북악 안내실 증축공사’ 준공식을 가지면서 안내실 건물의 이름도 내부 공모를 통해 ‘연풍문’으로 바꿨다. 청와대 서쪽에 있는 ‘분수대 안내실’의 이름은 당연하게 ‘시화문’이 되었다. 연풍문의 가장 큰 특징은 청와대 경내 최초의 ‘그린 오피스(Green Office)’ 건물이라는 점이다. 청와대 김백준 총무비서관은 “연풍문 건립은 생활의 녹색화에 대한 정부 의지를 드러낸 상징적 조치”라고 말했다. 연풍문은 지하 200m의 15℃ 정도인 지열(地熱)을 이용해 냉난방에너지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지붕과 전면 유리에는 건물일체형 태양광발전시스템을 설치했다고 한다.  

 

필부필부에서 왕후장상에 이르기까지 세상 만사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된다면 무슨 근심 걱정이 있겠는가 만은 역시 근심 걱정이 없으면 세상 사는 재미도 없는 법. 초등학교 학급 반장에 당선되어도 장밋빛 청사진이 화려한데 일국의 대통령 당선자로서 ‘시화연풍’이야 당연한 바램일 것이다. 백성들이 함포고복하며 강구연월을 구가하는 것은 예로부터 성군을 꿈꾸는 군왕들의 오랜 비원이었으니 일국이 분연히 일어서는 데는 지도자의 역할에 더하여 국민들의 통합된 노력도 필요할 터이다.

 

이 대통령은 또, 2008. 6.16. 제주 국제컨벤션센터(ICC)에서 열린 제8차 아셈(ASEM) 재무장관회의에 참석, 환영사에서 ‘마음만 있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웃처럼 가깝게 느낄 수 있다’는 의미의 사자성어 ‘천리비린(千里比隣)’을 인용, “아시아와 유럽은 비록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이해와 협력을 폭의 넓힌다면 누구보다 더 가까운 이웃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보다 훨씬 이전인 2000년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2차 준비접촉에 나온 북측의 김령성 단장이 영영식 우리측 수석대표에게 "우리 말에 '천리비린'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고, 마음이 천리면 지척도 천리라는 말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요즘에 와서는 남북간의 마음적 혹은 지리적 거리가 천리도 훨씬 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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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대통령하면 떠오르는 사자성어는 단연코 당연하게 대도무문 되겠다. 과문한 필자가 글씨 자체의 작품성에 대해 왈가부를 하기는 당치않으나 큰 붓으로 일필휘지 휘갈기는 모습은 일면 대한 남아의 마초적 호연지기가 살짝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통큰 선비의 풍모가 얼핏 엿보이기도 한다.   


대도무문(大道無門). ‘큰 도둑(大盜)에게는 문이 필요없다’라고 오역되기도 하는 이 사자성어는 글자대로 풀어보자면 말그대로 큰 길에는 문이 없다는 말이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출전으로 알려진 《무문관》은 중국 송나라때 불서로 《벽암록》, 《종용록》과 더불어 불교계의 대표적인 수행 텍스트로 알려져 있다. 그 무문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대도무문 천차유로 투득차관 건곤독보) "큰 길에는 문이 없으나 갈래 길이 천(千)이로다. 이 빗장을 뚫고 나가면 하늘과 땅에 홀로 걸으리라." 불가의 이야기는 바람타고 구름잡는 형국이라 얼른 이해가 어렵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했으니 글로는 설명이 어렵고 이심전심으로 알아먹어야 하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를 말하자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나 정도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정도의 뜻으로 쓰여지는 것 같다. 호연지기와 일맥이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1993년 7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 방한 당시 통역을 맡고 있던 박진 의원이 이 대도무문을 통역하면서 처음에는 직역으로 “큰 길에는 정문이 없다(A high street has no main gate)”로 해석했다가, 다음에는 “정의로움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한다(Righteousness overcomes all obstacles)”로 의역했다가, 그래도 클린턴 대통령이 잘 못알아 듣자 “고속도로에는 요금정산소가 없다(A freeway has no tollgate)는 의미다”라고 설명하자 그때서야 클린턴 대통령은 박장대소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우리나라 말로도 똑 부러지게 해석하기 어려운데 영어로야 오죽하겠는가. 

 
YS는 ‘용(龍)’자 대작을 주로 쓴 창해 김창환에게 사사했다고 전해진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YS의 글씨체를 가리켜 대도무문을 하도 많이 써서 ‘대도무문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전통적인 필법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검사 출신인 구본진씨가 쓴 《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 필적은 말한다》에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글씨는 서법에 따르지 않고 나름대로 독창적인 글씨체를 구사했다. 그가 즐겨쓴 대도무문은 그의 필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붓만 왔다 갔다 한 듯 필획이 약하다.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굵은 체로 종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에서 통 큰 사람임을 드러낸다. 글씨 속도는 매우 빠르다. 매우 빠르게 결정하고 직선적이며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성격이다. 기교가 거의 없고 정확한 정사각형 형태로 쓰고 있는 것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올곧은 사람임을 드러낸다.”고 했다. 호평이다.

 

큰 길에 문은 없어도 휘호 대도무문에 값은 있다. “대도무문” 휘호는 2004년 6월 서울옥션 경매에서는 460만원에 팔렸고, 2009년 2월의 서울옥션 경매에서는 380만원에 낙찰되었다. 가격은 작품의 예술성보다는 역사성이나 희소성에 더 좌우된다는 분석이고, 구입자들은 정치적 지지자들이나 대통령 휘호 수집 마니아 층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에 소재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를 일방하게 되면 김영삼 전대통령의 친필 휘호 《대도무문(大道無門)》, 《호연지기(浩然之氣)》등을 만나볼 수 있다.  


YS 임기 마지막 해인 1997년의 휘호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이었다.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한다는 뜻인데, 불행히도 그의 집권 말년은 잘 마무리되지 못했다. 문득 월남 이상재 선생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사에 유시유종이 썩 드무오”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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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도 메인에 떠 있는데 “400년만에 막내린 가문의 대결“이라고. 오랜 시비의 결론은 버킹검이 아니라 역시 벼슬이었다.  

학봉으로 말하자면 서애보다 연상이고, 서애도 뭐 퇴계의 적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안동의 분위기는 그래도 학봉을 퇴계의 적통으로 치는 편이고 보면 학봉이 비록 임진년 전란에 일부 책임이 있다고는 하지만 전란중에 진주성에서 순국했으니 쎄미쎄미가 되는 셈이고,   

서애로 보자면 서애가 비록 학봉보다 연하이고, 또한 글하는 선비라기 보다는 경세하는 관료라는 측면이 강하지만, 일국의 총리대신으로 국가존망의 중차대한 시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간 그 노심초사와 각고면려를 돌아본다면 응당 퇴계의 왼편자리는 서애의 몫일 것이나,  

400백년이 지난 지금 퇴계고 학봉이고 서애고 뭐고 다 퇴색되고 유학 자체가 퇴물이 된 이마당 저마당 앞마당 뒷마당에 좌배향 우배향이 뭐가 중요하겠나. 득세하던 시절에야 꼬장한 자존심 대결도 볼만했지만 퇴락한 시절에야 서원 복원만해도 감지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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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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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소설을 처음 읽은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십년도 훌쩍 넘은 거 같다. <빈집>, <깊은 슬픔> 같은 것들을 읽었나 보다. 아..<풍금이 있던 자리> 도 기억난다. 우리 동네에 같은 이름의 커피숍이 있었고 비슷한 제목의 영화도 있었던 것 같다. 씨의 소설은 대체로 슬펐던 것 같고, 당근 재미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약간 감상적 소녀취향도 감지되곤 했다.  

 

전에도 몇 번 언급했듯이 본인 한국소설에서 손 놓은지 한참 지나 두서너참은 되었다. 한국소설이라고는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만, 그것도 대상수상작만 간신히 읽어내고 있는 형편인데 지금 왜 이 책을 읽었는가 그 까닭을 밝혀 알리자면 이렇다. 본인에게 호구의 책을 마련해 주고 있는 황송한 우리 공장에서 정력적으로 추진하고 사업중 하나가 바로 독서운동이다. 전직원이 한달동안 같은 책을 읽고 저자를 초청해 특강을 듣는 그런 내용인데 무척 유익하다는 생각이고 나아가 감사하는 마음도 품고 있다.   

 

언젠가 어디선가 주워 읽기로 신경숙의 유년시절 무척 곤궁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일전에 또 어디선가 그녀의 멋진 서재를 보고는 아~ 돈 많이 벌었구나. 부러움에 더하여 약간 의 실망감도 느꼈던 것 같다.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고 성공했으면 따뜻한 축하의 박수를 보내야지 왜 실망감 같은 걸 느끼는지 생각혀 보면 부끄럽다. 아! 그리고 신경숙의 부군이 시인 남진우라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알았다. 내한테 연락도 없이 언제?   

 

이건 여담이지만 이문열은 인세만 1년에 5억정도라고 하니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봉 수억 수십억 받는 프로 운동선수들에 비하자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역시 인세라는 것은 방구석에 가만히 들눕어 코만 후비고 있더라도 꼬박 꼬박 나오는 것이니 참 좋기는 좋다는 생각도 하고 그러다가 전에 또 가수 아무개씨는 가요방을 통한 저작권료만 일년에 수천만원이라는 기사를 읽은게 또 문득 떠오르고.... 

 

책으로 돌아가서, 내용은 역시 슬프다.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 앉아 읽는데 눈물이 날뻔한 대목이 여러 군데 있었다. 눈물은 날랑말랑 했지 안타깝게도 흘러내리지는 못했다.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글썽인 적은 최근에도 여러번이지만 책을 읽다가 울랑말랑 한 적은 정말 몇 백년만인 것 같다. 용서와 희생과 인내로 점철된 삶. TV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매달 45만원씩 고아원에 기부하고 봉사활동을 했다는 부분에서는 약간 고개가 갸우뚱. 이 책에 등장하는 엄마는 거의 성자의 수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런 엄마가 혹 있을 수는 있어도 지난날 한국 엄마의 전형이라고 하기에 다소 무리라는 생각. 엄마의 사랑과 희생을 너무 강조하다가 약간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등등이 든다.   

 

어쨌든 결론적으로다가는 재미있게 읽었고, 약간의 감동과 눈물 찔끔도 있었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해 보는 계기도 되었다. 특히 효에 대하여. 수욕정이풍부지 라 했던가. 논어에 나오는 한밤중에 밭에 나가 하늘을 우러러 울며 탄식했다는 순임금(우임금인가?)의 이야기라든지, 나이 칠십이 되어서도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재롱을 부렸다는 노래자의 고사는 새삼 생각해 보면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참고로 신경숙 작가의 특강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으로서 당일 있었던 국민의 대의기관인 의회 의원님의 심도있는 질의 및 요구사항을 주의깊게 경청하고 관련 자료를 작성해야 했던 것인데, 특강에 참석했던 인사의 전언에 의하면 뭐 특별한 점은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앉아서 졸았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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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일에 김인식공(公)이 울돌목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일로  

영남유림이 벌떼같이 일어나 공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천거하는 장계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아뿔싸!! 황상께옵서 봉하에 저리 되어 계시니....  

어이할꼬...아국의 앞날이여....충무공이래 김인식공 만한 이가 없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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