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었는데 지방에 사는 몸으로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였으나

역시 박물관 관람은 많은 체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일종의 구도를 위한 고행 비슷한 것이었다.

지난날의 유물이나 유적이 반드시 그 크기로 우열의 첫째를 삼는 것은 아니나

일단 크고 보면 눈에 띄게 마련이다.  박물관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것은 저 석탑이었다.

그 옛날, 탑을 쌓은 사람들의 마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곰곰 생각에 잠겨 볼 수도 있었겠으나

처음 들어갈 때는 볼 것이 많아 마음이 바빴고, 나중에 나올 때는 노동으로 지친 몸이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역시 내가 그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추신 :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깜빡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반가사유상이 있다.!!!

어둑어둑한 방에서 어여쁜 금동보살님이 은은한 광체를 뿜으며 생각에 잠겨 턱을 고이고 앉아 계신다. 

그건 정말 볼 만하다.   언제 다시 한번 가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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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일간지 모모한기자의 홈피에서 가져왔던 것이다. 3~4년 되었지 싶다.

연애편지 쓸때 써먹을려고 말이다. 처음 봤을 때는 실로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어디 저장해 놓았던 것인데, 세월흘러 다시보니 비록 심금이 덜 울기는 해도

아직 그 울림의 여운은 남아있는 듯 하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더라도

오랜세월 잘 담궈놓았던 무언가가 마음속에 있다면  좋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나는 그런게 없는 것 같다. 빈 주전자를 어디에 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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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靜菴 趙光祖가 갓 젊은 나그넷길에서 어느 집에 한동안 묵으려 했을

때, 그 집 시악씨가 한눈에 반해 홰를 치고 바짝거려 오고 있었던 걸로

보면 趙光祖는 생김새도 아주 잘생긴 美男子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光祖는 그 여인의 秋波를 받아들이질 않고,  냉큼 딴 집을 찾

아 옮겨 가려고만 하고 있었다.


  여자가 마지막 작정으로 그 머리에 꽂은 비녀를 빼 光祖에게 주었을

때,  光祖는 그걸 위선 받아 가지고 가긴 했지만, 이내  되돌아와서 그

비녀를 그 여자의 집 한쪽 벽 틈에다 꽂아 놓고 물러가 버렸다.


  어땠을까?

  光祖가 그 때 그 여자의 秋波를 받아들여 한때 히히덕거리며 즐길 수

도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그의 서른 여덟 살 때의 그 飮毒死刑 같은 건

면할 수도 있지 안 했을까? 적당히 그때그때를 끌끌끌끌 히히덕거리면

서 父母妻子 안 울리고 살아남아 있었을 것이다.


                    -『燃黎室記述』 卷之八 , 中宗朝 「己卯黨籍」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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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의 역사관이란 이런 것이었다. 조광조가 주초위왕의 누명을 쓰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기묘사화 이야기는 TV사극의 단골메뉴이다. 아마 본인이 기억하기에 가장 최근에 조광조역을 맡은 배우는 유동근이었던 것 같다. 텔레비전 사극에서 조광조는 꼬장꼬장한 대쪽같은 선비라기보다는 뭐랄까 신념과 사명감에 불타는 혁명가 비슷한 이미지였다.


미남자에 공부도 잘하는 정의의 사나이였으니, 팬도 많았겠지만 당연히 적도 많았겠다. 팬이 많았으니 사림의 정신적 표상이 되었을 것이고, 적도 있었으니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명횡사의 비운을 겪었을 것이다. 시악씨의 추파를 받아들여 히히덕거렸다면 부모처자야 울리지 않았겠지만 이른바 표상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둘 다 얻을 수는 없다.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법인데, 우리네 같은 필부필부에 이르면 부모처자의 눈물이 너무 가슴에 사무치는 것이다. 



조광조 趙光祖 (1482∼1519, 성종 13∼중종 14)

자는 효직, 호는 정암. 김굉필의 문인으로,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이다. 김굉필·정여창·이황과 함께 동방4현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510년 사마시에 합격, 1517년 경연시독관과 춘추관기주관을 겸임, 1518년 부제학, 대사헌. 1519년 정국공신 위훈삭제를 강력하게 청하다가 남곤·홍경주 등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서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고, 이어 사사되었다. 그의 도학정신(道學精神)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이이 등 많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림의 정신적 표상이 되었으며, 조선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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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06-02-22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조, 광조 하니까 문득 가수 이광조가 생각난다. 소문도 무성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내가 쓴 글에 내가 댓글을 달자니 좀 그렇다...)
 
퐁네프의 연인들 CE - [할인행사], 완전 무삭제판
레오 까낙스 감독, 줄리엣 비노쉬 외 출연 / 이지컴퍼니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문어대가리 마냥 머리에는 털이라는 털은 한 터레기도 남아있지 않는 넘이 불 뿜는 용도 아닌 것이 입으로는 불을 토해내며 그 불로 자기 팔을 지지고하는 그런 위험천만의 곡예를 하는 녀석하고, 눈알이 빠져 없어져 버릴 그러한 절체절명의 치명적인 위기에 처한 자포자기의 막가는 처녀 화가하고. 둘이 발광 용을 쓰는, 말하자면 별 거지같은 사랑이야기인데, 줄리에트 비노쉬가 막가파가 확실하다는 것은, 그 우둘뚜둘한 벽에다 주먹을 갖다대고 긁어 버리는 피가 질질 유혈이 낭자했던 그 오금저린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났으니, 본인은 심사가 처절해져 차마 두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어서 한 눈은 찌부려 감고 나머지 한 눈을 겨우 떠서 간신히 보았던 것이다.

우리네 관습이란 거지들은 주로 다리아래에 서식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야네들은 다리위에서 주로 죽때리고 있더라나. 그넘의 다리가 요상하게 예술적으로 생겨 먹은 것이 여관방 객실처럼 차 나다니는 길에서 하나씩 똑똑 동그랗게 떨어져 나가앉아 있는 공간이 있어서, 집구석에서 쫓겨났든 지발로 기어나왔든 어쨌든간에 집없는 아새이들 한 밤새기에 안성마춤일러라. 비오거나 일기 악천후시에는 애로가 과중할 것이나 어차피 집나오면 고생이고, 이 막가파 처녀화가가 루브르박물관 문지기 할배에게 육보시를 하고, 그 대가로 천국의 열쇠를 얻어내어 모두 자빠져 자고 있는 깊은 밤, 어두운 밤, 촛불하나 외로이 밝혀 들고 박물관으로 잠입하여 울며 쓰다듬으며 황홀하게 바라본 그 그림이 램브란트의 자화상이라는데, 영화를 볼때는 그것이 램브란트 자화상이었는지 뭐였는지 무식한 본인은 몰랐다. 나중에 듣기로 그렇다고 하니 그런줄로 알았다.


여기서 의문 하나, 박물관의 문지기 영감은 왜 뒈져버렸나? 늙어빠진 육신이 가졌던 덧없고 허망한 욕망의 값이 죽음이라!! 하기사 죄의 값은 사망이라 했던가, 허나 내 생각에 영감 너무 오바한 것 같아. 강가에 신발 두 켤레만 달랑 남겨두고 말이지. 막가파 처녀화가는 결국 실명하여 영감탱이가 빠져 죽은 그 강물에 몸을 날려 수장되고, 문어대가리는 제 입에서 나온 불로 제 몸을 불살라 등신불이 되어 화장되어야 할 것인데....화려한 불꽃놀이에 모타보트, 사랑의 유람선으로 이 영화를 끝낸다는 건 아무래도 조금 아쉽다. 연이나 년넘둘이 회오리바람처럼....팽팽... 팽이같이 미쳐 돌아가는 포스터는 일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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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06-02-20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를 정리하면서 페이퍼에 있던 것을 리뷰로 옮겨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23 - 제3부 천하통일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3권의 부제는 <새로운 지도>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이에야스가 일본 전국(全國)을 떡 주무르듯이 하여 새로운 지도를 만들고 있다는 내용이다. 코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죽었다. 아시다시피 임진년 전쟁중 일본군 무장 3인의 면면이란 코니시를 비롯하여 카토 기요마사(가등청정), 쿠로다 나가마사(흑전장전) 되겠다. 텔레비전 사극 같은 걸 보다보면 임진왜란 즈음해서는 이런 장면을 많이 보게된다. 조선반도 지도가 나오고 커다란 화살표 3개가 대한해협을 건너 조선을 가로지르는 그래픽이 나오면서 성우의 설명이 뒤따른다. 임진년 히데요시의 명을 받든 조선 침략군 제1군은 고니시 군으로 어디어디를 거쳐 어디로, 제2군은 가토군으로 경상좌도를 거쳐 어쩌고, 제3군 쿠로다 군은 경상우도를 거쳐 어쩌고 저쩌고.....

도요토미 사후 일본 천하판도를 판가름하는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쿠가와 반대편에 참전했던 코니시는 전투가 동군(도쿠가와군)의 승리로 끝나자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그 잘려진 머리가 쿄토의 한 다리위에  효수되었다. 특이하게 코니시는 여타 수다한 일본 무사들의 ‘니미 배짼다. 목댕강 해라!’ 할복의 전범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천주교 신자라 자살을 할 수 없었다 한다. 1600년의 일이다. 이건 여담인데, 일본에서 천주교가 처음 유입된 것이 아마도 덕천막부 수립전 전국(戰國)시대인 것 같다. 일본에서의 천주교 탄압이 대단했으며 순교자도 엄청 나왔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친구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온 것이 조선조말이었으니 우리보다 한 200년 빠른게 된다.


같은 히데요시의 가신이었으나 도쿠가와군에 가담한 가토와 쿠로다는 어떻게 되었나?  카토 기요마사는 쿠마모토에서 24만석 영지를 더 받아 54만석의 큰 다이묘가 되었고, 18만석 쿠로다 나가마사도 후쿠오카에서 50여만석의 큰 다이묘가 되었다 한다. 이 책을 보니 일본 영주들은 그 세력의 크고 작음을 쌀 소출량으로 가늠하고 있는데,(당시 이에야스는 일본 동부지방에 300여만석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무력의 계산도 여기에 따른다. 영지 100석에 병사 20명하는 식으로 계산하여 10만석의 다이묘는 2만명 정도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누구는 몇 석, 누구는 몇 석하는 것이 마치 옛날에 진짜로 재미있게 봤던 만화 <드래곤볼>에서 이놈의 파워는 얼마, 저놈의 파워는 얼마 어쩌고 하던 것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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