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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23 - 제3부 천하통일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3권의 부제는 <새로운 지도>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이에야스가 일본 전국(全國)을 떡 주무르듯이 하여 새로운 지도를 만들고 있다는 내용이다. 코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죽었다. 아시다시피 임진년 전쟁중 일본군 무장 3인의 면면이란 코니시를 비롯하여 카토 기요마사(가등청정), 쿠로다 나가마사(흑전장전) 되겠다. 텔레비전 사극 같은 걸 보다보면 임진왜란 즈음해서는 이런 장면을 많이 보게된다. 조선반도 지도가 나오고 커다란 화살표 3개가 대한해협을 건너 조선을 가로지르는 그래픽이 나오면서 성우의 설명이 뒤따른다. 임진년 히데요시의 명을 받든 조선 침략군 제1군은 고니시 군으로 어디어디를 거쳐 어디로, 제2군은 가토군으로 경상좌도를 거쳐 어쩌고, 제3군 쿠로다 군은 경상우도를 거쳐 어쩌고 저쩌고.....
도요토미 사후 일본 천하판도를 판가름하는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쿠가와 반대편에 참전했던 코니시는 전투가 동군(도쿠가와군)의 승리로 끝나자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그 잘려진 머리가 쿄토의 한 다리위에 효수되었다. 특이하게 코니시는 여타 수다한 일본 무사들의 ‘니미 배짼다. 목댕강 해라!’ 할복의 전범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천주교 신자라 자살을 할 수 없었다 한다. 1600년의 일이다. 이건 여담인데, 일본에서 천주교가 처음 유입된 것이 아마도 덕천막부 수립전 전국(戰國)시대인 것 같다. 일본에서의 천주교 탄압이 대단했으며 순교자도 엄청 나왔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친구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온 것이 조선조말이었으니 우리보다 한 200년 빠른게 된다.
같은 히데요시의 가신이었으나 도쿠가와군에 가담한 가토와 쿠로다는 어떻게 되었나? 카토 기요마사는 쿠마모토에서 24만석 영지를 더 받아 54만석의 큰 다이묘가 되었고, 18만석 쿠로다 나가마사도 후쿠오카에서 50여만석의 큰 다이묘가 되었다 한다. 이 책을 보니 일본 영주들은 그 세력의 크고 작음을 쌀 소출량으로 가늠하고 있는데,(당시 이에야스는 일본 동부지방에 300여만석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무력의 계산도 여기에 따른다. 영지 100석에 병사 20명하는 식으로 계산하여 10만석의 다이묘는 2만명 정도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누구는 몇 석, 누구는 몇 석하는 것이 마치 옛날에 진짜로 재미있게 봤던 만화 <드래곤볼>에서 이놈의 파워는 얼마, 저놈의 파워는 얼마 어쩌고 하던 것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