靜菴 趙光祖가 갓 젊은 나그넷길에서 어느 집에 한동안 묵으려 했을

때, 그 집 시악씨가 한눈에 반해 홰를 치고 바짝거려 오고 있었던 걸로

보면 趙光祖는 생김새도 아주 잘생긴 美男子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光祖는 그 여인의 秋波를 받아들이질 않고,  냉큼 딴 집을 찾

아 옮겨 가려고만 하고 있었다.


  여자가 마지막 작정으로 그 머리에 꽂은 비녀를 빼 光祖에게 주었을

때,  光祖는 그걸 위선 받아 가지고 가긴 했지만, 이내  되돌아와서 그

비녀를 그 여자의 집 한쪽 벽 틈에다 꽂아 놓고 물러가 버렸다.


  어땠을까?

  光祖가 그 때 그 여자의 秋波를 받아들여 한때 히히덕거리며 즐길 수

도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그의 서른 여덟 살 때의 그 飮毒死刑 같은 건

면할 수도 있지 안 했을까? 적당히 그때그때를 끌끌끌끌 히히덕거리면

서 父母妻子 안 울리고 살아남아 있었을 것이다.


                    -『燃黎室記述』 卷之八 , 中宗朝 「己卯黨籍」條


-------------------------------------------------------------------


미당의 역사관이란 이런 것이었다. 조광조가 주초위왕의 누명을 쓰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기묘사화 이야기는 TV사극의 단골메뉴이다. 아마 본인이 기억하기에 가장 최근에 조광조역을 맡은 배우는 유동근이었던 것 같다. 텔레비전 사극에서 조광조는 꼬장꼬장한 대쪽같은 선비라기보다는 뭐랄까 신념과 사명감에 불타는 혁명가 비슷한 이미지였다.


미남자에 공부도 잘하는 정의의 사나이였으니, 팬도 많았겠지만 당연히 적도 많았겠다. 팬이 많았으니 사림의 정신적 표상이 되었을 것이고, 적도 있었으니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명횡사의 비운을 겪었을 것이다. 시악씨의 추파를 받아들여 히히덕거렸다면 부모처자야 울리지 않았겠지만 이른바 표상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둘 다 얻을 수는 없다.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법인데, 우리네 같은 필부필부에 이르면 부모처자의 눈물이 너무 가슴에 사무치는 것이다. 



조광조 趙光祖 (1482∼1519, 성종 13∼중종 14)

자는 효직, 호는 정암. 김굉필의 문인으로,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이다. 김굉필·정여창·이황과 함께 동방4현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510년 사마시에 합격, 1517년 경연시독관과 춘추관기주관을 겸임, 1518년 부제학, 대사헌. 1519년 정국공신 위훈삭제를 강력하게 청하다가 남곤·홍경주 등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서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고, 이어 사사되었다. 그의 도학정신(道學精神)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이이 등 많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림의 정신적 표상이 되었으며, 조선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하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돼지 2006-02-22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조, 광조 하니까 문득 가수 이광조가 생각난다. 소문도 무성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내가 쓴 글에 내가 댓글을 달자니 좀 그렇다...)